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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대선 지지율 40%와 후보단일화 지면기사
이재명 지지율이 35∼40% 박스권이다. 윤석열도 지지율 회복에도 불구하고 40%를 확실히 진입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아직까지 어느 후보도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다.여론조사에서 대선 승리를 위해 넘어야 하는 선은 40%, 45%다. 사실상 양자대결일 경우는 45%, 다자대결일 경우는 40%가 기준선이 된다. 실제 역대 대선 당선자의 득표율을 보면 13대 노태우 36.6%, 14대 김영삼 42.0%, 15대 김대중 40.3%, 16대 노무현 48.9%, 17대 이명박 48.7%, 18대 박근혜 51.6%, 19대 문재인 41.1%로 사실상 양자 대결이었던 16·17·18대 당선자 평균 득표율은 49.7%이며 나머지 4차례의 다자 대결 평균은 40.0%였다. 따라서 여론조사의 부동층을 감안하면 다자대결에서는 40%, 양자대결에서는 45%를 넘으면 이기는 선거로 본다. 그리고 이번 대선은 다자 대결이기는 하나 현재까지는 양자에게 표 쏠림 현상이 나타나 40%가 아니라 45%가 넘어서야 할 기준이다. 각 진영보다 중도 마음 얻어야만 40% 넘겨李 '40% 안되는 정권재창출' 넘어야 할 벽尹 '文 대통령 40% 높은 지지율' 극복 숙제'마의 40%대' 넘지 못하면 '단일화' 재등장 그럼 왜 40%가 그렇게 넘기 힘든가?첫 번째 이유는 대선 후보의 선거지지율은 상대평가이기 때문이다. 상대평가에서 당락이나 찬반을 결정짓는 기준은 50%다. 50%가 만점인 것이다. 반면 대통령 지지율은 국민 모두 아울러야 하는 절대평가지표이기에 100%(점)가 만점이다. 그래서 이재명 지지율 35∼40%를 대통령 지지율 40%보다 낮다고 비교할 수 없다. 오히려 이재명의 35∼40%대 지지율이 대통령 지지율 40%대보다 더 얻기 어려운 수치이다. 즉 대선 후보의 지지율 40%는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 40%가 아니라 80%에 비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만큼 대선 후보들의 지지율이 힘들다.두 번째는 국민이 만들어 준 균형과 견제의 운동장이다. 87항쟁 이후 탄핵이나 국정파탄과 같은 특정시점을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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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조간신문을 읽는 즐거움 지면기사
저 건너 숲에서 들려오는 아침의 소리는 파이프오르간 반주에 맞춘 합창 소리 같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지난 가을엔 안개 자욱한 풍경을 보고, 초봄엔 매화나무 가지에 꽃눈이 맺힌 걸 눈여겨보았다. 오늘 아침엔 숲 아래로 종 치는 걸 잊은 교회 첨탑이 보이고, 숲 위로 회색 구름 몇 장이 걸려 있을 뿐이다. 식탁에는 막 구운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 방금 씻어 껍질째 사등분한 사과 한 알 그리고 조간신문. 나는 아침마다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조간신문을 펼친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가를 말해다오. 그러면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말하겠노라.한 프랑스 에세이스트는 "이것은 모순적인 사치다"라고 말한다. 무엇이 모순적 사치란 말인가? 바로 아침 식탁에서 조간신문 읽는 일이다. 부지런한 신문배달원의 발걸음 소리와 함께 신문이 현관 앞에 떨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새벽의 이 경쾌한 소리가 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다. 아침 식탁 위에 펼친 조간신문엔 나라 안 흉악 범죄에서 먼 나라의 지진이나 홍수 피해, 피로 얼룩진 내전과 테러 소식이 난무한다. 세상의 죄악과 음습한 소식으로 소란스러운 조간신문은 아침 식탁의 고요함과 극단적으로 부조화를 이룬다. 우리는 종종 이 부조화의 간극에서 기묘한 느낌에 빠진다. 세상 소식 고요한 식탁에서 접하는 아침 재미오늘을 알고 내일을 예측하는 어려운 일 감당 나는 중학교 입학 무렵부터 조간신문을 읽었다. 그 시절엔 신문을 구독하는 집들이 많았다. 마당에 떨어진 조간신문을 주워들고 와 읽는 기쁨은 각별했다. 조간신문에서 연재소설을 읽고, 1968년 달 탐사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소식을 접했다. 인류 중 최초로 달 표면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이 남긴 "한 인간에겐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란 말은 내 심장을 얼마나 빨리 뛰게 했던가! 나는 조간신문을 통해 세상 견문을 넓혔다. 지금 읽는 한자도 조간신문을 읽으며 익힌 것이다. 그 무렵 한 지방신문에서 중·고교 학생을 대상으로 '3·1문예상' 공모 단신을 찾아내고 시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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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당신에게 웃을 용기 지면기사
늘 뜻대로 되지 않을지언정 새해의 희망과 다짐을 꼽아볼만한 즈음이다. 작년 이무렵에 쓴 일기를 보니까 다소간 축 처진 어조로, 어쨌거나 희망을 담아서, 다가오는 2021년에는 보고싶은 사람들을 마음껏 다시 만나고 싶다고 적었다. 외향성인 나에게 사회적 거리두기의 1년은 힘들었던 것이다. 몽골 여행을 가고싶다고 적은 부분은 지금 와서 다시 보니 그 순진한 바람이 너무 안쓰러울 지경이다.다시 1년이 흘러 코로나와 함께한 시간이 3년차에 접어들고 있는 요즘, 해외여행 같이 거창한 것을 섣부르게 바라서는 안 된다 치고, 작년에 바랐던 것의 절반만큼이라도 올해는 이룰 수 있을까? 야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하고 반갑게 안부를 묻는 친구들의 모임들 같은 것 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올해의 소망으로 꼽았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기 힘들만큼 내 마음은 위축되었다. 그런 걸 바란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만 해도 어디선가 철없다는 비난의 소리를 들을 것처럼, 나는 주변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어느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한 내 모습이 낯설어 보였다. 그렇다, 마스크를 깜박 잊고 나선 것이다. 동승자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 마스크를 챙겨 나왔다. 몇분 안 되는 사이에 누가 타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했다.불안해하는 짧은 와중에도 나는 거울에 비친 낯선 내 얼굴을 흥미롭게 보았다. 집 밖에서 이렇게 얼굴을 가리지 않은 상태였던 적이 없어서 중요한 속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거북할 지경이었다. 복도나 엘리베이터 같은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개방된 실외에서도 마스크 착용이 필수라고 느끼는데, 그것은 감염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혹시라도 비난받을지 모를 가능성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에게 질병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회적 비난이다.일상회복은 해외여행·친구 만남만은 아냐낯선 사람들과 경계심 없이 이야기 나누며별 뜻없이 미소 던질 수 있었던 기억들이다 작년 이무렵 일기장 속의 나는 많은 사람들이 백신을 맞으면 코로나의 공격에서 다같이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언론의 분석기사를 기록하고, 백신의 빠른 개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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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야권이 바라는 정권교체의 길 지면기사
권력이 커갈수록 남용하려 드는 약한 인간들, 그들이 대통령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그렇게 스스로 약자로 전락했다. 이 정권 들어서도 권력 남용의 그림자가 온 나라에 그늘을 드리웠다. 조국사태는 그 절정이었다.그때 한 사나이가 거대 권력에 맞섰다. 칼 한 자루의 검찰총장이 수천 자루 칼을 가진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다니! 현 정권은 모든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권력 남용이 만들어 낸 것이 대선 후보 윤석열이다. 권력 남용에 진저리치던 국민들이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그 환영에 답하기만 하면 대선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었다. 그 답은 대통령이 되어도 권력에 취하지 않으리라는 표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리멸렬한 야당 대신 그에게 희망을 걸었던 나는 그를 만날 때면 "윤 총장! 당신이 무식한 줄만 알면 대통령이 될 것이오"라고 직언을 했다. 검찰의 우물에서는 출중했다 해도 세상의 바다에서는 턱없이 부족할 터라 겸손하기를 바라서 일부러 강하게 주문한 것이다.그런데 그의 정치적 첫 거보는 국민의힘 입당이었다. 수십명의 의원들이 그를 에워쌌다. 목소리에서도 걸음걸이에서도 권력자의 그림자가 엿보였다. 대통령이 되면 또 어떤 권력 남용의 유혹에 빠져들지 국민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세를 넓혀갈수록 그의 빛은 사그라들고 있었다.가슴 속에 품은 비전이 있다면 가득 차올라 그 비전을 내놓기에도 여념이 없을 터인데 정권 교체만 부르짖었다. 그것은 권력의 향방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으로 비치어 오히려 정권 교체를 불가능하게 할 것 같았다. 입법, 사법을 장악한 여당이 집권하면 불의를 정의로, 거짓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권력 남용이 또다시 행해질 것 아닌가."나는 윤석열" "나는 이재명" 하던 사람들요즘엔 "찍을 놈 없다"며 떨떠름한 표정들 나는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절망하며 밤을 지새울 국민들도 스쳐 갔다. 나도 뭔가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게 무슨 힘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다 나도 힘에 의지하는 사람인가 의구심이 들었다. 내 가슴에도 비전이 있다면 힘이 있건 없건 뭐라도 할 수 있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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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친박·친이, 대통령과 사면 그리고 윤석열 지면기사
보수정당에는 친박·친이라는 두 계보가 있다. 친박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따르는 정치인들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화주의 성향 노선이다. 반면 친이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따르는 정치인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신자유주의 성향 정치를 했다.이번 특별사면에서 두 전 대통령의 운명이 엇갈렸는데 52년생으로 형 만기가 2039년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특별사면이 된 반면, 11년이나 더 고령으로 2037년이 만기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제외되었다. 사면 이유로 박 전 대통령의 수형기간이 좀 더 길고, 건강이 나빴다고는 하지만 친이 입장에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면 직후 여론은 박근혜 전 대통령편이었다. 27일 쿠키뉴스 데이터리서치조사에 의하면 박 전 대통령의 사면에 대해 65.2%가 잘했다(잘못했다 31.8%)고 한 반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사면하지 않은 것에 대해 55.4%가 잘했다(잘못했다 39.3%)라고 했다. 왜일까? 혹자는 박 전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고, 여성이기에 연민의 정이 컸다고도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친박과 친이의 정치노선 차이일 것이다. 박근혜, 국가와 민족 앞세워 국민행복 강조이명박, 개인 이익·냉혹한 경쟁체제 내세워 두 진영의 정치 노선의 차이는 두 전 대통령의 과거 선거 캠페인을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명박은 약체 정동영을 상대로 시장경쟁 해법을 제시하면서 국민에게 '부자되세요'라고 하고 새벽 국밥집에서 욕을 들으면서 '경제나 살려라'는 캠페인을 펼쳤다. 반면 박근혜 캠페인은 강력한 경쟁자였던 문재인을 상대로 냉혹한 시장경쟁에 대해 '법치사회'·'원칙이 선 자본주의'·'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국민행복'으로 맞섰다. 그 결과 이기기 쉽지 않은 선거를 이겼다. 두 사람의 선거캠페인을 비교해보면 이명박은 국가나 민족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앞세우는 냉혹한 무한 경쟁체제 즉 신자유주의였다면, 박근혜는 국가와 민족을 앞세우면서 책임과 의무 그리고 국민 행복을 강조하는 공화주의에 가깝다.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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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배춧국과 동지 팥죽 지면기사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속절없이 지는 태양을 전송하자. 겨울은 태양조차 차갑다. 펄펄 끓던 여름의 야만적인 태양이 식은 지 오래다. 지나간 날은 끔찍했다. 레몽 끄노는 "악마들이 달군 게 태양"이라고 그랬지. 광기와 대의명분으로 태양이 극렬하던 시대가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말똥 냄새가 나는 가을이 끝날 무렵 우리는 눈(雪)과 얼음, 소금과 후추, 양초 여섯 개를 위해 마련한 겨울 스웨터를 장롱에서 꺼내 입었다. 스웨터를 입으면 저녁의 스산함은 운명의 순간으로 빛난다. 겨울 황혼은 잘 구운 빵 같다. 그걸 보는 게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어쨌든 동생이 빵을 달라고 떼를 쓰지 않는 건 사실이다. 동생은 환절기마다 오는 우울증을 제 방식으로 잘 견디는 중이다.가을이 끝날 무렵 우리에게 낙담이 찾아들었는데, 그건 뉴질랜드산 마누카 꿀이 떨어진 탓이다. 그 대신 눈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산수유 빨간 열매들이 있음을 깨닫고 위안을 얻었다. 시들고 바스러지는 것들의 소리가 시끄러울 때 사소한 것에 상심한 기분은 함부로 방치된다. 한 해가 끝나는 것은 셰익스피어 400주기, 쓸모를 잃은 열쇠, 녹색 채소들, 일요일 저녁들, 빛나던 소녀의 미소가 주던 기쁨과 위안 없이 견딜 날들이 더 길어진다는 뜻이다. 어머니의 배춧국은 슬픔 달래주는 소울푸드팥죽은 아코디언 팔아서라도 꼭 먹어야 한다 나는 겨울마다 눈 내리는 오슬로에 가고 싶었지. 오두막집에서 눈 내리는 숲을 오래 바라보고 싶었지. 가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가문비나무 어린 가지들이 뚝, 뚝 꺾이는 소리를 듣고 싶었지. 나는 평생 오슬로에는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 오늘은 서리 맞은 저 들판의 한해살이풀들이 닳아빠진 무릎을 꺾고 주저앉은 풍경이나 바라볼 뿐이다.겨울에는 구절초, 꿩의비름, 도라지, 달리아의 전성시대도 끝난다. 당신도 더 이상 젊지 않다. 새해엔 당신의 얼굴에 주름이 늘고, 골밀도도 성겨질 것이다. 해가 지날수록 피의 고도(高度)가 낮아지고, 고아원의 복도에는 한기가 들어찰 것이다. 해마다 외양간에 매인 소는 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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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함께 해요! 2060 지면기사
숫자는 숫자에 불과한데 돌아보니 나는 매 순간 숫자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왔다. 공자가 열다섯에 학문에 큰 뜻을 두었고 삼십 세에 홀로 설 수 있었고 사십에 불혹하였고 오십에 지천명하였으며 육십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귀에 거슬리는 일이 없다 하였고 칠십에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법과 도덕에 저촉됨이 없다고 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나이를 먹고 살아오는 과정에 큰 의미를 부여했었다.심지어 나는 열다섯에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고 삼십에 홀로 서서 나를 책임질 수 있게 되었으니 공자의 삶의 형태를 닮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기도 했었다. 나는 고뇌로 가득찼던 20대를 중국집 주방에서 보냈다. 더운 여름에는 그 흔한 선풍기 한 대도 없이 안팎에서 더해지는 열기를 견뎌내야 했고 겨울에는 난로도 하나 없이 볶아지는 요리의 온기로 추위를 녹여야 했다. 북풍한설에도 새벽에 나가 장을 보는 일은 나의 몫이었다. 삼십여 년이 지나 육십 나이를 눈앞에 두고 있고 치열하게 살았던 내 청춘의 시절로 다시 한 번 돌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나는 20대 청춘들과 함께하는 중국집을 열기로 마음먹었다.주위에서는 모두 하던 것도 그만 두어야 할 나이 육십에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고 만류한다. 하지만 나는 굳은 의지 하나로 절차를 밟아나갔다. 이 시대는 청년들의 취업과 창업을 권장한다. 청년들의 창업을 돕고 지도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창업해야 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창업을 하고 2030 청춘들을 찾아 나섰다. 20청춘들 꿈 싣고 망망대해 출항하는 창업막상 출발하려니 풀기 어려운 난제들 가득 여기저기 다니면서 20청춘 함께해요를 외친 결과 20세, 24세, 25세, 27세, 29세의 청춘들로 팀이 짜여졌다. 주방에서 일하다가 '거기 양재기 좀 하나 주세요' 했더니 '양재기가 뭐예요?'라고 묻는다. 그는 20세이다. '마늘을 찧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묻기도 한다. 살면서 김치를 담글 일이 없었을 터이니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사물 하나를 놓고도 60대와 20대가 그것을 부르는 명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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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우리에게 이런 대통령 불가능한 것인가! 지면기사
곧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선거가 아니라 싸움판이다. 이재명 후보는 "尹은 무능·무식·무당 '3무'"라고 비난하고 윤석열 후보 측은 "李는 무법·무정·무치"라고 맞받아친다. 서로 물고 물리는 비난전이 선거판을 지배할 것이다. 국민들은 싸움꾼만 나왔다며 점잖은 체하면서도 공격을 잘할수록 더욱 열광하며 지지를 보낸다. 상대를 제압할 만한 싸움꾼이 아니면 카리스마가 없어 깜이 아니라며 얼마나 무시했던가.그러나 '네 편' '내 편' 싸움에 맛들인 국민들은 어떻게 살아가던가. 친구도 가족도 편이 갈려 얼굴 붉히기 일쑤다. 그런 국민들이라면 그토록 지지했던 대통령도 결국 비난하며 감옥에 보내고 말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나라인가. 국민들이 '네 편이 못 돼야 내 편이 잘 된다'는 경쟁적 사고에 빠져 있는 한 우리 앞에는 '네 편' 목 조르는 대통령만 기다리고 있다. 견제할 힘마저 빼앗아버릴 만큼 야당을 짓밟는데 능한 대통령만으로 국민들의 삶이 편하던가. 국민들이 진정 행복한 삶을 사는 길, '네 편'도 배려하며 함께 가려는 대통령은 불가능한 것일까. 대선, 상대 쓰러뜨려야 이긴다고 알고있지만'내편'만 떠받드는 나라의 국민 잘 살 수 없다 10여년 전 내가 만드는 '월간독자 Reader'와 경쟁잡지가 함께 홍보를 하게 되었다. 참석자 500여 명 중 10퍼센트로 예상되는 독자를 서로 뺏고 뺏기는 게임이 될 것 같았다. 난감했다. 마이크가 주어지자 나는 그 잡지도 구독해 달라고 진심으로 호소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두 잡지사에 예상보다 3배도 넘는 사람들이 구독 신청해주는 게 아닌가.그때 한 신부님 이야기가 떠올랐다. 신부님에게 한의사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한약 손님은 줄어드는데 길 건너에 또 한의원이 생겨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신부님은 "먼저 남의 한의원이 잘되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은혜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게 했더니 그 거리에 한약방만 더 늘어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곳이 한약거리로 소문나 손님들이 몰려들더라는 것이다.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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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20·30, 더 이상 무시하거나 이용하지 말라! 지면기사
각 당의 대선 후보가 확정된 이후 각 후보들의 2030을 잡기 위한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과거 같으면 40대였을 텐데 분명 달라진 모습이다. 그러나 2030세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지했다는 측면에서는 달라졌지만, 2030의 마음을 얻기 위해 다가서는 모습을 보면 과거와 달라진 것이 없다.과거 선거를 보면 더불어민주당은 어차피 2030은 40대를 따라 민주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단지 2030이 투표장에 많이 나오는 방도만 찾았다. 반면 보수정당은 2030에 대해 방도를 찾지 못하고 사실상 포기하거나, 중장년 전통적 지지층의 결집에 집중하면서 대책이 없다 보니 2030의 투표율이 낮아지길 내심 바랐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보수의 바람과 달리 2030이 투표장에 나오기 시작했고, 투표장에 나와서는 40대와 더 이상 동행을 하지 않으면서 민주당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공정·공존·공생 가치 지향하며 합리적 논증소통없이 후보들 생각만 말할때 가장 싫어해 대선 후보들이 2030을 잡기 위해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이 소통이다. 청년과의 만남 이벤트를 만들고 청년을 대변하는 인물을 영입한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벤트와 레토릭이 등장한다 'With 석열이형'. 그렇지만 무대만 바꾸고 비슷한 얼굴에 분칠만 하고 나타나는 모습이다. 제대로 된 혁신과 변화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서 과연 그 얼굴이 이쁘게 보이고 다르게 보일까?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프레임과 2분법 구도로 단순화시켜 '30대 워킹맘 공동선대위원장'과 같은 상징조작으로 2030에게 마법을 건다. 그러면 30대 공동선대위원장에 대해 2030이 우리를 대표하고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자신도 모르는 인물이 어느날 갑자기 제1여당 공동선대위원장으로 당대표와 같은 급에 올라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까? 오히려 박탈감만 더 키울 것이다.아직까지는 각 후보들의 2030 접근방식이 과거와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그러기에 지금까지는 2030이 어느 후보에게도 마음을 잘 열려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2030이 더 혐오하는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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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지면기사
현실은 변화를 겪으며 요동친다. 이 변화는 감각적이고, 수량적이며, 실체적이다. 하루만 자고 일어나도 예전 세계는 사라지고, 새로운 변화의 세계가 펼쳐진다. 농경 중심의 전통사회가 사라지고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를 거쳐 탈산업사회로 들어선 지도 오래다. 그 사이 농업 인구는 소멸하거나 소수화되고, 디지털 뇌를 장착한 새로운 문명인이 몰려왔다. 인류가 한 번도 겪지 못한 후기 탈산업사회의 디지털 환경 속에서 문명인들은 자기 착취를 일삼고 피로라는 만성적 질병에 찌들어간다.이 변화를 긴 시간 단위로 조망하면, 도로는 넓어지고, 건물은 높아졌다. 살림 규모는 커졌고, 명목상 가계 수입은 늘었다. 해외여행이 늘고, 집값은 다락같이 올랐다.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음식점이나 음식 맛은 짜거나 달게 변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현실 변화의 품목이다. 짜고 단맛에 대한 선호가 일반화된 탓이라고 추측하지만 음식 맛이 왜 이토록 달고 짜게 되었는지 그 균일화의 배경이 무엇인지는 딱히 알 수가 없다. 과거와 견줘서 책을 읽는 독자나 신문 구독자가 준 대신 스마트 폰, 태블릿이나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영화는 색감이 화려하고, 촬영기법은 세련되었으며, 내용은 더 잔혹해졌다. 잔혹 범죄가 늘어난 현실을 머금은 탓일 테다. 하지만 피가 튀기는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고문받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경험이다. '서바이벌'이 생의 목표가 돼버린 청년세대그들에게 현실은 '지옥' 그 이상·이하도 아냐 어느 사회에나 청년들은 사회의 최전선에서 오늘의 변화를 가장 먼저 맞고 실감한다. 이들이 사회 변화의 촉매이자 발화점이 된 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한국의 '4·19혁명' 세대, 일본 '전공투' 세대, 프랑스 '68혁명' 세대, 반문화·반전운동을 이끈 미국 '히피' 세대의 중심은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청년세대는 취업절벽이나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진 곤경 속에서 '스펙 경쟁'을 하느라 제 존재 역량을 다 쏟는다. 이들은 부의 양극화와 사회적 기회의 불공정에 분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