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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픈 인문계'현상의 이해와 의미

    '슬픈 인문계'현상의 이해와 의미 지면기사

    요즘 취업시장에, '슬픈 인문계'라는 다소 낯선 말이 나돌고 있다. 일자리 마련에 고심해야 하는 우리 젊은이들의 심경이 담겨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이는 최근 (주)현대자동차가 올해 직원채용 방침을 발표하면서, 정시에는 이공계 출신 졸업자만을 모집하고, 인문계는 상시 채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상시 채용'이라는 말은, 용어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필요에 따라 최소인원만 채용하겠다는 뜻이어서 인문계 졸업자들이 낙담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삼성, 엘지, SK 등 국내의 다른 4대 기업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인문계열 출신을 20% 정도만 채용하겠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사실 국가적 입장에서 보면, 대부분의 먹거리는 기업들이 창출해 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슬픈 인문계' 현상에는 현재의 우리 산업에 관한 몇 가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인문계는 정신을 바탕으로 한 무형의 지식을 공부의 대상으로 삼고 있고, 이공계는 하드웨어인 물질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산업이 지금 필요로 하는 인력수요의 양은 우리 산업의 현주소, 즉 구조적 특성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되돌아 볼 때 우리의 1970, 80년대는 경영학을 중심으로 인문사회계열 학과가 인기가 있었고, 취업도 더 잘 됐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는 우리사회가 산업화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시기여서 산업화의 시스템을 만들어 내고 소요자금을 확보하는 등 정무에 관한 일이 많이 필요했고 중요했던 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기가 지나고, 구체적이며 분명한 제품을 잘 만들기 위한 기술개발이 중요해진 구조로 이행되었음을 이 현상은 말해 준다. 그런 측면에서는 우리 산업이 바람직하게 발전되어 왔다는 신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산업이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아직 구체적 물질만을 대상으로 하는 제조 및 가공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방증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농경사회와 산업사회를 거쳐 지식기반사회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

  • 경제민주화, 정도전의 꿈

    경제민주화, 정도전의 꿈 지면기사

    조선왕조와 고려왕조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이들이 제법 많다. 미국의 한국사가 존 B. 던컨이 대표적이다. 그는 조선 초기 지배층의 대부분이 고려의 구 귀족 출신이었고, 두 왕조 사회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내 생각은 정반대다. 조선의 건국세력은 평범한 집안에서 많이 나왔다. 요즘 대중매체에서 인기를 누리는 정도전(鄭道傳)은 두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의 외가와 처가는 노비였다. 그런데도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건국을 주도했다.그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평민중심, 특히 소농중심의 유교사회를 꿈꿨다. 조선은 고려와는 엄연히 구별되는 새 세상이었다. 정도전의 개혁구상이 모두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후대에도 그의 이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민본정치로 이름난 세종 역시 정도전의 사상적 후계자였다.'경자유전(耕者有田)', 즉 농사짓는 사람이 논밭을 소유해야한다는 믿음. 이것이 정도전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그 당시 경제의 중심은 농업이었다. 문제는 중앙과 지방의 권력자들이 백성들의 논밭을 앞 다퉈 빼앗았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한 조각의 땅에도 임자가 여럿이었다. 농민이 부담할 소작료 역시 2중3중이었고, 세금의 운반비용도 무거웠다. 지주의 심부름꾼을 접대하는 비용도 많았다.그러나 고려의 지배층은 농민의 고통을 외면했다. "백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임금의 할 일이다."(논어) 이런 가르침을 가슴 깊이 간직한 정도전과는 달랐다. "공(정도전)은 그 폐단을 잘 알고, 반드시 고쳐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우리 태조(이성계)를 적극 도왔다. 국내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여 국가 소유로 만든 다음, 인구 비례에 따라 토지를 재분배해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할 생각이었다."(정도전, 삼봉집(三峰集)) 이성계(李成桂)가 자신의 견해를 인정하자, 정도전은 토지 개혁안을 재상회의에 제출했다(1389). 그는 조선의 왕안석이었다.당시 구 귀족들은 머리로는 토지 개혁안을 이해했지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개혁을 반대했다. 정도전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이색조차 그러했다. 학자들 중에

  • 장서각(藏書閣)과 기록보존의식

    장서각(藏書閣)과 기록보존의식 지면기사

    조선왕조는 기록문화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었던 시기였다. 기록문화의 꽃, 의궤만 보아도 기록의 섬세함과 정교성 그리고 예술성을 함께 볼 수 있다. 이러한 왕실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보존하던 곳이 대표적으로 규장각(奎章閣)과 장서각(藏書閣)이다. 규장각은 1776년 정조대왕 즉위년 궐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하였다.장서각은 1908년 고종황제가 궁궐 안의 수많은 서적들을 수집해 황실 도서관의 건립을 구상하고 청사진을 그렸으나 일제의 침략으로 일시적으로 좌절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거쳐 1918년 창경궁과 창덕궁 사이에 건물을 짓고 조선왕조실록 등 왕실의 귀중본을 보관한다는 의미로 장서각이라는 현판을 내걸을 수 있었다. 그 후 1950년 한국전쟁때 북한이 조선왕조실록(무주 적상산 사고본)을 강탈해 가서 이것을 대본으로 국역작업에 착수하여 '리조실록'을 간행하였다. 강탈해가는 와중에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성종실록'(권 3-5) 한 책을 흘리고 말았는데 그 한 책이 지금 장서각에 남아 지난날의 수난사를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1981년 장서각의 모든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관되었다. 현재 12만여 책의 국가왕실 도서와 4만3천여 책의 민간 사대부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장서각은 국가경영자료뿐 아니라 왕실의 생활과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는 더없이 진솔하고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특히 선원록으로 대표되는 왕실족보는 장서각에만 있는 유일본이 대부분이며 낙선재본 고소설과 한글편지는 여성문학의 백미를 이룬다.현재 장서각에는 크게 두 종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조선왕조의 각종 행사기록인 의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의학서적인 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의궤는 조선시대의 국가 및 왕실 행사를 기록한 자료로서 오늘날 영상 자료처럼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시각자료이다. 의궤는 역사기록물로서 뿐 아니라 한국문화를 세계적으로 전파

  • 눈물의 정치학

    눈물의 정치학 지면기사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 중 가장 정직한 것이 땀과 눈물이다. 고된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 땀이 나고, 참을 수 없는 격정이 마음을 흔들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그러나 땀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온도의 변화만으로도 흘릴 수 있지만 눈물은 억지로 흘릴 수 없다.눈물은 인간의 감정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슬픔과 비탄을 표현하는 침묵의 언어이다. 그것은 때로 백 마디의 말보다 기도보다 호소력이 강하다. 탈무드에도 '천국의 문은 기도에는 닫혀 있더라도 눈물에는 열려 있다'고 적혀있다.눈물에는 그가 처한 상황의 진실이 담겨있다. 그가 말하는 뜻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타인의 눈물을 보면 누구나 일단 숙연해진다. 약하고 서럽고 그래서 핍박받는 자의 이미지가 눈물 몇 방울 안에 들어 있다. 단순히 약해 보여서만이 아니라 눈물이 우리 감정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상징하기 때문이다.그런데 그것이 정치와 연결될 때는 어떤 화학적인, 또 사회적인 반응을 일으킬까. 지난 3월 2일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새정치연합의 안철수 의원이 6·4지방선거 전에 '제3지대 신당'을 창당하기로 전격 선언했다. 이것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에서, 또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김한길 대표는 두 번 눈물을 내비쳤다.언론에 조금은 별일처럼 보도되었듯 정치인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주 드문 경우도 아니다. 문득 그것이 궁금해 찾아보니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 '박근혜의 눈물'이 있었다. 2004년 국회의원 총선거 때 텔레비전을 통해 정당대표 연설을 하면서였다."1960년대 가뭄이 심했던 어느 날, 지방순시를 다녀오신 후 아버지께서 식사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왜 식사를 안하냐고 물으시니 한참동안 천장만 바라보시다가, 지방에 가보니 아이들의 얼굴에 버짐이 피어 있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들은 먹지 못해서 얼굴과 손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리셨습니다. 나가시는 뒷모습에 아버지의 어깨는 흔들리고 있었고, 저희 식구는 아무도 저녁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 그래도 대학이 희망이다

    그래도 대학이 희망이다 지면기사

    지금 우리의 대학들이 전례없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특히 지역소재 사립대학들을 중심으로 '안팎에서 어려운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대학의 위기는 지난 27일, 정부가 발표한 '대학구조 개혁안'에도 잘 나타나 있다. 급감하는 입학 적령인구에 대한 사회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하여 향후 9년 동안 현 입학정원의 33%에 해당하는 16만명을 감축하겠다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이를 위하여 모든 대학을 5단계로 분류 평가하여 하위 2단계는 퇴출시켜 나가겠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점잖게 표현해서 조정이지, 실제는 대학의 수와 양을 대폭 줄이겠다는 것이다.이래저래 요즘 대학총장들은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 사실 정부가 주도하겠다고 나서는 대학의 구조조정도 그렇지만, 대학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대학구조조정은 인구의 감소로 인한 사회적 여러 현상의 한 단면일 수 있다. 문제는 유독 이 구조조정이 대학들에 대한 부정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꼭 필요한 것처럼 부각되며 대학이 폄하 당하고 있다는데 있다.대학에 대한 부정적 논란은 지난 대선을 앞두고 등장한 '반값 등록금'이라는 다소 정치적 색채를 띤 슬로건에서 촉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학부모들의 표를 의식한 정치권이 대학에, 아니 등록금에 관심을 가지면서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등록금을 낮추기 위해서 대학들을 압박하며 극히 일부 대학의 부도덕과 부실이 필요 이상으로 부추겨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사실 대학의 생사가 걸린 '구조 조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학 정신을 지키는 것'이다. 진행되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대학들이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지금과 같이 취업률, 학생 충원율 같은 정량 지표에만 치중할 때 이 정신은 훼손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자기중심적 생각일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대학들이 나는 정말 자랑스럽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계속되는 한국교육의 예찬이 아니더라도,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 '로컬푸드 운동' 사회 정의를 이끌어

    '로컬푸드 운동' 사회 정의를 이끌어 지면기사

    피폐한 농촌과 공룡처럼 몸집이 커진 도시가 함께 살자는 것이 로컬 푸드 운동이다. 이것은 20세기 후반 서구에서 시작되었다. 식품의 이동거리를 단축시켜, 신선한 먹거리를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영국에서는 시장이 생산지로부터 50㎞ 이내에 있을 경우를 로컬 푸드라고 했다. 광활한 미국 땅에서는 운송시간이 24시간 이내일 때로 정의했다. 일본에서는 '지산지소(地産地消)'라 하여, 특정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그 곳 소비자들에게 제공되는 것을 일컬었다.2008년부터 이 운동은 한국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 농민들은 농산물을 가까운 도시의 직거래장터로 가져간다. 상품진열도 가격 책정도 스스로 한다. 포장이나 운반도 알아서 하고, 재고물량도 날마다 거둬간다. 자신의 농산물에서 농약이 과다 검출되거나 품질과 규격에 문제가 발생하면, 스스로를 처벌한다. 현재 여러 도시에서 이런 방식의 직거래가 이뤄진다.한국의 농산물 유통단계는 7단계나 된다. 그것을 단 한 개로 줄인 것이 로컬 푸드 장터다. 소비자와 생산자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직거래가 정작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기왕의 농산물 시장이 소농들에게 매우 불리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기업농 또는 대농들은 여러 가지 유통경로를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농민의 대다수인 소농들의 처지는 사뭇 달랐다. 소농은 일정한 종류와 수량을 꾸준히 생산하는, 공장식 농업에 적응하기 어렵다. 그들은 자급자족 위주다. 다품종 소량생산이 특징이다. 이러한 소농이야말로 마을공동체를 지켜온 힘의 원천이었다. 그들의 존재 방식은 생태계의 존속에도 기여하였다. 긍정적으로 평가될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이 낮다는 이유로 소농들은 결국 시장에서 소외되었다. 농촌사회를 농가부채와 고령화의 수렁에 빠뜨린 주범은 바로 시장의 논리였다.경제논리만 따지는 사람들은 농촌을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유물로 취급한다. 진실은 어떠한가. 농촌은 한국인 전체의 고향이자 아직도 전통문화가 숨쉬는 공간이다. 농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 것은 1960년대부터 가속화된 산업화였다. 그와

  • 시대정신과 선현들의 어록

    시대정신과 선현들의 어록 지면기사

    역사의 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다. 역사의 길은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수난의 길도 있고, 극복의 길도 있고, 희망의 길도 있다. 이 길 위에 수놓았던 선현들의 영혼의 울림 같은 시대의 종소리를 되새겨 보는 것도 오늘날을 열어 가는 데 귀중한 교훈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역사를 오래된 미래라고 하지 않는가.원효의 아들 설총이 지은 화왕계(花王戒)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뒤 해이해져 가는 왕실을 비롯한 사회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신문왕(신라 31대 재위 681~692)에게 지어 바친 유교의 교훈서이다. 그 속에는 왕을 모란꽃에 비유하여 장미꽃의 화려한 유혹에 현혹되는 임금에게 풍요로운 때일수록 띠풀도 아껴야 하고 지도자는 진실과 허구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할미꽃의 진언으로 신문왕을 각성케 했다는 이야기다.한편 지배층의 부패가 극심해서 민생이 도탄에 빠져가는 고려 말에 가정 이곡(1238~1351)이 지은 차마설(借馬說)을 통해서는 시대를 바로잡기 위한 지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돈이 없어 말을 빌려 탈 때 날쌘 말을 빌렸을 때는 낙상의 위험이 크고 야윈 말을 빌렸을 때는 넘어질까 조심하여 냇물은 걸어서 건너고 비탈길도 조심하여 오히려 낙상의 위험이 적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잘나갈 때 조심하라는 이야기다. 덧붙여 모든 것은 다 빌린 것으로 세상 떠날 때 가져갈 것이 없는데 제 것인 양 착각하고 집착하여 화를 자초한다는 뜻이다.우리 역사에서 민족문화의 토대를 이룬 세종대왕(조선왕조 4대, 재위기간 1418~1450)의 따뜻한 정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중에 세종대왕이 즐겨 썼던 생생지락(生生之樂)이라는 말이 있다.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말과 함께 지도자가 성심으로 이끌면 백성들은 부지런히 근본에 힘써 종사하여 그 생업을 즐거워한다는 이야기로 세종대왕의 나라사랑, 인간사랑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러한 따뜻한 마음이 노비에게 부부합산 160일의 출산휴가를 주고, 글을 몰라 어두운 세상을 사는 백성들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광명

  • 억울한 표정을 짓는 공직자들

    억울한 표정을 짓는 공직자들 지면기사

    기름유출 현장 냄새 때문에 입 막은건 '오해라고'카드사 정보유출 국민탓인양 막말 '실수 정도로'고위직 기용때 논문표절 학계 해명에도 '손사래'세상 살다보면 누구나 억울한 일 한두번 겪기 마련이죠. 예전에는 이게 힘이 없는 사람과 재수가 없는 사람들이 겪는 일들이었지요.어느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하루 묵으려고 어느 집에 머뭅니다. 해는 서산에 걸리고 나그네는 봉당에 앉아 주위를 살핍니다. 그때 마당에 무언가 반짝 빛나는 것이 보입니다. 저런, 옥구슬이 떨어졌군, 하고 그걸 주워 주인에게 돌려줄 생각을 하는 순간 그 집의 거위도 햇빛에 반짝이는 구슬을 본 모양입니다.저녁에야 주인집은 옥구슬이 없어진 것을 깨닫습니다. 구슬을 어딘가에 흘렸다는 생각보다 누군가 훔쳐갔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것이죠. 나그네는 사람들에게 묶이고, 날이 밝으면 관가로 끌려갈 참입니다. 나그네는 자기 옆에 거위를 함께 묶어달라고 말합니다. 다음날 아침 나그네 옆에 묶인 거위가 눈 똥에 옥구슬이 나왔습니다. 진즉에 말하면 지난밤 풀려났겠지만, 그러면 죄 없는 거위가 성급한 사람들에게 배가 갈려 목숨을 잃었겠지요.톨스토이의 소설 '하느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에는 그보다 끔찍한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여인숙에 듭니다. 그날 밤 여관주인이 누구에겐가 살해되고 나그네는 살인 누명을 쓰고 먼 곳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청춘을 감옥에서 다 보내고 머리까지 허옇게 센 노인이 되었을 때 진범이 들어와 지난날 여인숙 주인 살해사건을 자기가 저질렀다고 말합니다.끝내 진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감옥에서 보낸 저 청춘을 어떻게 할까요? 진실이 밝혀져도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도 주인공은 하느님이 진실을 저버리지 않았다는데 감사합니다.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관료들 가운데 자신의 업무와 관련해 억울한 일을 당한 듯한 표정을 짓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이 보면 어디 가서 누구에게도 억울한 일 절대 당하지 않을 것처럼 힘 있고 권력 있는

  • 서둘러 갈 일이 무엇인가

    서둘러 갈 일이 무엇인가 지면기사

    신년사 잘 살펴보면 새해 예견하는 단초 발견진정한 소통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시작변화가 늦으면 시장은 최후를 경고하고 위협새해 정월이다. 다음 주면 설이다. 높은 정신에서 보면 시간은 지혜의 그림자 같은 것이어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한다. 그러나 세파를 이기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이 맘 때쯤이면, 무엇인가 새로운 계획도 세우고 올해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보는 것이 상정이다. 사회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책임자들도 새해 신년사라는 것을 내 놓는 것을 보면 같은 생각인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이때가 되면 나는 홈페이지를 뒤져 이것들을 살펴보곤 한다. 대개 덕담과 함께 자기 조직이 해야 할 계획 등을 밝히는 것이 보통이지만, 내가 관심을 갖는 이유는 나름대로 잘 살펴보면, 그 해의 흐름을 예견할 수 있는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해 내 일의 방향을 잡는 데 큰 도움이 된다.사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특히 사람의 욕망이 관여된 경우는 더욱 그렇다. 고도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하는 경제나 주가 예측이 그토록 터무니 없는 것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앞일이 궁금하니, 이렇게라도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지도자들이 평소에는 잘 드러내지 않는 속내를 신년사의 행간에 드러내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이는 또 다른 덤이다.보름 전쯤, 박근혜 대통령이 신년회견에서, 경제를 생각하면 '1초도 아깝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에 나는 '아, 올해 우리 경제가 많이 어렵겠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올해는 물론이고, 예년에도 빠지지 않는 신년사의 단골 메뉴는 역시 '변화에 대한 강조'이다. 보통 신년사에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에는 두 부류가 있다. 소극적으로 순응할 것이냐 아니면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냐이다. 조직의 상황에 따라 선택은 다를 수 있지만, 많은 경우 국내외 경제나 정치상황을 고려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의 수가 많은가를 가늠해 보면 그 해의 추세를 짐작할

  • 사회적 자본 벽을 넘어

    사회적 자본 벽을 넘어 지면기사

    돈·정보력 등 세습적 사회적자본 출세 지름길과거제 사라졌지만 여전히 고시천국인 한국공교육 질 높이고 다양한 인재선발법 모색해야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인간 사회의 성격을 꿰뚫어보았다. 그가 사용한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만 해도 그렇다. 파리 중산층 자녀들에게 소르본 대학교의 졸업장은 출세의 날개를 달아주지만, 시골 농부의 자녀들에게는 별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같은 조건이라도 사회적 자본여하에 따라 성취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조선후기 서울의 명문가인 '경화세족(京華世族)'들은 대대로 습득한 시험비결에 힘입어 수월하게 문과에 급제했다. 그들은 노른자위 벼슬만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시골 수재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시험에 합격하고도 좌절한 것과는 딴판이었다.과거시험 자체는 상당히 공정하였다. 조선후기의 정규시험에서 평안도 출신 문과 합격자가 많았다는 사실이 증명하는 바다. 문제는 그들의 행운이 합격에 그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벼슬은 기껏해야 성균관 전적(典籍) 또는 시골의 현감이나 군수였다. 하릴없이 고향에서 벼슬을 기다리다 죽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용'이 되지 못했다.따지고 보면 사회 부조리에 가장 적극적으로 항거했어야 할 사람들이 그들이었으나, '용'이 될 행운을 기다리느라 조직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사태는 개선되지 않았다.그 당시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수험 인구는 50만명도 넘었다. 시험지옥이었다. 많은 선비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치질과 위장병에 시달렸다. 서울의 젊은 선비 유만주(兪晩柱)도 그렇게 병고에 시달리다 34세에 요절했다. 그래도 그는 '흠영(欽英)'이라는 일기책을 남겨 후세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문제는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높이 평가할 만하였다. 서양 여러 나라는 프랑스혁명(1789)이 일어난 다음까지도 그만큼 공정한 인재등용 방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조선사회가 '능력 본위'로 인재를 뽑아 썼다는 사실은 길이 기억할 일이다.조선시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