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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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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과 보존의 지혜 지면기사
21세기 지식기반사회는 첨단과학기술이 다른 학문과 서로 융합하여 발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우리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을 끊임없이 재편해 가는 과정에 있다. 최근 들어 대한민국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속적으로 국가브랜드를 높이기 위한 필수과제는 먼저 우리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문화의 보석을 알고 소중하게 가꾸어서 그 감동을 세계에 알릴 수 있어야 한다. 문화융성시대 대한민국의 국격은 모든 국민이 참여하고 함께 협력하며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자긍심을 가지고 열어가는 자세를 갖출 때 높아질 수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 하였다. 미래 인류가 지향하는 가치들인 협동심과 창의성, 나눔과 배려, 소통과 화합, 자연과 인간의 조화, 평화와 생명 존중 사상은 우리 역사 속에 속속들이 새겨져 있다.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물질만능 풍조와 기계 문명에만 젖어 있어 유형문화 속에 깃들어 있는 정신적 가치를 너무 많이 잊어버렸다. 바로 숭례문 화재사건이 그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숭례문을 물질 또는 형태로만 보았기 때문에 범인이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던 것인데 그 속에 들어있는 시대의 고귀한 숨결과 민족의 혼을 일찍이 역사교육을 통해 가르쳐 주었다면 사람을 살상하는 일 못지않게 망설임이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일이 저질러지고 난 후에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아무리 첨단과학기술, 건축기술을 적용한다 해도 시대를 잃어버렸고 순수한 정신을 잊었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창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지키고 보존하여 다음 시대로 넘겨주는 일이 더더욱 중요하다. 지금 문화재 복원사업이 여기저기서 진행되고 있고 또한 보존에 대한 빈번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시대변화와 함께 개발논리도 적용되어야 할 때가 있겠지만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일제 식민지시대 일본인들은 우리 문화의 가치를 너무 잘 알아서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부러 파괴했고, 우리는 몰라서 스스로 파괴했던 우(愚)를 범했던 일을 경각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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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는 우리 모두 안녕해질까? 지면기사
불안한 시대 반영 최근 신춘문예 응모자 늘어사회적 박탈감에 절박한 안부 묻기 계속될 것누군가 대답해야 하는데 입막을 생각만 해서야새해 아침 많은 신문에 각 신문사마다 실시한 신춘문예 당선작과 당선자의 얼굴이 나왔다. 신춘문예를 실시하는 신문도 있고, 하지 않는 신문도 있지만 어떤 신문이든 지난 일년간 기사를 통틀어 신춘문예 당선작만큼 여러 지면을 한 사람의 얘기로 채우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소설 당선작의 경우 오직 한 사람의 말과 생각으로 적게는 두 지면을 많게는 세 지면을 가득 채운다.올해에도 몇 군데 신문의 신춘문예 심사를 보았다. 문학처럼 그 시대를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는 것도 드물다고 한다. 그것은 내용에서도 그렇고, 형식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최근 심사를 하며 그것과는 또 전혀 다른 느낌 하나를 더 받았다. 내용과 형식뿐 아니라 동기에서도 그것은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이다.최근 몇 년 간 신춘문예 응모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문학의 위상이 높아져서 응모자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갈수록 책을 읽는 사람은, 더구나 시와 소설을 읽는 사람은 줄어든다고 하는데 신춘문예의 응모자는 반대로 늘어나고 있다. 뭔가 할 얘기가 많은 시대라는 것은 분명하다. 꽤 오래 전 IMF가 처음 시작되던 해에도 신춘문예 응모자가 그 전해에 비해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패션업계에서 여자들이 입는 치마길이가 길어지면 호경기이고, 짧아지면 불경기로 진단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해그해 신춘문예 응모자 수야말로 우리 사회의 또다른 경기 지표인지도 모른다. 시대가 어수선할수록, 삶이 절박할수록, 그리고 일자리가 불안정할수록 신춘문예 응모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만은 틀림없다.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글을 쓰고 싶게 하는가. 갑자기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해져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면 한 나라의 문화로서도, 문학으로서도 다행한 일이겠지만 그것의 동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저마다의 일터에서 저마다의 일을 잡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어느날 일자리를 놓게 되거나, 젊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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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 희망을 말하자 지면기사
얼마 전 새해의 다짐을 한 것 같은데 벌써 한해를 마감할 때가 다가온다. 이럴 때쯤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지만 또 다른 해를 맞게 되니 무언가 숙연해진다. 특히 시간의 빠름은 나이에 비례하여 느낀다고 하니 우리처럼 나이 들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런 것 같다. 성경의 말씀처럼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하였는데 왠지 우리 삶의 시작과 끝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크게는 나랏일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일까지 시작은 크고 희망을 말하지만 끝은 미약하고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특히 올해엔 사람과 사람, 정파와 정파, 국가와 국가 사이가 더욱 그런 것 같다. 인간사에서는 사랑과 이해, 희망보다는 미움과 오해, 좌절이 더욱 더 많은 것 같다. 정말 하찮은 일에 분노하거나 낙담하여 죽이거나 스스로 자기의 생을 거두는 경우를 자주 본다. 요즘 어려운 상황에도 여념 없이 생존해 가고 있는 필부필부들의 일상을 '안녕들하십니까'?라고 묻고 있는 화두에서 큰 의미를 느낄 수 있다. 노력하면 무언가 성취되어야 함에도 도무지 이룸이 어렵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 미래가 불안하다고 푸념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간극이 더 벌어지고, 주는 자보다 바라는 자가 더 늘어만 나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정치권에서는 선거가 끝난지 언제인데 지금도 그 얘기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철도문제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달리는 형국이다. 힘 가진 집단과의 대화는 도무지 뚫리지 않아 막혀있고 그렇다고 신선한 어젠다를 내세워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지 못하고 있음도 답답하다. 정치학자가 아닌 백면서생인 내가 보아도 한국을 둘러싼 각국의 쟁패는 심각하다. 다들 자기네 이익만을 추구하고 국제사회의 질서와 공익은 사라진 것 같다. Korea라는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3대 세습이나 패륜적 상황은 상상이 안되고 부끄럽기도 하다. 이건 약과다. 남의 땅을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세계 최강 경제대국 일본도 있다. 끊임없이 대륙에 대한 욕심을 내고 있다. 참혹한 살육의 만행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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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왕조, 마지막 장이 시작되는가? 지면기사
북한이 특별하게 잘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가끔씩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 그 것이다. 그런 북한임을 감안하더라도 이번에 보여준 장성택의 처형은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국내외 대부분 전문가들은 김정은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장성택이 중심적 역할을 해 왔으며, 이는 김정일의 뜻이었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그럼 김정은은 왜 자신의 멘토 역할을 해왔던 고모부를 제거해야 했는가?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작년 8월에 있었던 장성택의 중국 방문에 대비되는 금년 5월 최룡해의 중국 방문이다. 중국의 장성택에 대한 환대는 국가 정상급에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 이후 장성택이 추진해 왔던 나진 선봉 경제특구와 같은 중국과의 경협사업은 그런대로 진전을 보여 왔다. 북한의 자원개발 사업에 중국 기업의 참여도 확대되어 왔다. 이에 반해 최룡해는 중국 방문시 환대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핵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으로부터 질타에 가까운 불만 표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중국이 자신들의 세계전략 선상에서 테크노크라트 출신의 장성택을 더 선호했을 것으로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다음 눈길을 끄는 것은 북한 당국이 발표한 장성택의 죄목 리스트이다. 작게는 마약, 여자 등 개인의 품행에서부터 크게는 쿠데타 음모까지 나열되어 있다. 특기할만한 것은 외국과의 경제 관계 추진에 있어 실책이다. 여기서 말하는 외국은 다름 아닌 중국이다. 장성택의 몰락에 중국변수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기할 의사가 없는 군부가 핵무기 포기와 대외개방을 종용하는 중국의 후광을 업고 중국의 입장을 지지했을 장성택을 곱게 보았을 리 없다. 그의 처형이 단시일 내 이루어진 것도 혹 있을지 모를 중국의 개입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크다.김정은이 최룡해 일파의 압박에 마지못해 장성택의 처형에 동의했는지 아니면 장성택과 김정남 그리고 중국이라는 삼각 커넥션의 가능성에 불안감을 느껴 주도적으로 고모부를 제거했는지는 훗날 역사가 밝혀줄 일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제 김정은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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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과 세계화폐 지면기사
최근들어 개인간 직거래가 가능한 디지털화폐 비트코인이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 11월 28일 $1천/BTC를 돌파하고 그 다음날 바로 $1천242/BTC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연초의 가격이 $13/BTC 수준이었으니 11개월 만에 100배로 뛰어오른 것이다. 비트코인이 처음 발행되던 2009년에 처음 거래된 가격이 5센트였다고 하니 그때부터 따지면 비트코인은 4년여 만에 2만4천840배나 오른 셈이다.비트코인 가격 급등과 더불어 비트코인에 대한 투자와 사용이 급증하면서 비트코인 열풍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해킹, 비트코인이 저장된 하드웨어 분실, 불법거래 방지를 위한 당국의 단속 가능성 등의 불안정 요인은 일단 논외로 하면, 비트코인에 대한 질문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그 하나는 "지금과 같은 비트코인 가격의 폭등은 거품이 아닌가?"하는 것인데,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비교적 쉽다.비트코인처럼 수요에 맞춰 공급을 늘릴 수 없는 재화는 우발적인 뉴스에 따라 가격이 폭등했다가 급락하는 폭등-폭락 주기를 일으키기 쉽다. 폭등가격을 통상 '거품'이라고 한다. 공급이 제한된 재화의 경우 어떤 계기로 균형가격 위에서 가격이 생성되면 추가적인 가격상승을 기대하면서 추가적으로 재화를 확보하고자 하는 초과수요상태가 형성되어 가격이 계속 상승하게 되고, 가격이 하락하는 경우에는 초과공급 상태가 형성되어 계속 하락하게 된다. 실제로 비트코인 가격은 지난 4월 1주일 새 30% 수준으로 급락하기도 하였으며 최근에만 하여도 지난 7일 비트코인가격의 상승을 주도한 중국의 포털사이트 바이두에서 비트코인 결제 중단 발표 직후 이틀 만에 가격이 절반 이하로 폭락하였다. 이러한 가격의 불안정성은 비트코인의 화폐로서의 가능성에 치명적인 결격사유라고 할 것이다. 비트코인으로 결제를 받는 온-오프라인 매장도 엄밀한 의미에서 화폐로서 비트코인을 받는다기보다는 비트코인의 '투기'에 가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다른 하나는 "비트코인은 '미래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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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앞에서 노무현을 생각한다 지면기사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 한양 입성기념 지정해방후 일제지정 그대로 답습 국보1호로 재지정부실복원 신뢰 잃고 국보1호 해지 논란 휘말릴듯그는 분명히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고 말했다. 2008년 2월. 국보 1호 숭례문이 무너지던 날이었다. 숭례문 방화범 채종기란 할아버지는 왜 숭례문을 불질렀냐고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노무현"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기 소유의 토지를 노무현이 조금밖에 보상해 주지 않아서 홧김에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고 목소리 높여 말했다. 노무현 정권 말기, 사람들은 축구에서 져도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고, 연예인이 이혼해도 노무현 때문이라고 했던 시절이었다.그 뒤로 5년이 흐른 2013년, 숭례문은 준공후 수개월만에 단청이 벗겨지고 기둥이 갈라지는 등 부실 복원 논란에 휘말렸다. 일본산 화학안료를 쓰고, 덜 건조된 나무를 사용했으며, 무리하게 공기를 단축하느라 부실 복원이 되었다는 갖가지 주장이 가중되었다. 문화재청장은 국보 1호의 부실 복원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철저한 조사와 오류 시정을 약속했지만, 책임을 지고 결국 중도하차해야만 했다.그런데 숭례문은 무슨 이유로 국보 1호가 되었던 것일까?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이유는 일본의 조선 강점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숭례문은 1907년 당시 조선에 주둔했던 하세가와 사령관이 서울 교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헐리게 될 운명에 처한 적이 있었다. 소식을 들은 당시 일본인 거류민단장은 하세가와를 면담, 숭례문의 존치를 설득했다고 한다."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한양에 출입했던 문입니다. 지금 한양에 남아있는 유적들 중에 임진왜란 당시의 유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숭례문을 철거하면 곤란합니다."실제로 숭례문에 대한 일본측의 인식은 일제시기 내내 여기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1927년 발행된 '취미의 조선여행(趣味の朝鮮の旅)' 책자에서는 숭례문에 대해, "그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정벌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남대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동대문을 통해 경성으로 쳐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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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인의 자성과 미래 지면기사
인류는 정착생활을 한 이래 끊임없이 다양한 건축을 지속하고 있다. 심지어 곤충들도 안전하고 아름다운 집을 짓기에 여념이 없다. 도시는 점적인 건축이 면을 이루어 형성된다. 건축에 의하여 도시의 모습과 성격이 형성되어진다. 인류가 만들어낸 불멸의 유산 중에서 가장 많은 대상이 바로 건축이다. 건축재화의 가치 역시 큰 부분을 차지한다.흔히 건축은 '인간의 생활을 담는 그릇'이라 하거나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도 한다. 즉 생활을 담는 공간이기에 인류에게는 필수적인 존재이며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척도가 된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이후 건축이 자산적 가치를 지니면서 그 의미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변하였다.나는 지방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어렵게 모교의 교수가 되어 후배이자 제자인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30여년간 참으로 보람되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부끄럽지만 돌이켜 보니 나름대로 연구업적도 쌓았고 수많은 제자를 두었으며 교수랍시고 적은 지식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많이도 써먹었다. 또한 어려웠던 시절 힘들게 공부하여 성공한 제자들을 보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그러나 요즘처럼 제자들을 보기가 민망한 때가 없다. 철밥통이라는 교수로서 너무나 안이하게 지내다 이제야 주변을 돌아보는 시간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입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면접에서 왜 건축과를 지원했느냐고 물으면, 우리시대를 이끌어 갈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라고 말하던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입시생을 기억한다. 물론 진정으로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 온 것 보다는 본인의 성적에 맞추어 지원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근래 한국건축계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아 이들에게서 밝고 원대한 직업인으로서 미래를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을 위해 교수가 무엇을 해주었고 해줄 수 있는가 생각하니 답답하다.국가발전의 원동력이었던 건설산업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다. 대도시의 아파트는 줄서서 사려했고 부의 척도가 되었는데 이젠 팔리지 않아서 난리다. 경향각지에 있는 건설사들은 부도가 나고 사라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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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사람 대한으로 지면기사
이스라엘이 1948년 아랍 국가들의 위협 속에서 국가건설을 선언한 이후 국가존망이 걸린 두 번의 결정적인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1967년 6월의 6일 전쟁과 73년 10월 전쟁이다. 이 두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주축으로 하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의 아랍 연합군의 침략을 격퇴했다. 아랍세계는 더 이상 군사력으로 이스라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하였고 결국 1977년 이집트·이스라엘 정상회담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국가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 발발 시 해외에서 많은 유대계 젊은이들이 참전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로 달려간 것은 잘 알려진 감동적 이야기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해외에서 영주권을 가지고 살면서도 고국으로 돌아와 병역의무를 다하는 해외동포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해외 영주권자의 자진 입대 희망자를 위한 '영주권자 입영' 제도가 2004년 실시된 이후 외국 영주권을 취득해 병역을 면제받았지만 자진 입대한 젊은이가 1천명을 넘었다.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가슴 뿌듯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국내에서도 극히 일부이긴 하나 군 복무를 피하기 위해 부당한 방법을 쓰는 젊은이들이 있는 요즈음 병역의무가 면제되었음에도 군 복무를 자원하는 것은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깊은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자원입대하고자 귀국한 재외동포 젊은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군 생활을 통하여 조국에 대한 자부심, 정체성을 얻기 위하여 입대한다고 말한다. 많은 경우 부모님들의 권유가 있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훈련 중인 국외 영주권자들을 대상으로 입대동기를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라는 응답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지구촌 170여 국에 퍼져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각자의 거주국에서 자리잡고 살아가는 애환과 그들의 성공담은 늘 우리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특히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젊은이들은 '나의 뿌리는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늘 안고 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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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 한류'를 기다리며 지면기사
10월 수출이 사상 처음으로 5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올해 1월부터 8월까지 한국의 경상흑자는 총 422억2천만 달러로 같은 기간 일본의 415억3천만 달러를 제쳤다. 이것도 사상초유의 일이다. 10월 기준 외환보유액은 3천432억3천만 달러까지 증가하여, 역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최근의 원화가치 상승은 이러한 한국 경제의 실적을 바탕으로 외국 투자자들이 한국 경제를 믿는 마음이 반영된 측면도 있으므로 가슴 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약간의 뿌듯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원화가치의 상승은 수출업체들에게는 바로 수주물량의 감소와 채산성의 악화를 의미하는 것이다.아닌 게 아니라 하반기 들어 다른 통화들에 대한 원화가치는 가파르게 치솟고 있다. 6월 이후 5개월간 달러, 엔, 위안화 등에 대해서는 약 10% 가까이 상승하고, 인도네시아 루피에 대해서는 약 20% 상승하고 있다. 환율변동으로 인한 손실을 피하기 위해서는 한국무역보험공사에서 제공하는 수출보험 가입, 파생상품 시장에서 선물환계약을 통한 환리스크 헤지(hedge) 등을 활용할 수 있겠지만 원화로 수출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면 기본적으로 환율변동으로 인한 수익성 불안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우리나라는 최근 인도네시아(100억 달러), UAE(54억 달러), 말레이시아(47억 달러)와 통화 스와프 협정을 맺었고 호주와 조만간 통화 스와프를 추진하고 있다. 종전까지 통화 스와프가 위기에 대비해 달러를 확보해 두려는 목적이 강했던 데 반해 이번 통화 스와프는 서로 자국 통화로 교환하는 LC(Local currency) 통화 스와프 방식을 통해 무역 결제 기능을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8년 12월 중국과 체결한 560억 달러 상당의 한·중 통화 스와프도 위안화와 원화 간 스와프 방식이다.한국은행 김중수 총재는 지난달 25일 공식석상에서 "중국이 23개국과 스와프를 맺어 위안화 시장을 만든 것처럼 최근 3건의 통화스와프 체결은 원화 국제화란 큰 길에서 작은 걸음을 뗀 것"이라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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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대문의일본식 석등을 철거하라 지면기사
10월 21일 나는 패배했다. 물론 나는 이길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침묵하고 지나갈 수 없었기에 선택한 승부였다. 나에겐 확신이 있었다. 2013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서슴없이 소송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대한민국 권력의 최고 심장부 청와대 대문에는 일본식 석등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통미술사에 따르면, 궁궐이나 민가에 석등이 설치된 전례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의 전통문화에 따르면, 석등은 묘지나 사찰에서만 발견될 뿐이다. 석등은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조명기구가 아니라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종교적 이유'로 설치되는 구조물이다.다시 말해 청와대 대문의 석등은 최소한 우리 문화적 전통에서 볼 때는 대단히 이질적인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좀 더 심도있게 살펴보면 우리는 청와대 대문의 석등 양식이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일본 신사의 양식이란 사실과 조우하게 된다.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궁궐 건축은 일본식 조경에 많이 오염될 수밖에 없었고, 해방 이후 궁궐의 일본식 조경문제는 사회문제가 되어 지속적으로 철거되어 왔다. 최근에도 창덕궁 앞의 일본식 석등, 환구단의 일본식 석등, 국립서울현대미술관의 일본식 석등 등이 잇달아 철거된 것이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현재 대통령 관저로 쓰이는 청와대는 원래 조선시대 경복궁의 일부였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 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안에 청사(廳舍)를 신축하면서 1927년 오운각(五雲閣) 외의 모든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이곳에 짓는다. 따라서 역사적 경위를 고려할 때, 청와대가 일본식 조경에 오염될 여지가 많았고, 실제로 이미 학계와 문화재청에 의해 '일본식 조경' 문제가 지적된 사항이었다. 그러나 다른 궁궐의 일본식 조경이 철거되거나 개선된 것에 반해, 청와대의 일본식 조경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이런 흐름들에 힘입어 나는 2013년 1월 청와대의 석등에 대해 철거를 요청하는 소장을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