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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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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긴 여행 지면기사
올해에도 어김없이 풍성한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다. 이른 추석이 지나고 추수를 하는가 하였더니 단풍이 들고 벌써 아침 저녁으로는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 그냥 일상에 빠져 달리기만 하였던 예전과는 달리 올 가을엔 왠지 허전하고 가슴 답답하다. 그래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되돌아보니 인생이라는 긴 여행을 시작한 지 벌써 60년이 되었다. 환희와 고뇌가 함께 하였고 성공과 좌절이 반복되었다. 신비로운 생명체로 태어나 신의 섭리대로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 원하지도 않았던 삶이 이곳에 던져졌고 목적지도 모르는 종착역을 향해 길고 긴 여정을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선인들이 무언가 의미있는 세월의 절점들을 만들어 자기성찰 기회를 주는 것 같다. 70세의 고희(古稀), 77세의 희수(喜壽), 80세의 산수(傘壽), 88세의 미수(米壽), 90세의 졸수(卒壽), 99세의 백수(白壽), 100세의 천수(天壽)라는 뜻이 주는 의미가 무겁다. 요즘은 80에 돌아가셔도 아쉽다 하니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울지 모르겠다. 인생도 여행처럼 출발했으니 언젠가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섭리일 텐데 어리석게도 무언가 잡고 놓지 않고 있는 것 같다.지난 여름 이름하여 회갑여행을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평소에 가고 싶은 곳을 숙의하던 중 서유럽의 박물관이 있는 대도시를 가자는 데 동의하고 10여일 만에 여기저기를 주마간산격으로 점만 찍고 다녀왔다. 뒤늦게 사진을 정리하며 여행지를 되돌아보니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한편으로는 언제 여기를 또 갈까 하는 생각에 아쉬운 느낌도 든다. 여행 자체가 좋아 충분히 준비하지 않고 그냥 허둥지둥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차분히 보고 느끼고 올 만큼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냥 허둥지둥 살아가는 것이지 여행처럼 선택하고 준비하고 나중에 스스로 되돌려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알랭드 보통은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고 하였다. 비행기나 배, 기차보다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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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韓商), 글로벌 코리아의 기수 지면기사
19세기말 일본에서 활동하던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목사이자 동양학자 그리피스는 조선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채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만 의존하여 조선역사에 대해 책을 쓰고 책명을 '은둔의 나라 조선(The Hermit Nation Corea)'이라 붙였다. 은둔이란 단어가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나 결국 그가 서양에 소개했던 조선은 쇄국으로 빗장을 걸어 잠근 무기력한 이미지의 나라였다. 그리피스가 무역으로 세계 10위권의 국가경제 규모를 만들어낼 진취적인 기상이 우리의 핏속에 흐르고 있었음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가 다시 태어나 세계 5대양 6대주 모든 곳에 진출하여 경제활동을 하며 부를 일구고 있는 우리 한인경제인들의 모험가 정신을 본다면 한국을 운둔의 나라가 아닌 어떤 나라로 소개할는지 궁금하다.한상(韓商)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5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 이민사에서 한상은 1960년대 미주지역으로 이민이 본격화되면서 출현하였고 198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성장하였다. 한상은 아직 전체적으로 경제규모 면에서나 영향력에 있어 세계의 대표적인 민족 네트워크인 중국의 화상(華商)이나 유대인상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화상은 동남아와 미국에, 유대인상도 미국, 유럽, 남미 일부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역사도 길다. 그들에 비하여 짧은 기간 중 한상이 보여준 성장세는 참으로 놀라울 정도이다. 이미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 일본에서 성공한 한상들은 물론이지만 아프리카 오지를 비롯하여 극도로 치안이 나쁜 중미지역, 문화적인 어려움과 제약이 그 어느 곳보다 심한 중동지역, 보통사람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서태평양이나 카리브해의 조그만 섬나라에 이르기까지 세계 도처에서 수 없이 많은 한상들이 우리 민족 특유의 억척스러움과 근면 성실함으로 현지에서 뿌리내리고 경제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앞으로 한상이 성장할 잠재력은 무한하다. 개개인의 역량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현재 세계 175개국에 퍼져있는 700여만명의 재외동포를 연결하는 세계적 차원의 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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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개성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지면기사
팔공산 부근의 후배 시인 댁에서 야생화를 구경하고 온 적이 있다. 칠월말의 정원은 스산한 느낌이었다. 담장을 수놓고 있는 능소화 외엔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화원의 주인은 40여년 야생화를 가꿔온 고수답게 야단스런 수사로 우리를 피곤하게 하지 않았다. 모든 꽃은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 화원은 넓이의 한계가 있어 필요한 것을 그 꽃의 특성에 맞게 심고 그 특성에 맞게 관리한다는 것, 재배할 자신이 없는 꽃을 아무 곳에서나 구해 와서 심어놓고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잔잔하게 설명했다. 들꿩나무는 물을 많이 요구하고 산수국은 수정이 되고나면 돌아앉고 능소화는 독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 식물들은 저마다 다른 특성이 있다. 양지를 좋아하는 꽃이 있고 음지에서도 잘 피는 꽃이 있다. 계절 따라 피는 시기도, 색깔도, 모양도, 다른 것이 꽃이다.돌아올 때 내 등 뒤에 흘리던 말이 지금도 여운으로 남아 있다. 옛날에는 분에 담아 키워서 가끔 선물로 드렸지만 지금은 줄 수도 없고 주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왜 주고 싶지 않다고 했을까? 우선 자기만큼 꽃을 사랑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사람에게 자기가 애지중지 키운 꽃의 미래를 맡기고 싶지 않아서 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화원은 철저한 계획하에 짜여진 것이어서 어느 꽃 하나도 빠져나가면 전체의 조화가 깨져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가꾸어온 많은 꽃들은 그 꽃 각각의 특성으로 그 화원의 아름다움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얘기는 너무도 당연하고 평범한 것이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자꾸 되새겨진다. 가령 우리 한국시단에 시인이 너무 많다고 하는 이가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아서 좋을 수가 있다. 다만 그 많은 시인들이 존재해야할 이유를 증명할만한 개성적인 작품을 쓰고 있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이 경우는 화가에게도, 음악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해야 할 기준이다. 대가들의 흉내를 내는데 평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 아예 시인이나 화가나 음악가라고 하기엔 부끄러울만큼 못 미치는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자기만의 향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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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잡혀간 조선 국왕의 투구를 보다 지면기사
한마디로 좀 놀랐다. 2013년 10월 1일 설레는 마음으로 도쿄 국립박물관 동양관 전시실을 들어섰을 때, 그토록 바라보고 싶었던 조선 국왕이 착용한 '대원수 투구'가 전시되어 있었다. 조명을 받아 빛나는 황금 용문양과 백옥 장식을 넘어서 거기에는 분명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다. 투구를 직접 보기 직전까지 이것이 조선왕실에서 대대로 고종까지 전래된 '조선 대원수 투구'임을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섞어서 질문하던 기자들 조차 더 이상의 의심을 접었다. 투구에 서린 장엄한 아우라는 군신(軍神)의 수호가 함께 하는 제왕의 투구임을 분명히 느끼게 했다.2010년 10월 '조선왕실의궤 반환절차'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도쿄에 갔을때, 문화재 환수운동의 협력관계에 있는 도쿄 고려박물관 이사 이소령 선생님에게서 뜻밖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일제시대 도굴왕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직접 유물의 출처를 기록한 '오구라 컬렉션 목록'이란 책을 구했다고 했다. 이소령 선생님이 보여주신 책을 펴자마자 나는 도쿄국립박물관 소장의 용봉문 투구에 대한 출처부터 확인해 보았다. 오구라는 이 투구가 '조선왕실의 전래품'이라고 기재해 놓고 있었다. 그때까지 막연한 추정만 있었던 '제왕의 투구'가 문서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이 기록은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 근거까지 제시해 주고 있었다.조선왕실의 소유품이라면 개개인의 매매로 유통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에도 '궁내부장관'이란 부서가 조선 왕실의 유물과 재산을 관리했으므로, 허가없이 왕실의 물건이 민간이나 해외로 유출되는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하물며 '임금의 투구'와 같이 상징성 큰 물건이 매매되어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것은 도굴 혹은 절도가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였을 것이다.그날 이후 나는 오구라 컬렉션에 대해 문제를 제기키 위해 '조선 대원수 투구'를 전면에 내세우기로 하고 이 투구의 특별열람과 공개를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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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복지수가 말해 주는 것 지면기사
국민의 행복감 정도를 조사하는 전문 기관들이 발표하는 국가별 행복지수 순위는 그야말로 들쑥날쑥이다. 우리나라는 지난달 발표된 유엔의 2013년 세계행복보고서에서 조사대상 156개국 중 41위를 기록하였다. 그 이전 미국의 여론조사기관인 갤럽 조사에서는 146개국 중 97위를 한 적도, 몇 년 전에는 100위 밖으로 벗어 난 적도 있다. 한편 이번 유엔 보고서는 가장 행복한 국가들로 덴마크를 위시한 북유럽 국가들을 꼽았는데, 영국의 신경제재단(NEF)은 오래전부터 부탄, 방글라데시, 파나마, 쿠바 등 동남아와 중남미 저개발국을 행복지수 상위권의 국가로 평가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을 행복지수 150위, 개인소득 4만 달러의 싱가포르를 최하위 권으로 평가한 기관도 있었다. 이는 조사기관의 평가기준이나 조사방법이 다른 탓이겠으나, '당신은 행복 합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들이 각각 해석하는 행복의 의미가 다른 것에도 그 이유가 있다. 문화권별로 가치와 관습이 다르고, 또 행복이란 지금 내가 처한 상태에 대한 감정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이웃에 비하여 어떠하며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문화와 관계없이 모든 사회에서 사람들은 질 높은 삶, 좋은 건강, 안정된 미래를 위하여 많은 소득과 사회적 성취를 원한다. 그런데 얼마만큼의 재산과 성취에 만족하는가 하는 것은 다분히 상대적이다. 19세기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밀(John S. Mill)은 사람은 '부자'가 되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더 부자'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듯 우리는 그것이 재산이든, 명예이든, 성취감이든 내가 가진 것을 내 주변 이웃의 것과 비교하여 만족감 또는 불만을 느낀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기 보다는 남과의 차이를 더 의식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람의 본성이니, 경쟁의 룰이 공정하지 못한 사회라면 상실의 불만은 분노로 변하고 사회의 행복지수는 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다.어제의 나, 지금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에 대한 비교도 개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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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로 소통하다 지면기사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이래 참으로 많은 길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당시 로마가 세계 최강국이었기 때문에 모든 인적 물적자원이 중심인 로마에 있고 이들이 서로 지역을 달리하여 쉽게 통한다는 의미이다. 사실 로마의 길은 원래 군사적이고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제국 로마를 통치하는 방법은 법과 군사력에 의한 엄격한 규율이었다.흔히 비단길이라고 부르는 실크로드는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을 이어준 육해교통로를 말한다. 말이 실크로드이지 목숨을 건 머나먼 행로였다. 이 길은 처음에는 전쟁을 위한 길이고 문물을 거래하는 길이며 종교적으로는 포교의 길이 되었다. 실크로드가 처음으로 열린 것은 前漢(기원전 206~기원후 25) 때이다. 한무제는 서아시아로 통하는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장건을 중앙아시아에 파견했는데 이를 계기로 중앙아시아 및 지중해의 동편에 이르는 서방 각지와 문물이 왕래하게 된 것이다.기독교가 번성하였던 중세이래 유럽인들은 크고 작은 많은 순례지들을 돌아다녔다. 그들에게 성지순례는 살아있을 때나 죽고 나서 속죄를 위한 중요 수단이 되었다. 본인이 신체적으로 불편하면 대리인을 보내기도 하였다 한다. 어디로 순례를 다녀왔는가에 따라 등급이 매겨졌는데 예루살렘이 최고의 등급이고 로마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그 다음 등급이었다. 특히 북부 유럽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순례지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였고 1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스페인 북부의 모든 길은 이곳으로 이어졌다. 순례자들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있다는 대성당을 찾았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750㎞에 달하는 여정을 도보 순례를 하고 있다. 장대한 산악지대와 고풍스런 마을들, 숲으로 뒤덮인 길을 걸어 성지에 도달하는 영적 희열은 대단하다.우리에겐 어떤 길이 있었을까? 요즘 경주에서는 문화엑스포의 일환으로 경주와 이스탄불을 잇는 새로운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있다. 중국 서안에서 출발하는 실크로드가 아닌 경주에서 시작점을 잇는 실크로드이다. 8세기의 신라승려 혜초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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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과 가고파 지면기사
노산 이은상, 현대시조 개척의 선구자다. 특히 1932년 발표된 '가고파'는 김동진이 작곡하여 고향이 어디에 있건 향수에 젖어들면 누구나 부르곤 하는 국민 애창 가곡이다. 이 노래가 발표된 지 81년 만인 올해 마산역장은 문화적 관문으로 역의 분위기를 가꾸고자 하는 의욕에서 '가고파' 시비를 세웠다. 그러나 민주성지 마산을 부르짖는 일부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혀 시비 존폐문제는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차제에 '가고파' 시비 존립의견을 지지하는 여섯 가지 이유를 들어 갈등 종식에 조그마한 지혜를 보태고 싶다.첫째 '가고파'는 작가의 생애보다 작품에 포인트를 맞추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산의 관문인 마산역에 '가고파' 시비를 세운 뜻은 정감 있고 아름다운 마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이지 노산의 생애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전 국민이 알고 함께 부를 수 있고, 미항 마산의 모습을 잘 알릴 수 있는 시로 '가고파' 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둘째 노산은 친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때 '친일혐의' 운운하면서 워낙 많이 언론에 오르내려서 지금도 노산을 친일인사로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은상은 올려있지 않다. 1903년에 태어나서 1982년에 타계한 노산의 일생을 살펴볼 때 일제통치 36년이 그대로 그의 생애를 관통해 갔음에도 불구하고 친일인사는커녕 오히려 일본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른 애국투사였다.셋째 노산은 권력에 연연한 인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노산의 중요 프로필을 보면 대학교수, 언론사 간부, 문화단체 회장을 지낸 것이 대부분이다. 그가 권력에 집착했다면 장관이나 총리, 국회의장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욕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넷째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대체로 옹호하는 입장에 섰지만, 그의 일관된 진심은 민족사랑, 조국사랑이 바탕이었다.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노산은 일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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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이승만대통령 낚시터 지면기사
2012년 7월 청남대에서는 '건국의 대통령 이승만을 만나다'라는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가 열릴 즈음, 그 분과 관련된 희귀 사진들이 대거 전시공개되었다. 우연히 이승만 대통령의 희귀사진들을 살펴보다가 나는 뜻밖에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대통령이 창덕궁 정자에서 프란체스카 여사와 낚시질을 하는 사진이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낚시 취미에 대해 깊이 있게 조사하다가, 재미있는 가설에 도달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일생은 낚시와 함께한 세월이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우스갯소리중 그 유명한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란 아부도 낚시중 일어난 일이었다고 한다. 이 농담은 이승만 대통령이 진해에서 낚시를 즐기던 중 있었던 일로, 지금도 그 장소는 이승만 대통령 별장 및 정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5호)로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화진포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 별장도 낚시와 뗄 수 없는 장소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휴양을 위해 찾았던 화진포 별장에는 생전의 유품들을 복원해서 생동감있게 전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족들이 기증한 것으로 알려진 대통령이 사용하시던 낚싯대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 화진포 별장에서 즐겨 낚시를 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전시하고 있는 듯했다.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던 날도 낚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일 오전 8시경 대통령은 창덕궁 후원에서 낚시를 하던중, 황급히 달려온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북한의 남침사실에 대해 보고받았다고 알려져 있다.그 분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했던 4·19 의거에도 낚시가 있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전국민의 분노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던 4월 11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 도중 사라진 17살 남학생의 주검이 발견됐다. 어떤 낚시꾼이 마산항 앞바다에서 건져 올린 시신은 시위중 실종되었다고 알려진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군이었다. 당시 김주열 군의 주검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참혹한 상태였다. 김주열의 죽음은 부패한 정권에 대한 분노의 폭발점이 되어, 마침내 4·19를 통해 12년간 장기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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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를 여는 한민족네트워크 지면기사
네트워크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개인·기업뿐만 아니라 국가·민족까지도 네트워크를 통하여 소통의 기반을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네트워크는 또 다른 네트워크를 낳고, 수많은 네트워크가 모여 하나의 허브를 만들고, 서로 다른 허브들이 연결되어 더 큰 네트워크를 만든다. 1+1=2로만 인식되던 것이 100도 되고 무한대(∞)도 되는 새로운 가능성의 시대,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 모두가 '사회적 연결고리'(social connectedness)가 활성화된 결과이다.그런 시각에서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보자. 150여년 전, 당시 조선사회에서 전개되었던 정치·경제·사회적 상황 하에서 어쩔 수 없이 내 나라를 등져야만 했던 해외 이주자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어서 하와이 멕시코 등지로 제법 큰 규모의 집단이주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국권 상실과 함께 졸지에 외지에서 나라 없는 백성이 되고 만다. 일제 강점기에도 강제동원, 강제이주, 징병 등등의 이유로 원하지 않는 해외 이주가 계속되었다. 그토록 원하던 해방이 되었지만 이들은 남북이 갈라지고 국경이 가로막혀 돌아오려야 돌아올 수 없었다. 정부수립 이후에도 사람들의 해외이주는 계속 되었다. 해방 전 이주는 자기의사에 반한 이주였거나 국내 사정이 워낙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던 강제이주라면 해방 이후의 이주는 보다 나은 삶을 찾기 위한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해외이주라는 차이가 있다 하겠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사람들과 그 후예들이 오늘날 전 세계 170여개국에 720만명에 이른다.그렇지만 태평양바다 건너에서, 중앙아시아와 동북만주에서, 일본열도에서, 그리고 5대양 6대주 이역의 땅에서 우리와 아무런 관계없이 살고 있을 걸로 생각했던 나라를 떠난 이들과 그 후손들은 놀랍게도 자신들의 뿌리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쿠바의 한인 후손 3~4대들이 인천의 이민박물관을 방문하여 100여년 전 제물포를 떠났던 선조들의 사진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짓는 장면은 그들이 이제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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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유산과 인문학을 통한 도시재생 지면기사
인간이 집짓기를 시작한 이래로 그들의 희망은 안전하고 편리하며 아름다운 집짓기를 원했을 것이다. 동물이나 곤충까지도 건축적 본능이 있는데 인간은 건축과 도시를 건설함으로써 신에 도전이라도 하듯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열망을 끊임없이 드러내곤 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도시화 추세는 50%에 이르고 장차 20년 후가 되면 약 75%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토마스 무어가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만들어내기 이전에도 인류는 현실세계의 한계를 뛰어넘는 신세계를 원하였다. 이런 인류의 열망은 어려움으로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이상향으로 나타나며, 해결 방안으로 도시구조에 대한 얘기도 거론되고 있다. 무어는 이상도시왕국 건설을 통해 당시 영국의 사회경제적 병폐와 종교적 자유 및 개방화되어가는 유럽 경제체제에 대한 경제적, 공유사회적 유토피아를 제시하려고 하였다.그렇다면 온갖 열망으로 가득한 지구상에서 공동생산, 공동분배에 6시간 노동하고 8시간 잠자고 나머지는 오락이나 취미생활을 하며, 경직된 관료주의가 아닌 민주주의와 민중 중심의 사회주의가 정립되는 나라가 있을까. 또한 도시공간이 유토피아처럼 구현될 수 있을까? 19세기말 영국인 하워드는 대도시와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지역에 전원과 도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는 자족적인 도시건설이 황폐화된 도시를 개선하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건축가 라이트는 브로드에이커 시티라는 이상도시안을 내놓았다. 이 안은 극단적인 저밀도도시로 특징적인 것은 교통체계다. 거주자 모두가 자동차를 소유하고 헬기형태의 교통수단을 이용한다. 입체화된 여러 층의 도로로 구성되어 철도, 화물수송차, 고속교통수단인 모노레일 등이 층별로 이용된다.이처럼 혁신적인 사상가와 건축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도시공간을 통해 유토피아를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르네상스 이래로 수백년간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열망과 도시성장이 같기 때문이다. 즉 산업화를 거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한 현대도시들은 일정한 공간 안에 사람과 건물을 비롯한 엄청난 재화를 탐욕적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도시는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