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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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산업단지, 밥 지면기사
뚜껑을 열었다. 모락모락 잘 지어진 쌀밥 한 주걱을 크게 퍼올렸다. 수북이 쌓인 제육볶음과 돈가스도 차곡차곡 담았다. 반찬도 알차다. 배추김치, 콩나물, 시금치, 감자볶음. 양껏 덜었다. 자리에 앉아 된장국 한 수저를 먼저 떠먹었다. 다음으로 밥 한 숟갈, 그리고 가져온 반찬 하나씩. 10분 만에 식판은 바닥을 보였다. 마무리로 석류차까지 시원하게 들이켰다. 반나절은 거뜬할 든든함이 차오른다.그제야 이곳을 들어오는 이들의 면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차림새를 한 수십 명이 헬멧과 보호구를 옆에 두고 급히 손을 씻으며 들어온다. 익숙한 듯 담소를 나누는 중장년과 무표정으로 각자 휴대전화만 보는 젊은이들이 함께 대기 줄을 이룬다. 한적했던 식당 내부는 몇 분만에 빈 자리를 찾기 힘들어졌다. 언어, 인종, 외양도 모두 조금씩 다른 이들은 이곳 같은 공간에서, 각자만의 방식으로 만든 소중한 한 끼 식사를 묵묵히 해결한다.산업단지 현장 취재를 나서면 소위 '함바집'으로 불리는 식당을 꼭 들른다.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양도 좋지만, 무엇보다 공장 노동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몇 없는 귀한 장소이다.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는 체계 속 노동자들을 평시에 외부에서 접촉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몰리는 시간대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얼른 식사를 마치고 휴게 공간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금쪽같은 점심 휴식시간을 쪼개가며 절로 토로하는 말씀들을 듣게 된다.배고플 땐 밥을 먹어야 한다. 어떤 곳이든 웬만하면 밥 시간은 보장한다. '밥 앞의 평등'은 대체로 잘 지켜지는 셈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퇴근 후 저녁밥을 미처 못 먹는 노동자들이 매해 수백 명씩 발생한다. 이들의 따뜻한 밥을 보장하도록 마련된 법은 1년 동안 힘도 못 써보고 뜯어 고쳐질 준비를 하고 있다. 같은 밥을 먹으며 생각한다. 푸짐하게 양껏 담긴 이 식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일까. 적절한 질문거리를 고민하며 퇴식구를 나선다. /김산 사회교육부 기자 mountain@kyeongin.com김산 사회교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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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본디, 부디 지면기사
"이 재밌는 걸 수도권 친구들만 하고 있었다면서."지난 주말, 지방의 한 결혼식장에서 만난 오랜 친구가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면서 한 말이다. 친구의 휴대전화에는 메타버스 메신저앱 '본디(bondee)'가 켜져 있었다. 싱가포르 스타트업 '메타드림'이 지난해 10월 선보인 본디가 지역을 막론하고 빠르게 확산되는 모양새다. 수원뿐 아니라 울산 등 전국 곳곳에서 본디 사용자를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본디는 홈화면에서 친구 추가를 누르면 전화번호가 저장된 이들의 앱 가입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사용자라면 좌측 프로필칸에 생성해놓은 아바타가 떠서다. 기사 작성을 위해 본디에 가입했던 지난 10일까지만 하더라도 한손에 꼽았던 사용자가 며칠 새 두손이 모자랄 정도로 늘었다. 친구부터 직장동료, 홍보실 직원까지. 다양한 이들이 앱을 이용 중이었다.본디의 기반은 메타버스(Metaverse)다. 작년에 이어 올해의 경제산업분야 키워드도 메타버스다. 다양한 기업들이 메타버스 관련 기술을 선보이고 있고 제페토 등 메타버스 플랫폼과 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대중이 체감하기엔 아직 '그사세'처럼 느껴진다. 메타버스 거품론이 고개를 드는 이유다.이러한 상황 속 본디는 빠르게 한국에 침투했다. 싸이월드를 경험해본 이들에겐 익숙한 듯 낯섦을,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나름의 신선함을 선사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일방적 팔로우가 아닌 서로 팔로우를 해야만 상태를 공유할 수 있다는 폐쇄성도 갖춰 피로감이 적다는 평도 많다. 이 같은 입소문을 타고 본디의 누적 다운로드 수는 빠르게 늘어가고 있으며, 메타버스 관련주도 반등하고 있다. 열풍이 계속될지는 메타드림에 달렸다. 벌써 몇몇 이들은 콘텐츠가 부족하다고 평한다. 개인정보 보안이 불안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인기가 빠르게 식은 오디오 SNS '클럽하우스'의 수순을 밟지 않으려면 콘텐츠 다양성이 답이다. 보안강화는 필수다. 반등 조짐이 보이는 메타버스 시장에 찬물을 뿌리지 않길 바라본다. /윤혜경 경제산업부 기자 hyegyung@kyeong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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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튼튼한 학교 운동부 만들기 지역사회 힘써야 지면기사
지난 10일 시흥 목감고 체육관은 배드민턴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모두 여자 배드민턴부 창단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온 이들이었다. 이날 시흥 진말초·능곡중 배드민턴부 학생들도 함께 행사에 참석했다. 자신들이 졸업하면 갈 수 있는 고등학교가 생겼다는 기쁨 때문인지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당초 시흥에는 장곡고 여자 배드민턴부가 있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수도권에서 훈련에 어려움을 겪자 선수들이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가면서 선수 숫자가 급격히 줄었다. 결국, 장곡고 배드민턴부는 해체됐다. 장곡고 배드민턴부가 사라지자 피해를 본 것은 시흥 지역 학생 선수들이었다. 배드민턴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시흥 지역을 놔두고 먼 경북 김천까지 가는 학생도 있었다. 다행히 시흥 지역 각계각층의 노력으로 목감고에 배드민턴부가 생기며 급한 불은 껐다.목감고를 포함해 최근 경기도 내 학교에서는 운동부 창단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2월에는 수원 곡정고에 레슬링부가 창단되며 수원 지역 레슬링 학생 선수들의 진학 길이 열리기도 했다. 곡정고의 창단으로 수원시는 중·고교 학교 레슬링부와 수원시청 레슬링팀까지 보유하면서 레슬링 선수들의 진로에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했다. 과거와 비교하면 학교 운동부가 많이 사라져 가는 상황에서 이처럼 학교 운동부가 다시 생기고 있다는 것은 분명 경기 체육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신호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렵게 창단된 학교 운동부들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 운동부를 운영하는 학교와 해당 지역 교육지원청을 비롯해 지역 사회가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창단만 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학교 운동부는 언제 해체의 길을 걸을지 모른다. 학교 운동부가 튼튼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지역 사회가 해야 할 일이다. /김형욱 문화체육레저팀 기자 uk@kyeongin.com김형욱 문화체육레저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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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한 장애인의 부탁 지면기사
최근 자전거 유튜버 박찬종씨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 9월 불의의 사고로 왼쪽 다리를 잃었다. 그리고 사고의 순간 보고 들은 것들, 당시 스쳐 지나간 생각과 감정을 오롯이 블로그에 남겨 온라인상에서 큰 화제가 됐다. '내가 의족이 없지 의지가 없느냐'는 명언과 함께 병상 일기도 썼는데,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의지력으로 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주고 있다.박찬종씨와의 인터뷰를 갈무리하며 끝으로 비슷한 경험을 하신 분들께 남기고 싶은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제가 함부로 '아무렇지 않습니다. 도전하세요'라고 말할 순 없다. 장애인들에게 뭘 하라거나 어떤 생각을 가지라고 말하는 건 주제 넘는 소리인 것 같다"고 했다. 대다수의 장애인은 장애를 얻는 순간 가난(경제적 부담)도 함께 얻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박찬종씨는 퇴근길 사고로 산업재해 판정을 받아 근로복지공단 재활공학연구소에서 의족을 맞췄다. 이곳은 비용이 외부업체의 절반가량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최소 수백만원 이상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산업재해 범위에 속하지 못하는 경우 의족 비용은 천차만별로 올라간다.의족의 수명은 5년. 의족 값으로 5년 혹은 3년에 한 번씩 정부가 일부 금액을 지원해준다. 이마저도 정보를 알지 못해 수십 년 전에 맞춘 마네킹 같은 구식 의족을 평생 쓰는 분도 있다고 한다.단순히 의족에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신체의 일부를 보조하는 장애 보조 도구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일 것이다.박찬종씨는 끝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주변에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나라에서 지원을 해줘도 당사자는 알 수가 없어요. 제 글을 보고 메시지를 준 절단 환자와 그의 가족들조차도 지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우리나라는 신청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주지 않아요. 주변에서 장애인분들을 위해 조금 더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유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yoopearl@kyeongin.com유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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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기자 아닌 사람 지면기사
"우선 기사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지난주 카페에서 만난 취재원은 인터뷰에 앞서 이 말로 입을 열었다. 김빠지는 말이었다. 며칠 전, 그는 통화에서 작정한 듯 이야기를 쏟아놓을 태세였다. 전화가 아니라 내일이라도 당장 시간을 잡고, 얼굴을 보고 해야 할 말이 많다고 했다. 나로선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관심을 가졌던 사안이었던 데다, 여전히 문제가 해소되지 않은 채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있어 그의 반응이 반가웠다. 사안의 실체를 증언해줄 당사자였다.취재원은 경기도 내 학교 어느 종목 운동부 학생의 부모였다. 기사는 안 된다는 신신당부에도 우회적으로 설득해 보려고도 했다. 그와 자녀가 겪은 일들을 기사에 담으면, 이전과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강고했다. 이내 나는 의지를 꺾었다. 그러고도 그는 2시간 가깝게 최근 2년 사이 자신이 맞닥뜨린 이야기들을 빼곡히 읊어갔다. 마치 이런 자리를 위해 수십 번은 준비한 사람처럼, 그의 머릿속엔 이 문제를 둘러싼 타임라인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기사가 아니라 기자, 아니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몇 가지 일화에 방점을 찍어 목소리를 높이자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리고 어느샌가 나는 그가 열변을 토해 답답한 심정을 전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눈시울을 붉히며 반대편 상대를 나무랐을 땐, 나 역시 한 편이 되어 질책의 목소리를 더했다. 그는 후련하다는 듯 인터뷰 막바지에 "마음의 정리가 좀 됐다. 지금은 아니지만 기사가 필요하면 꼭 먼저 연락드리겠다"며 고마워했다.지나간 기사로 자주 부끄러워하면서, 드물게 '자뻑'하는 지독한 이 일의 굴레에서 하나의 틈을 마련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쓰지 않거나, 쓰는 것을 잊음으로써 그 이상의 의미를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틈 말이다. 카페를 나간 뒤 그의 하루가 평안했기를 빈다. 그날 만남 자체가 고통의 터널 속, 그와 자녀의 기댈 언덕쯤은 됐기를 소망한다. /조수현 문화체육레저팀 기자 joeloach@kyeongin.com조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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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겨울만큼 따뜻한 봄·여름·가을 지면기사
150㎝는 됐을까. 황 할아버지의 보금자리로 들어가는 문은 고개를 절로 숙이게 했다. 주방인지 창고인지 모를 현관을 지나면 할아버지의 단칸방이 나온다. 성인 남성 한 명이 세로로 누우면 꽉 찰 정도였고, 가로로는 누울 수도 없는 크기였다. 할아버지는 "좁아서 어쩌나…"라고 중얼거리며 겸연쩍게 나를 반겼다.이날 연말의 공기는 뼈 틈 사이사이를 시리게 할 정도로 새삼 차가웠다. 방은 그야말로 얼음장이었다. 좁은 방에 앉자마자 허연 입김으로 주위가 가득 찼다. 할아버지는 이 집에서 십수 년을 살았다고 했다.방에는 연탄이나 기름보일러를 놓을 만한 자리가 없다. 방 안을 덥히는 건 작은 온풍기가 전부다. 할아버지는 집안에서조차 털모자, 장갑, 내복, 점퍼를 입고 지내야 했다.할아버지는 이날 인천쪽방상담소에서 건넨 두꺼운 겨울 점퍼를 받고 몸에 아주 꼭 맞는다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올겨울은 예년보다 개인과 기업에서 들어온 후원이 늘었다고 한다. 고유가, 고물가에 우리네 생활도 넉넉하지 않은데 소외된 이들에게 온기를 전해준 고마운 어떤 이들 덕분이다.아직 찬 바람이 불긴 하지만 올겨울도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봄이 와 쌓인 눈이 녹아도 이들의 삶은 냉골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봄 추위에 털모자, 장갑, 내복, 점퍼를 여전히 입고 지내진 않을까. 여름 무더위와 많은 비에 지치진 않을까. 풍요로운 가을에는 홀로 쓸쓸하지 않을까. 그렇게 또 추운 겨울을 맞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쪽방촌 주민들의 집을 데우는 건 기름이나 연탄 따위가 아닐 수도 있다. 온정을 모아 칠순잔치를 열어줬을 때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눈시울을 붉히던 게 이들이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나가려 할 때쯤 황 할아버지는 "찾아와줘서 고맙다"며 밝게 웃었다. 아마 사람이 남기고 간 온기에 고맙다는 인사를 한 걸지 모른다. /변민철 인천본사 사회교육부 기자 bmc0502@kyeongin.com변민철 인천본사 사회교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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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한 손엔 핸들, 한 손엔 수저 지면기사
'30초'.한 화물차 운전자가 차 안에서 식사를 마친 시간이다. 운전자는 적색 신호에 핸들을 잠시 놓고 허겁지겁 조수석에 있던 수저와 국 통을 들어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그저 내 차량 백미러를 통해 잠시 마주한 50대 가장 정도로 추정될 뿐이다.그는 왜 차 안에서 식사를 할까. 그것도 왜 위험천만하게 운전을 하면서 먹고 있었을까. 아마 제한된 화물운송시간을 맞추기 위해 식당에 들어갈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숙식 모두 차 안에서 해결한다', '하루 16시간을 운전만 한다' 등 미디어에 표현됐던 그들의 전쟁터 같은 일상을 실제 두 눈으로 마주하니, 그 충격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맴돌았다.신호가 파란불로 바뀌고 차량을 출발한 나는 마치 그 운전자의 식사를 방해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분주히 국을 들이켜던 운전자는 곁눈질로 신호를 확인하다가 내 차가 출발하니 재빠르게 국 통과 수저를 조수석에 내려놓고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지난해 연말 화물연대는 생존을 위해 '안전운임제'의 일몰을 폐지해 달라며 총파업을 진행했다. 정부는 설득, 협상 대신 업무 복귀 명령 등의 강대강 대응을 가하며 사태가 격화됐다.'귀족노조' '민폐노조' 등으로 얼룩진 이들은 결국 백기를 든 채 파업을 종료했지만, 달라진 건 전혀 없다. 오히려 정부는 안전운임제를 없애겠다고 나서고 있다. 국회에선 2월 임시국회 때 야당을 중심으로 안전운임제를 처리하겠다며 나서고 있지만, 지난 1월 본회의조차 단 한 번 열지 않은 국회가 협의에 적극 나설지는 미지수다.오늘도 그 화물차 운전자는 한 손엔 핸들, 다른 한 손은 국통을 들고 차 안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을 것이다. 국민 중 하나인 그들이 잠시라도 여유롭게 식사할 수 있는 제도와 생존권을 주는 게 국가와 위정자의 역할 아닐까. /고건 정치부 기자 gogosing@kyeongin.com고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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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이 정도면 된걸까? 지면기사
2019년 11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BRSO) 음악감독 마리스 얀손스의 부고 소식이 전해졌다. 클래식에 관심 갖기 시작한 당시의 나에게도 세계적인 거장 지휘자의 사망 소식은 무척이나 안타깝게 다가왔다. 얀손스가 남긴 발자취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오슬로 필 음악감독으로 거둔 성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79년부터 21년간 오슬로 필을 이끌었고 무명에 가까웠던 이 악단을 국제적인 오케스트라로 발돋움시켰다. 명문 악단인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였던 사이먼 래틀 역시 버밍엄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18년을 지냈다. 악단의 기량을 월등히 높이며 영국의 대표 오케스트라로 키워낸 그는 업적을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과 기사 작위를 받았다. 좀 더 가깝게는 2024년부터 서울시향 음악감독을 맡게 된 얍 판 츠베덴이 있다. 그는 10년간 홍콩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지휘했는데, 홍콩필은 미국과 유럽의 여러 유수 악단을 제치고 2019년 '그라모폰'이 선정한 올해의 오케스트라에 선정된 바 있다. 우리나라, 특히 지역 악단의 경우 이처럼 한 지휘자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사례가 드물다. 기관장이 바뀔 때마다 예술감독들도 함께 바뀌는 것이 마치 관례처럼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상임지휘자의 임기가 끝나기 전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차기 지휘자를 물색한 뒤 악단이 가야 할 방향을 가늠해보는 시스템을 가진 곳도 흔치 않다. 현재 경기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와 부지휘자 모두 공석인데 이는 비단 악단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예술감독들이 예술단을 맡아 무엇인가 보여주기에 2년은 너무 짧고, 한 번 임기가 연장되면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 버린다. 예술단을 충분히 잘 이끌 역량이 있고 대내외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단원들의 기량을 높일 수 있는 예술감독이라면 사실상 임기와 지원에 어떠한 한계나 선을 그어놓을 필요는 없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 속에 담긴 잠재력과 가치를 행정의 한 단편으로 치부해 버리는 현실이 씁쓸하다. /구민주 문화체육레저팀 기자 kumj@kyeongin.com구민주 문화체육레저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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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배려석 지면기사
지하철 임산부석 앞에 섰다. 이미 누군가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흘금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는 금세 눈을 감았다. 모른 척한 것인지, 정말 몰랐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렇게 임신 3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이젠 정말 안되겠다' 싶어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달았다. 진한 분홍 색깔의 배지는 무채색의 옷차림과 대비돼 더욱 눈에 띄었다. '임산부'란 이름표를 달고 다니는 것 같아 민망했다. 배려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위치에 놓인 상황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그 이후에도 임산부석에 앉기란 쉽지 않았다. 만삭이 되기 전까지 배지는 가방고리에 지나지 않았다. 지하철, 버스까지. 크게 다른 건 없었다.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이런 '민망한' 경우를 헤아려봤다. 한 손가락을 넘어가면서부터 더는 헤아리지 않았다.임산부 배려석이 생긴 지 10년이 지났다고 한다. 현실은 제도 시행 전후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지자체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시스템 개선에 나섰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 2016년 임산부가 보이면 자리를 양보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비워두는 자리로 캠페인 내용을 수정했다고 한다. 대전교통공사는 임산부 배려석 알림 서비스를 최근 도입했다. 발신기를 가지고 있는 임산부가 배려석 근처로 가면 안내 음성과 점등이 나와 자리 양보를 유도하는 방식이다. 제도를 소개하는 기사를 쭉 읽다 보니 오히려 댓글이 눈에 띄었다. "얼마나 양보를 안 하면 이런 것까지 생겨?"임신 후기로 접어든 요즘, 한동안 이런 걱정을 잊고 지냈다. 누가 봐도 임산부이니 이제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임산부석에 앉을 수 있었다. 대중교통을 타는 일은 피하게 된 것도 한몫했다.승용차를 끌고 다니면서도 어려움은 있었다. 옆 차와의 간격이 좁은 곳에 주차하면 차량 문을 여닫고 나서 배가 차량과 차량 사이에 끼여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을 하도 겪으니 차량을 운전석보다는 조수석 쪽으로 좀 더 기울여 주차하는 웃지 못할 습관마저 생겼다. 임신한 경험이 없다면 이해하지 못했을 상황이다.매번 '후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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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규탄'과 '방탄', 그리고 한탄 지면기사
"아휴, 이제 하다 하다 고사리도 비싸서 못 사겠네." 설 연휴를 앞두고 장바구니 물가를 취재하기 위해 전통시장을 돌아다녔다. 지난 추석과 달리 이상하리만큼 '비싸다'고 탄식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자주 들렸다. 취재를 나서기 전 차례상에 오르는 품목들의 가격을 살펴보니 작년보다 조금 떨어지거나 비슷한 편이었기에 다소 의외였다. 현장에서 만난 상인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그럼에도 시민들이 비싸다는 반응을 보이는건 그만큼 우리네 살림살이가 팍팍해졌다는 증거일지 모르겠다. 밥 한 끼에 만원은 심심찮게 넘고 각종 공공요금도 급격하게 올랐다. 지갑에서 나가는 돈을 조금이라도 줄여볼 요량으로 영하 5도의 추운 날씨 속에 전통시장을 찾았을 텐데, 예상보다 높은 가격표에 선뜻 지갑을 열기가 쉽지 않았을 터다.취재를 마치고 시장 밖으로 나서니 이번엔 각 정당이 거리에 내건 현수막들이 시선을 끌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문구도 보였지만, 상대 정당을 속된 말로 '디스'하는 내용에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민심의 밥상 위에 오를 의제를 선점하기 위해 벌어지는 '장외 신경전'이 마냥 낯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마스크 넘어 입김과 함께 섞여 나오는 시민들의 한숨을 마주한 뒤 바라본 거리의 풍경은 잔뜩 찌푸린 날씨만큼이나 잿빛이었다.20여 년 전 대선 토론회에서 한 후보가 말했던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가 떠올랐다. 그가 이 질문을 던진 건 '우리 정치가 민생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에둘러 주장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때나 지금이나 민생이라는 단어가 쉴 새 없이 거론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별반 다를 건 없어 보인다. '무능한 정부 여당 규탄'과 '당 대표 방탄'이라는 지루한 공방 속에 늘어가는 건 시민들의 한탄뿐이다. 올해는 더 암울할 것이란 경제 전망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번 설에는 우리 정치권이 삿대질을 내려놓고 건설적인 대안을 찾는 데 시간을 활용하길 권한다. 아무도 모르게 시장을 둘러보는 것도 퍽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