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참성단]대법원 사태 유감
    참성단

    [참성단]대법원 사태 유감 지면기사

    법 없는 국가는 없었다. 법치가 무너지면 국가가 망하고, 법질서가 흐려지면 사회는 문명에서 야만으로 전락한다. 입법, 행정, 사법의 3권분립은 민주주의를 모든 형태의 독재체제와 구별짓는 권력체계다. 3부의 개별적 권력은 오로지 국민에게서 나오니, 서로 영역을 침범하면 안된다. 권력이 섞이면 주권재민 원칙이 깨지고, 법치의 규범이 무너지고, 정의를 세울수 없다. 대한민국 판사들이 부당한 권력의 간섭에 직을 걸고 항거한 사법파동 역사를 이어 온 건 이 때문이다.1차 사법파동은 1971년 박정희 정권과 사법부의 충돌이었다. 공안 및 시국사범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불만이었던 정권은 두명의 판사에게 향응혐의를 씌워 사법부 길들이기에 나섰다. 당시 450명의 판사중 150명이 사표를 제출하며 항의했다. 정권은 유신헌법으로 대법원의 위헌법률심사권을 박탈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하지만 1988년 2차, 1993년 3차 사법파동에서 소장판사들은 '문제적 대법원장'들을 사퇴시켜 사법개혁 의지를 관철했다. 3차 파동 당시 소장판사들은 사법개혁 성명에서 "판사들은 판결로 말해야 할 때 침묵하기도 했고 판결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기도 했으며 판결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진실에 등을 돌리기도 했다"고 뼈저린 자기반성을 남겼다. 2003년 4차 사법파동은 법원 인사제도 개혁으로 헌법재판관과 대법관에 여성들을 진출시켰다.법원이 시끄럽다. 지난해 법원행정처의 진보성향 판사 블랙리스트 작성의혹이 사법행정권남용 논란으로 확산됐다. 전·현직 대법원장이 진보·보수 시민단체로 부터 고발당했고,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정리해고됐던 KTX승무원들은 판결무효를 주장하며 대법원을 점거하기도 했다. 현 김명수 대법원장은 자신이 구성한 조사단의 조사결과를 부정하는 자충수에 고민이 깊은 모양이다. 법원 내부도 사실 관계에 대한 판사들간의 논란으로 뜨겁다.권력으로부터의 사법독립과 내부의 사법개혁을 추구한 예전의 사법파동과는 거리가 멀다. 진영대립의 악폐가 사법부에 이른 듯해 실망스럽고, 판사 성향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 [참성단]방탄소년단과 비틀스
    참성단

    [참성단]방탄소년단과 비틀스 지면기사

    2018년 5월 27일은 한국 대중음악사, 나아가 세계 팝 음악사에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방탄소년단(BTS)의 앨범 'LOVE YOURSELF 轉 Tear'가 빌보드 앨범 200에 당당히 1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영어가 아닌 한국 가사의 노래가, 싱글 차트가 아닌 앨범 차트 1위에 오른 것은 춘향가 중 '쑥대머리'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르는 것 보다 사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7명의 젊은이 정국, 진 , 슈가, 제이홉, 지민, 뷔, RM이 그 누구도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못한 큰 일을 해냈다.1964년 2월 7일이 팝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날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그날, 비틀스가 미국에 첫발을 디뎠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더벅 머리 4인조 폴 매카트니 죤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의 미국 도착으로 전 세계 음악 시장의 판을 다시 짜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불과 두 달 만에 빌보드 싱글 차트 1~5위를 모두 자신들의 곡으로 채우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때부터 비틀스는 단순한 '음악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 됐다.비틀스의 미국 방문은 영국의 많은 뮤지션들이 미국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물꼬를 트는 계기 됐다. 믹 재거의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 난폭한 퍼포먼스의 창시자 더 후(The Who), 뉴캐슬 출신의 애니멀스(Animals) 그리고 에릭 크랩튼, 제프 벡, 지미 페이지의 야드 버즈(Yardbirds)등 영국 출신 가수들이 대서양을 건넜고, 삽시간에 미국 팝 음악계를 석권했다. 언론들은 이를 가리켜 '영국의 침공(British Invasion)'이라고 지칭했다. K팝은 한국에서 만 과소평가될 뿐, 세계적으로는 이미 'K팝 신드롬'이라 할 정도로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세계 팝 시장에 K팝이 새로운 주류로 떠오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방탄소년단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틀스가 빌보드를 석권한 이후 영국 가수들이 미국 시장에서 새로운

  • [참성단]무산 스님 입적
    참성단

    [참성단]무산 스님 입적 지면기사

    조계종 대종사이자 선시(禪詩)의 대가 신흥사 조실 무산 스님이 26일 입적했다. 1968년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받았고, 같은 해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했으니 법랍과 시력이 50년을 꽉 채웠다. 스님 무산은 참선과 보시에 힘썼고, 시인 조오현은 화사한 선풍 가득한 시로 속세를 위로했다.입적 후 언론이 정리한 스님의 행장은 하나같이 막히고 거칠 것이 없는 선사의 풍모로 가득하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월호 유족들을 위로하는 장면을 보고 "고통받는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필요 없다"며 "교황처럼 중생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라"고 절집을 향해 일갈했다. '만해대상'을 제정해 만해 한용운과 백담사를 오늘에 되살린 것도 무산의 업적이다. 신흥사와 백담사에 선원을 세워 사그라들던 선풍(禪風)을 진작했고, 스스로도 말년에 매년 여름과 겨울 석달 씩 백담사 무문관에서 참선에 정진했다.시인으로서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독자를 거느렸다. 천년을 사는 성자도 뜨는 해 지는 해 다본 뒤 알까고 죽은 하루살이 떼에 불과하다는 '천년의 성자'는 참선 끝에 이른 궁극의 경지를 보여준다. "이제 나도 갈 일만 남은 시신입니더.(염장이와 선사)"의 염장이는 부처였고, "산에 살면서 산도 못보고 생 울음소리는 커녕 내 울음도 못 듣는(일색과후)" 중늙은이는 무산이었다. 삼라만상에 맺힌 부처의 얼굴을 용케도 알아보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스님의 선시를 읽은 문인들과 명사들의 독후감을 모아 '이렇게 읽었다 설악 무산 한글선시'를 펴낸 권성훈 시인은 무산을 이렇게 기억했다. "질문을 던지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침묵하면서 말하게 하고 소리가 없는데 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무산이 "밀물 때나 썰물 때 파도 위에 떠 살던(인천만 낙조)" 그 늙은 어부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생전에 "이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적멸을 위하여)"고 작정했으니, 이제 숲에서 만날 벌레 한 마리도 예사롭지 않을 듯 싶다.설악산 백담사와 신흥사를 중심으로 수행하던

  • [참성단]이재명  욕설 파일 공개  논란
    참성단

    [참성단]이재명 욕설 파일 공개 논란 지면기사

    인지 언어학 창시자 조지 레이코프는 저서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에서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프레임(frame)'이라고 주장했다. "전략적으로 짜인 틀을 제시해 대중의 사고 틀을 먼저 규정하는 쪽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며, 이를 반박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프레임을 강화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빨갱이' '위선자'등 상대방 흠집을 내는 네거티브를 끊임없이 전파하면 유권자는 그 프레임 속에 갇힌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 압력을 받은 닉슨 대통령이 TV에 나와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고 연설할 때 이미 '닉슨=거짓말쟁이' 프레임 속에 갇힌 대중은 그 순간, '닉슨은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런 경우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대선 막바지 안철수 당시 국민의 당 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한 것은 'MB 아바타'라는 프레임에 걸렸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프레임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2000년 11월 미국 대선 투표일을 5일 앞두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과거에 음주운전으로 체포된 사실이 폭로됐다. 박빙의 승부를 펼치고 있을 때라 앨 고어 민주당 후보 측은 쾌재를 불렀다. '부시=음주운전'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부시를 공격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시가 먼저 기자들에게 "나는 실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며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 버렸다. 그러자 '부시=솔직'이라는 역 프레임이 형성되면서 고어 측이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한국당이 지난 24일 민주당 이재명 경기지사 후보의 욕설 음성 파일을 당 공식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그런데 뒷맛이 영 고약하다. 새로운 것도 아니다. 6년 전부터 이미 대선, 지방 선거 등 고비 때마다 이 후보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그 파일을 재탕한 정도다. 한국당은 '유권자에게 올바른 사실을 제공해 국민의 알 권리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공개했다'지만 그런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유권자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한국당은 각종 여론 조사에서 남경필 후보가 열세를 보이자 파일을 이용해서 '이재명=패륜'이

  • [참성단]황장엽과 태영호
    참성단

    [참성단]황장엽과 태영호 지면기사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북한을 탈출한 건 1997년 2월 12일이었다. 그는 한때 북한 권력 서열 13위였다. 고위급 인사 망명에 고무된 김영삼 정부는 그에게 부총리급 예우를 해 주었다. 하지만 1년 뒤 정권이 바뀌었다. 김대중 정부는 그가 적극적인 대북 활동을 하는 게 달갑지 않았다. 쓸데없이 북한을 자극해 햇볕정책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까 해서다.김대중 정부의 우려대로 황 전 비서는 김정일의 잔인성을 폭로하고 북한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일에 열의를 바쳤다. 2002년에는 햇볕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를 출간해 김대중 정부로부터 큰 미움을 받았다. 주체철학으로 북한 체제를 설계한 그가 탈북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북한은 그와 가까웠던 가족 친구 제자 등 2천명 이상을 숙청했다. 부인은 자살하고 자식은 반신불수 상태에 빠졌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렸다. 진보 정권 10년 동안 황 전 비서는 사실상의 출국금지 또는 연금 상태였다. 그에게는 10년의 세월이 자신이 꿈꾸었던 통일의 싹이 뿌리째 뽑히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절망의 세월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2010년 10월 안가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생전에 그는 "김정일의 폭정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 보다 진실을 외면하는 일부 남한 사람이 더 문제"라고 늘 걱정했다.2016년 8월 박근혜 정부 시절 망명한 태영호 전 북한 영국 공사가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위원에서 사퇴했다. 최근 그는 증언집 '3층 서기실의 암호'를 출간하고 남남갈등의 가운데 서 있었다. 지난 14일엔 국회에서 출판기념 강연회를 갖고 "김정은은 결코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북한은 "천하의 인간쓰레기들까지 국회 마당에 내세웠다"고 그와 우리 정부를 비난했다. 민주당 김경협 의원은 "태 전 공사가 기자회견 하면서 북한에 대해서 적대적 행위를 내질렀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그를 추방하자는 청원도 올라왔다

  • [참성단]카메라 디스토피아
    참성단

    [참성단]카메라 디스토피아 지면기사

    방송인 이경규를 스타덤에 올린 건 '몰래카메라'다. 1991년 모 방송국 예능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밤에'의 한 코너로 선보이자 마자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난처하게 조작된 상황에 갇힌 유명 연예인들이 벌이는 좌충우돌을 당사자만 쏙 빼고 진행자와 시청자가 한 통속이 돼 깔깔대며 즐겼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최진실을 천사옷을 입혀 공중에 매달거나, 웨이터를 시켜 고현정에게 물벼락을 때린 뒤 그 반응을 수많은 '몰카'로 찍어 편집하는 방식이다.몰카의 선풍적인 반응 덕분에 코너 MC인 이경규는 '일밤' 메인 MC 최수종, 주병진의 인기를 능가했을 정도다. 하지만 언제 당할지 모르는 스타들 사이에선 '몰카 공포증'이 번졌다. 배우 최민식은 봉투에서 출연료를 꺼내 세어보는 장면이 방영된 이후 화장실에서 돈을 세어보는 버릇이 생겼다는 후일담을 남겼다. 지금 같으면 방송사의 갑질로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실제로 몰래카메라 시즌2 (2005~2007)는 가학적 설정이 언론의 도마에 오르고, 민언련 선정 '2007년 올해의 나쁜방송'이라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설정이 아닌 진짜 몰래카메라 시대가 활짝 열렸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카메라 버튼을 누르고, 영상 콘텐츠를 유포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가 낳은 카메라 포비아 증후군으로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홍대 남성 누드모델 몰카'사건 여성 피의자 구속이 계기가 됐다. 경찰이 여성 피의자를 신속하게 구속 기소하자, 여성들이 단단히 뿔났다. 경찰은 혐의자가 특정된 탓이라 변명했지만, 여성들이 분통을 터트린 이유는 몰카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인데, 수많은 남성 가해자 중 극히 일부만 사법처리되는 현실에 있다. 2017년 몰카 피의자 5천437명 중 남성이 5천271명(96.9%)이었고, 2016년은 전체 피의자 4천491명 중 4천374명이 남성이었다. 구속자는 2016년 135명, 2017년 119명에 불과했다.몰카 범죄는 갈수록 은밀해지고 확산일로다. 급기야 최근 인천의 한 학교에서는 여교사의 치맛속을 몰래 찍던 고교생이 현장에서 딱 걸렸다.

  • [참성단]숲으로 간 수원연극축제
    참성단

    [참성단]숲으로 간 수원연극축제 지면기사

    프랑스 아비뇽은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다. 하지만 여름이면 수십만 명이 몰려드는 도시로 변한다. 한 달 동안 진행되는 아비뇽 연극제 때문이다. 덕분에 인근 마르세유, 니스도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말이 연극제지 이젠 장르도 다양해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셰익스피어 연극, 음악, 현대무용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공연 진수성찬'이다.첫술부터 배부른 건 아니었다. 1947년 연출가 겸 배우 장 빌라르가 문화의 부재로 심각한 심적 박탈감을 갖던 프랑스국민을 위해 아비뇽 교황청 앞마당에 무대를 꾸미고 연극 3편을 올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14세기 아비뇽은 교황의 거처였다. 그때 지어진 견고한 고딕 석조 건물인 교황청이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연극제가 시작되면 이곳 안마당 '쿠르 도뇌르'엔 2천석의 대형 공연장이 마련된다. 장 빌라르는 "연극은 고대 그리스 작품처럼 야외극장에서 대규모로 이뤄질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전문가들이 꼽는 아비뇽 연극제 성공 원인은 두가지다. 첫째 연극을 거리로 끌고 나왔다는 것이다. 왕족,귀족 등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던 연극 무대를 과감하게 광장, 거리, 공터로 영역을 넓혔다. 그러니 대중이 환호와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둘째, 아비뇽은 도시 전체가 중세 성벽들에 둘러싸인 도시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분위기가 연극과 궁합이 잘 맞았다. 무대만 만들면 모든 곳이 천연 공연장이었다. 조명과 성곽의 조화는 아비뇽 연극제 성공의 밑바탕이었다.영국 에딘버러 축제도 마찬가지다.수원연극축제가 오는 25일부터 3일간 열린다. 장소는 매년 열리던 화성 일대가 아닌, 서둔동 옛 서울대 농생대 부지 '경기 상상 캠퍼스'다. 장소 변경의 표면적 이유는 '미세먼지와 더위' 때문이라고 한다. 수원연극축제는 1996년 첫 선을 보였다. 중간을 건너 뛴 해도 많았고 명칭도 들쭉날쭉이었다. 어느 해에는 '세계 연극제'라는 타이틀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연륜이 22년이 됐음에도 '개성없는 연극축제'라는 눈총을 받았다.

  • [참성단]부처님 오신 날
    참성단

    [참성단]부처님 오신 날 지면기사

    보리수 아래에서 마침내 득도한 석가모니. 중생들에게 불법을 전하려 세상에 나선다. 그 길에 처음 만난 중생이 그의 비범한 안색을 살피더니 물었다.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석가모니의 답이 이랬다. "나는 일체에 뛰어나고 일체를 아는 사람/ 무엇에도 더럽혀짐 없는 사람/ 모든 것을 버리고 애욕을 끊고 해탈한 사람/ 스스로 체득했거니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 하랴/ 나에게는 스승 없고, 같은 이 없으며/ 이 세상에 비길 자 없도다./ 나는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 나 홀로 정각(正覺) 이루어 고요하다./ 이제 법을 설하려 가니/ 어둠의 세상에 감로의 북을 울려라." 선각자의 사명으로 중생 제도(濟度)에 나선 석가모니의 출사표로서 부족함이 없다.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지 60년 뒤인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중국으로부터 불상과 경전을 받아 불교를 공인하면서 한반도 불교역사가 시작됐다. 기독교가 예수 부활 이후 급속하게 서방세계를 점유한데 비해, 기원전 5~6세기 무렵에 탄생한 석가모니의 불교는 거의 천년만에 동방의 끝자락에 다다른 셈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공간적 차이와 개인수행을 중시하는 불교의 소극적 포교방식이 원인 아닐까 짐작해본다. 대기만성인가. 전래는 늦었지만 한반도의 불교는 삼국의 문화를 꽃피웠고, 고려의 호국종교로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수많은 유무형 문화유산을 이 땅에 남겼다.지금도 한국인은 불교의 영향권에서 생활한다. 건달, 식당, 강당, 이판사판, 야단법석, 다반사, 불가사의 등 흔히 쓰는 일상어가 불교에서 유래됐다. 산에 올라 절밥 공양받아 본 등산객이 드물지 않을테고, 호젓한 산사에서 세속의 번뇌를 놓아 본 사람들도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불법의 오의(奧義)를 깨친 선승들의 에피소드는 이문을 따지는 속세에 지친 중생들에게 언제나 통쾌하다. 평생을 삼의일발(三衣一鉢:가사 세 벌과 바리때 1개)로 수행에 정진한 청담은 도반인 성철을 "팔만대장경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불교에서는 불법을 깨달아 열반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는 삼독(三毒)으로 탐(貪-욕심)·

  • [참성단]LG 구본무 회장 별세
    참성단

    [참성단]LG 구본무 회장 별세 지면기사

    옛날 경남 진주에 구(具) 씨와 허(許) 씨가 살고 있었다. 구씨는 장사 수완이 좋았고 허씨는 만석꾼 집이었다. 이들은 의기투합해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창업 이념은 첫째도 인화(人和) 둘째도 인화(人和) 셋째도 인화(人和)였다. 영업에 강한 구씨와 숫자에 밝았던 허씨의 조화로 기업은 승승장구, LG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렇게 시작된 두 가문의 동업은 고 구인회-고 허만정, 구자경- 고 허준구, 구본무(LG회장)- 허창수(GS 회장)에 이르기까지 68년간 지속됐다. 구씨와 허씨의 회사 분리는 부자간·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일상화 된 우리 기업들에 회자 될 만한 모범 사례를 제시했다. 회사 하나 더 갖겠다는 잡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너 리스크 무풍지대 LG'라는 말도 이때 나왔다. LG LCD 설립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네덜란드 필립스사의 크리스털 리 전 회장은 LG에 16억 달러를 투자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한국에 투자를 결정하면서 파트너를 찾기 위해 모든 기업을 둘러봤지만 구씨와 허씨가 50년 이상 동업자로서 아무 잡음 없이 경영하는 걸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는 기업이 양보와 타협, 신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구본무 회장은 "동업은 결혼과 같은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전혀 다른 남녀가 함께 사는 것처럼 동업자도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양보와 타협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LG그룹의 경영을 논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정도(正道)경영'이다. 구인회 창업 회장은 도박이나 술 등 사행성 산업은 물론 '먹고 마시는 것'과 연관된 소비성 사업, 부동산투자 사업을 엄격히 금지했다. 구본무 회장도 "아무리 어려워도 목적 달성을 위해 편법을 동원하는 모럴 해저드에 빠져선 안된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정도경영'을 해야 한다"고 임원들에 늘 당부했다. LG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든 구본무 회장이 20일 만 73세로 별세했다. 구 회장은 생전 "인재 발굴 육성이야말로 기업의 가장 큰 책무"라고

  • [참성단]선거가 사라졌다
    참성단

    [참성단]선거가 사라졌다 지면기사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 미당 서정주가 23세 때 쓴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자화상'의 한 구절이다. 시가 발표된 건 1935년. 벌써 8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 시를 읽으면 한줄기 찬바람이 가슴 속을 쏴~하며 지나가는 느낌이다. 바람이 키운 것은 비단 젊은 시절의 서정주 시인 뿐 만이 아니다. 25세의 윤동주를 통절하게 반성케 하고 괴롭히면서 정신적 성숙을 가져다준 것도 '잎새에 이는 바람'이었다. 시에서 바람은 희망이 되기도 때론 시련의 빛깔로 나타나기도 한다.적벽대전의 승패를 가른 결정적 요인도 바람이었다. 촉의 방통이 조조를 속여 위의 배들을 쇠사슬로 연결하는 '고리를 잇는 계책', 이른바 '연환계(連環計)'를 썼다. 208년 동짓날, 제갈공명이 예측한 대로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거세졌다. 그 때 화공(火攻)을 펼치자 조조는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누가 뭐래도 바람하면 선거판이 빠질 수 없다. 바람 없는 선거는 상상할 수 없다. 요즘은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바람을 탄다고 한다. 선거 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호재를 찾아 SNS를 들락거린다. 선거를 앞두고 터지는 사건에 바람 풍(風)자를 붙이는 것도 바람이라도 타서 승리하고 싶은 정치인들의 간절한 '바람'에서 비롯됐다. 안기부가 김대중 후보의 낙선을 위해 '흑금성'이 저지른 공작정치 북풍(北風), 국세청장이 대기업 23곳에서 대선자금을 모금해 이회창 후보 측에 넘긴 세풍(稅風),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후 치렀던 총선은 탄핵 역풍, 즉 '탄풍(彈風)'이었다. 선거판의 바람은 마침내 역사까지 바꿨다.6·13 지방 선거가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는데 선거 바람이 좀처럼 불지 않고 있다. 선거를 치르는 게 맞나 싶을 정도다. 아예 사라진 느낌도 든다. 세월호 침몰사고 여파로 유례없이 조용했던 2014년 6·4 지방 선거를 닮았다. 당시 집권당은 역풍을 맞을까 대놓고 선거를 치르지 못했다. 지금은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