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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이종욱 박사와 WHO 사무총장 지면기사
고(故) 이종욱 박사는 지난 2003년 1월 제6대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에 당선됐다. 벨기에와 멕시코 후보를 물리쳤다. 당시까지 한국인으로서 국제기구에 진출한 최고위직 인사다. 건축학을 전공했다 다시 의대를 진학해 국내 한센인을 돌봤다.에이즈 퇴치에 큰 성과를 보여 '백신의 황제'로 불렸다. 비행기 일등석을 타지 않았고, 소형 하이브리드 차로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볐다. 빌 게이츠는 그의 재임 시절 7억5천만달러(약 9천160억원)를 지원했다. 왕성한 활동과 겸손한 태도로 존경받았으나 2006년 과로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그는 전략보건운영센터를 만들어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30분 안에 관계자가 모여 회의를 열 수 있도록 했다. 공식 명칭은 '이종욱 전략보건운영센터(JW Lee Centre for Strategic Health Operations, 약칭 SHOC)'로, '워룸(War Room)'이라 불린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신종플루,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발병 때 존재감을 드러냈다. 코로나 19 창궐 이후 WHO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주목받는 센터다. 전 세계 감염병 정보를 모아 즉시 대응전략을 세울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일본 산케이(産經)신문이 지난주 WHO 정상화를 위해 일본인 사무총장을 배출하자는 엉뚱한 주장을 했다. "7개국(G7)은 차기 사무총장 선거에 후보를 내세워 WHO 정상화를 해야 한다. 일본이 사무총장을 내는 것도 유력한 선택지"라는 거다. 그러면서 "이미 차기 사무총장 선거에 한국이 '코로나 대책에서 세계적인 평가를 얻었다'며 후보자를 내려는 움직임이 전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무총장 임기가 2년이나 남은 시점에 생뚱맞은 보도를 하게 된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대한민국과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이 타깃(Target)이다.비록 일본 우익의 도발이지만 양국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나쁜 기사'다. 팬데믹을 막아내려면 국가 간 공조체제가 구축돼야 한다. 대한민국이 코로나 확산을 효과적으로 막는다고 일본의 국격이 낮아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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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박치기왕' 김일 지면기사
누구나 가슴속에 스포츠 영웅 한 명쯤은 담아두게 마련이다. 내 경우는 프로레슬러 천규덕이다. 대부분 '박치기왕' 김일을 좋아했지만, 검정 타이즈를 입고 당수를 날리던 곱슬머리 천규덕이 그때는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레슬링대회가 열렸다. 김일이 출전하지 않은 걸 보면 A급 대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국적불명의 타이거 마스크와 천규덕이 한판 붙었다. 물론 천규덕이 이겼다. 날카로운 당수에 타이거 마스크는 꽁무니를 빼기에 바빴다. 선수 대기실 앞에서 기다리던 내게 천규덕은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며 사인을 해 주었다.김일은 천규덕과 함께 60, 70년대 박치기와 당수로 국민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주며 한국 프로레슬링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우리 시대의 영웅들이었다. 김일 레슬링이 있던 날이면 우리는 만화가게로, 그도 여의치 않으면 동네에서 유일하게 TV가 있던 기봉이에게 온갖 아양을 떨며 구걸 시청을 하기도 했다.'박치기왕' 김일은 1929년 전남 거금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56년 일본에 있던 역도산을 찾아가 '오오키 긴타로'라는 일본명으로 프로 레슬링에 입문했다. 김일은 '왕 주걱턱' 안토니오 이노키, 장신 자이언트 바바와 함께 역도산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이들은 1970년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명승부를 펼쳤다. "레슬링은 쇼!"라는 장영철의 폭탄선언이 있기 전까지 프로 레슬링은 우리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스포츠였다.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잊게 해주는 청량제였다.하지만 '쇼'로 밝혀지면서 프로레슬링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김일도 천규덕도 우리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졌다. 우리의 낭만도 사라져 갔다. 이후 김일은 경기 후유증으로 인한 지병으로 10여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2006년 77세의 나이로 영면했고, 2016년에서야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 헌액됐다. 최근 김일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된다는 소식에 까맣게 잊고 있던 김일과 프로레슬링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호랑이와 삿갓, 곰방대가 그려진 흰 가운을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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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경매에 나온 간송 소장품 지면기사
건실한 중소 중견기업들이 상속세를 내기 위해 가업 승계를 포기하고 회사를 매각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영권까지 상속할 경우 할증세율이 더해 최고 65%에 달하는 상속세는 기업들에 너무 큰 부담이다. 가령 100억원짜리 기업을 상속받을 경우 최고 65억원의 세금을 내야 한다. 이는 프랑스의 11.25%, 독일의 4.5%, 벨기에의 3.5%보다 턱없이 높은 수준이다. 물론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는 가업상속공제 제도가 있다. 문제는 회사 경영을 심각하게 간섭받을 정도로 조건이 까다로울뿐더러, 이 제도를 활용하면 업종 전환을 할 수 없는 제약이 있다는 게 문제다.상속세 폭탄 때문에 국내 중소·중견기업의 창업주들은 가업을 물려줄 것인지, 매각할 것인지를 두고 늘 고민한다. 대만처럼 중소기업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세계 최고 기술을 보유한 중견기업들이 인수합병 (M&A)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다. 가령 종묘업체 농우바이오나 밀폐용기 국내 1위였던 락앤락, 세계 콘돔시장의 40%를 점유했던 유니더스, 중견 가구업체 까사미아 등도 상속세 폭탄을 피하지 못해 경영승계의 뜻을 접고 모두 매각된 경우다.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인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국·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보물 284호 '금동여래입상'과 285호 '금동보살입상'이 경매에 나왔다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문화계가 술렁이고 있다. 1938년 서울 성북동에 보화각 (간송미술관 전신)이 문을 연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 문화계가 받은 충격은 너무도 크다. 보물급 문화재가 경매에 나온 이유가 지난 2018년 간송 전형필의 장남 전성우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타계하면서 자손들에게 부과된 거액의 상속세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파문은 일파만파다.현재 간송미술관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국정운 등 국보 12점을 비롯해 보물급 유물 5천여점을 보유하고 있다.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을 때 막대한 개인재산을 털어 우리 문화재의 해외 유출을 막은 이가 간송 전형필이다. 간송가(家)를 가리켜 '민족문화의 수호신'이라 부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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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학교 가는 길 지면기사
"할매 어디 가?/ 펭생핵교 간다. 잘 놀고 있어라잉/ 펭생핵교? 거기 가선 뭘 해?/ 가나다라도 배우고 일이삼사도 배우제/ 흰 머리 곱게 빗고 엉덩이 가방 메고/ 우리 할매 신나게 펭생핵교 갑니다."문삼석 시인의 '펭생핵교'란 시다. 펭생핵교(평생학교)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니지 못한 노인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만든 배움터다. 설레는 등굣길, 할머니와 손자가 나누는 구수한 대화가 정겹기만 하다. 역시 사투리에는 표준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성이 깃들어있다.'펭생핵교' 만큼이나 등굣길을 즐겁고 재미있게 표현한 음악은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이 작곡한 '학교 가는 길'이 아닌가 싶다. 밝고 경쾌한 멜로디가 친구들과 장난쳐가며 학교로 향하는 개구쟁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때문인지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곡으로 꼽힌다.하지만 학교 가는 길이 이처럼 신나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2014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학교 가는 길'에서는 히말라야의 칼바람만큼이나 가슴 시린 등굣길이 소개된다. 히말라야 라다크지역의 오지마을 주민들이 1년에 단 한번 열리는 얼음길인 '차다'(chaddar)를 건너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는 10일간의 여정을 담은 다큐다. 20㎏이 넘는 짐을 등에 멘 아버지들은 영하 20도의 강추위 속에서 아이를 보듬으며 이 길을 걷는다. '차다'를 지나기 위해서는 바지를 벗은 속옷차림으로 얼음이 깨진 강을 건너야 하고, 목숨을 걸고 벼랑을 타야 한다.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올 때마다 "나 같으면 학교 안 다니고 만다"란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올 지경이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라는' 말로는 부족한 경이로운 교육열이다.20일 고3 학생들의 등교를 시작으로 학교 가는 길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그 길이 '펭생핵교' 가는 길이나 흥겨운 선율의 '학교가는 길'이 아닌 히말라야의 얼음길과 닮아 있다. 한마디로 험난하고 위험한 길이다. 그래도 얼음길 '차다'의 끝에는 희망의 상징인 학교가 있었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얼음강 건너니 낭떠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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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이팝나무 지면기사
처음엔 "나이 들면 보이지 않았던 것도 보이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보름 전 하얀 떡가루가 나무 위에 살포시 올라앉아 있어 마치 눈을 뒤집어쓴 형세를 하는 낯선 나무를 보면서다. 저게 뭐지? 저런 나무도 있었나? 알고 보니 이팝나무였다. 수십 년을 걸었던 길에 어느 날 생판 처음 보는 나무가 서 있었다. 눈꽃이 핀 것 같은 묘한 이 나무가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꽃이 눈에 보이니 늙었구나!"라고 자조를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팝나무는 이미 몇 해 전부터 거기에 있었다. 내가 무심했던 거였다.식물 사전은 이팝나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나라의 남부 지방에서 자라는 낙엽송 교목으로 물푸레나뭇과에 속하는 식물. 주요 분포지는 전라도·경상도 등 남부 지방이며, 해안을 따라서는 서쪽으로는 인천까지, 동쪽으로는 포항까지 분포한다.' 그런데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중부지방 내륙이다. 사전이 맞는다면 이팝나무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엔 온통 이팝나무 천지다. 공원에도 대로에도 산에도 들에도 '쌀밥'나무가 어원이라는 이팝나무가 왜 이리도 많은 것일까. 무엇보다 작물재배한계선을 무너뜨린 기후 온난화의 영향이 컸다.이제 '5월의 꽃'으로 자리 잡은 이팝나무에도 슬픈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며느리밥풀꽃'설화와 비슷하다. 며느리가 제사상에 올릴 밥을 짓다가 뜸이 잘 들었는지 확인하려고 밥알 몇 개를 입 안에 넣었다고 한다. 우연히 이를 목격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제삿밥을 먼저 먹은 줄 알고 혼을 내고 쫓아냈다. 억울했던 며느리는 뒷산에서 목을 매 죽었고, 이듬해 며느리가 묻힌 무덤가에 나무가 자라더니 흰 꽃이 가득 피었다고 한다. 전국 각 지자체가 조경용으로 이팝나무를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미세먼지를 줄이는 수종에 성장 속도도 빠르지 않고. 금세 꽃이 지지 않는 게 이유다. 특히 낙엽이 많아 치우기 번거로운 은행나무와 10년이 지나면 뿌리가 보도블록을 들어 올려 보행자 위협이 되는 단풍나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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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대모잠자리' 지면기사
지금이야 도심에서 마주치기 어렵지만 한 세대 전만 해도 잠자리는 지천에 널린 곤충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방학숙제였던 곤충채집의 단골 표본도 잠자리였다. "어지럼 뱅뱅 날아가는 고추잠자리/아마 나는 어린가봐 그런가봐. 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싶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히트한 이유도 잠자리를 통해 어머니를 엄마로 불렀던 아스라한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매력 때문일 게다.한자로 젊은 처녀, 청낭자(靑娘子)인 잠자리를, 동의보감은 탁월한 정력제로 추천하고 있다. 여색을 밝힌 연산군이 즐겨 먹었다니 터무니 없는 처방은 아닌 모양이다. 여인의 고운 옷 맵시를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일 정도로 잠자리 날개는 투명하고 연약하다. 잠자리는 그 연약한 네 개의 날개를 따로 움직여 최고의 비행술을 자랑한다. 급선회, 급강하, 급상승은 물론 후진비행도 가능하다. 시 '청령(잠자리)'에서 이상은 "몸과나래도가벼운듯이잠자리가活動입니다./헌데그것은果然날고있는걸까요"라고 했다. 시적 은유와는 별개로, 잠자리의 호버링(제자리 비행)에서 착상한 작품이지 싶다. 헬리콥터를 잠자리 비행기라고 했으니, 잠자리가 불쾌했겠다.잠자리는 모기의 천적으로 대표적인 익충이다. 모기라면 유충이건 성충이건 가리지 않고 포식하는데, 왕잠자리 성충은 하루에 수백마리의 모기를 먹어치운다고 한다. 여름철 잠자리떼가 비행 중이면 모기 박멸 작전 중이니 방해하면 안된다.잠자리 하면 보통 고추잠자리를 생각하지만 한반도에만 총 11과 58속 123종이나 분포한다. (우포잠자리나라 참조) 아직도 방학숙제를 감당할 정도의 개체수는 유지 중이지만, 드물게 멸종위기종도 있다. 최근 시흥 보통천과 갯골 유역에서 환경부가 지정한 2급 멸종위기 야생생물인 대모잠자리 유충과 성충이 동시에 발견됐다고 한다. 국내서식 곤충류 1만8천여종 중 멸종위기 야생생물은 26종 뿐이다. 대모잠자리 서식지 보호를 위한 시흥시와 경기도의 대책이 시급하다. "아이들 잠자리채에 대모잠자리가 잡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이용성 환경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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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5·18 40주년 지면기사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는 화해와 소통으로 흑백 인종 간 갈등을 극복하는 남아공화국 만델라 대통령의 리더십을 감동 깊게 그린 영화다. 만델라는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다가 무려 27년간 악명높은 로벤섬 교도소에 투옥돼 극심한 고초를 당해야 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후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백인 유화정책을 밀고 나갔다.영화는 백인들로 구성된 남아공화국 럭비팀 '스프링 복스'를 통해 만델라 대통령이 자신을 핍박한 백인들을 어떻게 용서하고 어떻게 화해를 했는지 진지하게 묻는다. 이는 '복수'라는 날카로운 칼 대신 '관용'이라는 부드러운 표용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화에서 자신의 측근이 지나치게 백인을 우대한다고 하자 만델라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는 영혼을 해방 시키고 공포를 없애주지. 그래서 강력한 무기인 걸세. 자네도 노력해보게."만델라와 어깨를 견줄 대통령이 또 있다. 바츨라프 체코의 하벨 대통령이다. 그는 청춘을 체코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바쳤다. 그 역시 공산독재 군력자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받았다. 민주화가 되면서 하벨은 국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국민들의 관심은 하벨의 '복수'의 칼날이 어디로 향하는지였다. 하지만 그는 용서와 관용을 택했다. 이런 그를 향해 정치적 미숙함이라고 비난한 국민도 있었지만, 그는 용서와 화합으로 체코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하벨을 '동유럽의 만델라'라고 부른다. 대통령의 자리를 떠날 때 그는 이런 퇴임사를 남긴다. "저에게 실망한 국민, 저의 행동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던 국민, 그리고 저를 미워했던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그를 비난한 국민은 없었다.오늘은 5·18 40년이 되는 날이다. 이미 강산이 4번 변했지만, 광주는 아직도 '진행 중'이고 ,'화해'와 '용서'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다. 40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제 이쯤 됐으면 '광주의 아픔'을 극복할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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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아프리카의 탄식 지면기사
동네 형들 따라 메뚜기를 잡으러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들판만 나서면 메뚜기가 흔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른 후 잡은 메뚜기를 넣고 불을 높이면 메뚜기들이 요란을 떨었다. '투둑 투둑' 거리던 그 소리와 감촉은 지금도 손끝에 생생하다. 물론 맛은 좋았다. 하지만 TV '주말의 명화'에서 '대지'를 본 후, 더는 메뚜기를 먹지 않았다. 아니 먹지 못했다. 시드니 프랭클린 감독의 1937년 작으로 기억되는데 하늘을 온통 덮은 메뚜기와 곡식을 갉아 먹는 메뚜기의 모습을 클로즈업 한 장면이 어린 나이에 너무 충격적이고 무서웠기 때문이다.실제 메뚜기가 한데 몰려다니면 현실은 영화보다 더 끔찍하다. 영화의 원작인 펄 벅의 소설 '대지'는 메뚜기 떼의 습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검은 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걸치더니 이윽고 부채꼴로 퍼지면서 하늘을 까맣게 덮었다. 세상이 밤처럼 캄캄해지고 메뚜기들끼리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내려앉은 곳은 잎사귀 하나 없는 황무지가 됐다.'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며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이 메뚜기가 3∼6개월가량을 살면서 한 해 동안 4세대까지 번식을 이어가는 악명높은 '사막 메뚜기'다. 세대가 내려갈 때마다 그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처음보다 10배가량 숫자가 불어난다.사막 메뚜기떼는 아프리카에서 빈번하게 발생해 1천억 마리가 떼 지어 이동한다. 특히 최근 2년간 폭우가 내렸고 고온다습했던 이상 기후가 사막 메뚜기 떼가 번식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 메뚜기떼의 출현 경로는 아직 명확지 않다. 건조한 사막에 비가 내린 후 땅속 메뚜기 알이 부화해 순식간에 개체 수가 늘어나면서 바람을 타고 하루 150㎞ 이동한다. 한 무리가 출몰하면 하루에 3만5천명분의 식량을 먹어 치운다.지난해 말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케냐 등 3개국을 초토화한 사막 메뚜기떼의 2차 습격이 시작돼 아프리카가 극심한 공포에 떨고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고통을 겪고 있는데 또 다른 악재가 발생한 것이다. 메뚜기 떼는 1차습격 때처럼 중동과 파키스탄을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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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타이슨 & 홀리필드 지면기사
복싱계 최대의 라이벌 마이크 타이슨과 에반더 홀리필드가 연출한 장면들이다.#장면1: 1997년 타이슨과 홀리필드의 리매치로 치러진 WBA 헤비급 타이틀전. 화끈한 인파이터와 노련한 아웃복서의 수준 높은 경기가 될 것이란 예상을 뒤엎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홀리필드의 지능적인 헤드버팅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타이슨이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은 것이다. 타이슨의 별명이 '핵주먹'에서 '핵이빨'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세간에는 타이슨이 홀리필드의 귀 살점을 삼켰다는 끔찍한 말까지 나돌았다. 일부 시청자들은 "스포츠 경기를 보려 했지 야수를 보려 한 게 아니다"라며 방송사 등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타이슨은 자격정지와 함께 수십만 달러의 벌금을 냈다. #장면2: 2009년, 당시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던 '오프라 윈프리쇼'에 두 '앙숙'이 나란히 출연했다. 방송에서 타이슨은 홀리필드에게 사과를 했고 홀리필드는 흔쾌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둘은 악수와 포옹까지 하면서 12년 만에 앙금을 털어냈다. 물론 '방송용'이 아니냐는 의혹과 함께.#장면 3: 앞서 제기된 의혹을 불식시킬만한 장면이다. 방송 출연 후 몇 년 뒤, 타이슨이 홀리필드 저택의 초인종을 누른다. 홀리필드가 문을 열자 타이슨이 "미안해, 에반더!"라며 작은 선물상자를 내민다. 홀리필드가 내용물을 꺼내 들며 놀란 표정으로 "내 귀잖아?"라고 말하자 "내 입안에 남아있던 걸 챙겨뒀었어"라는 타이슨의 말이 이어진다. 홀리필드는 두 팔을 벌려 타이슨을 맞이하고 둘은 '격하게' 껴안는다. 사실 홀리필드의 귀는 경기 직후 봉합수술을 받아 멀쩡하다. '장면 3'은 미국의 한 쇼핑몰 광고영상이다. 자본주의의 힘은 '숙원'(宿怨)을 '상품'(?)으로 승화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타이슨 VS 홀리필드'보다는 '타이슨 & 홀리필드'라는 표현이 둘에게 더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장면 4: 장면 4는 아직 개봉박두다. 54세의 타이슨과 58세의 홀리필드가 링 위에서 다시 맞붙는 장면이다. 외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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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스카이 72의 운명 지면기사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은 1921년 6월 21일 문을 연 효창원 골프장이다. 소나무가 멋지게 우거져 있던 조선왕실 묘역 효창원을 빙 둘러 9홀 골프장을 조성했다.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던 일제의 의도가 분명했다. 하지만 총 길이가 2천322야드에 불과해 행인이 공을 맞기 일쑤였다. 또 조선 왕실묘소에서 일본인들이 골프채를 휘두르는 모습에 여론도 우호적이지 않아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후 1924년 7월 원산 송도원 골프장이, 1924년 8월 대구 외곽 비파산 기슭에 대구골프장이 개장했다.최초의 18홀 정규 규모 골프장은 1930년 6월 문을 연 경성골프구락부. 영친왕이 현 광진구 군자리 부지 30만평을 무상 임대하고, 건설 비용을 모두 지원했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됐다가 1954년 7월 재개장하면서 6천750야드(파72) 국제 규모 골프코스를 조성하고 이름도 서울컨트리클럽으로 바꿨다.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 장교들이 주말마다 골프를 치기 위해 일본 오키나와로 가자 이를 유치하기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958년 6월 최초의 프로 골프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다.인천공항 제5 활주로가 영종도 스카이 72 골프장 자리에 들어서게 되면서 바다 코스(54홀)가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골프장 스카이72는 2002년 토지 소유주인 인천공항공사와 2020년 말까지 토지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 스카이72는 2005년 문을 연 뒤 수도권 최대 골프장으로 성장했다. 연 40만명이 찾아 인천의 지역경제 발전에도 한몫했다. 특히 이번에 사라지는 바다 코스내 오션코스는 2008년부터 2018년까지 11년간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대회가 열린 명문코스.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골프장이 폐쇄돼 자취를 감추거나 일부 흔적만 남아 추억만 깃들어 있는 곳들이 많다. 전쟁으로, 또는 도심이 팽창하면서 학교, 공원 부지 등으로 바뀌면서 많은 골프장이 폐장했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옮기면서 그곳에 있는 관악골프장이 사라지고 대신 1971년 화성 동탄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리베라CC로 바뀌었다. 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