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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블랙 아이스 시국(時局) 지면기사
지난 14일 상주-영천고속도로 상·하행선에서 최악의 블랙 아이스(Black Ice)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고속도로 교량 인근 상·하행 차선에서 차례로 블랙 아이스에 미끄러진 차량 50여대의 연쇄추돌로 7명이 숨지고 32명이 다쳤다. 블랙 아이스 교통사고로는 2011년 12월 24일 발생한 논산천안고속도로 104중 추돌사고가 규모는 컸지만 사망자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번 사고는 최악의 블랙 아이스 참사다.블랙 아이스는 눈, 비, 습기가 도로 면에 얼음막으로 코팅된 현상이다. 투명한 얼음막으로 인해 육안으로는 정상적인 도로와 구별이 힘들다. 산기슭 그늘, 교량 상부, 터널 진출입로 등 도로 구조와 지형에 따라 영상의 기온에도 형성되기 때문에,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두터운 빙판길이나 눈길 보다 훨씬 위험하다. 눈길보다 6배나 더 미끄럽고 제동거리는 최대 9배까지 길어져 블랙 아이스에서 미끄러지면 속수무책이다. '도로 위 암살자'라는 무시무시한 별칭은 허언이 아니다.차량의 안전 장치가 작동불능에 빠지고 운전자의 의지가 무력해지는 도로 위 블랙 아이스 현상에서 위태로운 현 시국을 연상하면 무리일까. 지금 대한민국이 도처에 잠복된 블랙 아이스 위를 질주하는 자동차와 같다는 걱정을 지울 수 없는 시국이다.문재인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은 한반도 평화 외교는 북·미간의 날 선 신경전으로 위태롭다. 북한과 미국이 동시에 문 대통령의 평화의지를 무시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북을 향한 애정과 인내의 가속페달에서 발을 내려놓을 기미가 없다. 최저임금, 주5일 근무제 과속으로 소득주도성장 경제는 비틀거린다. 더불어민주당은 패스트 트랙에 태운 선거법, 공수처법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 누더기 선거법은 통과되든 안되든 과속의 후유증이 심각할 것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초보 권력의 맹목적 질주로 망가졌다. 오만한 정권과 무능한 야당이 곳곳에 깔아 놓은 블랙 아이스 위에서 안보, 외교, 경제, 정치가 한꺼번에 추돌한다면, 상상만으로 끔찍하다.대한민국 운전대를 잡은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블랙 아이스 방어운전 태세로 전환하길 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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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구자경 회장과 기술입국 지면기사
이병철, 정주영,구인회 등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재계 1세대가 '산업보국(産業報國)'으로 한국 경제의 기초를 세웠다면, 이건희 정몽구 구자경으로 대표되는 재계 2세대는 '기술입국(技術立國)'으로 우리 경제 성장을 견인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자는 생전 "국가가 살아야 기업도 산다"는 '산업보국'을 늘 가슴속에 간직했다. 물자 생산과 고용 창출, 납세로 어떻게든 국가에 도움이 되자는 것이었다. 구인회 LG 창업자 기업이념도 '산업을 일으켜 나라에 보답한다'였다. 현대의 정주영 회장도 "임자 해봤어?"라는 명언을 남기며 위기 때마다 조선, 자동차 등 신사업을 통해 수출 한국을 창조했다.이제 한강의 기적을 이끈 재계 1세대는 거의 세상을 떠났다. 구인회 LG 창업 회장(1969년),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1987년), 최종현 SK 창업 회장(1998년)은 2000년 전 별세했다.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2001년, 대한항공 창업주인 조중훈 한진 회장은 2002년 그리고 며칠 전엔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타계했다.이들의 유지를 받든 재계 2세대는 선친의 기업에 기술을 입혀 더 강하게 키웠다는 특징이 있다. 삼성 이건희, LG 구자경, 현대 정몽구 회장이 그런 경우다. 특히 LG 구자경 명예회장은 1995년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기술입국'과 '인화'를 최고의 경영가치로 삼으며 그룹을 이끌었다. 이는 전자, 화학산업이 LG의 간판 글로벌기업이 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국내 최초로 해외 생산공장 설립을 주도하고 외국기업과 합작 경영을 추진한 것도 구 명예회장이었다. 특히 금성사(현 LG전자)가 1982년 미국 앨라바마주 헌츠빌에 세운 컬러 TV 생산공장은 우리 기업의 첫 해외 생산기지다. 이는 LG가 글로벌기업으로 나가는 기초가 됐다. LG트윈스가 프로야구에 새바람을 일으킨 '자율야구'는 구 명예회장이 주창한 '자율과 책임경영'에서 비롯됐다.구자경 LG 명예회장이 14일 94세 일기로 별세했다. 이제 재계 2세대는 병상에 있는 삼성 이건희 회장과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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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용인 한국 민속촌 지면기사
유럽 도시의 구시가지는 민속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독일 로텐부르크, 영국 체스터, 에스토니아 탈린에 가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을 받는다. 풍경도 그렇지만 놀라운 건 그런 도시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어린이와 학생들이 많다. 이웃 일본도 마찬가지다. 민속마을이 잘 조성된 것은 물론이고, 그곳 역시 아이들로 북적댄다. 어린이들은 그곳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고 미래의 방향을 찾는다.안동에 가면 들르는 곳이 하회마을이다. 하회마을은 낙안읍성마을, 아산 외암민속마을과 함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마을 중 하나다. 낙동강 줄기가 마을을 휘감아 흐르고,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곳은 연꽃이 물 위에서 피어난 듯한 지형이라 해서 '연화부수형'으로 불린다. 양진당 등 고택이 운치를 더하고, 골목골목 투박한 토담과 포장되지 않은 언덕길은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마저 든다.보릿고개를 넘기고 이제 막 밥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만한 1974년, 경부고속도로 신갈IC에서 멀지 않은 용인 기흥 보라리에 한국민속촌이 문을 열었다. 조성 당시 막대한 국비가 지원됐다. 민속촌을 통해 우리 조상이 살던 터전과 생활 모습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전통문화를 알리는 교육적인 목적이 컸다. 볼거리가 없던 시절이라서 그런지 개장되자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학생들은 누구나 한 번쯤 소풍장소로 이곳을 찾았다. '촬영협조: 한국민속촌'이란 문구가 익숙할 만큼 드라마, 영화 등 모든 시대극은 이곳에서 찍었다. 민속촌은 에버랜드와 함께 용인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부상했다. 지난해에만 130여만명이 민속촌을 찾았다.한국민속촌이 용인을 떠난다는 보도가 나왔다. 65만9천여㎡ 부지의 반을 용인시에 기부하고 나머지 부지 개발에 따른 사업성 검토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미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민속촌은 주말이면 방문 차량으로 도로가 몸살을 앓는 등 각종 민원이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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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대우맨 지면기사
기업이나 상품 등 어떤 조사대상의 이미지를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인화 기법'이라고 한다. 조사대상에서 떠오르는 성별, 연령, 옷차림 등에 관한 이미지를 취합해 하나의 인물형으로 도출해 내는 기법을 말한다. 가령 와인 강사들이 떫은 맛, 신맛, 단맛 등 각기 다른 맛의 와인을 소개하면서 '마초형'에서 '청순가련형'에 이르기까지 개성이 뚜렷한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또한 일종의 의인화기법이라 할 수 있다.2003년 한 채용정보업체가 이 기법을 통해 당시 국내 6대 그룹에 대한 이미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 결과, '삼성맨'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많은 이들이 '30대 초반으로 큰 키에 지적이고 세련된 전문직 남성'이 연상된다고 응답했다. '현대맨'에 대해서는 '40대 초반의 뚱뚱한 체형으로 투박하고 유행에 둔감한 생산직 남성'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물론 16년 전의 조사 결과인 만큼,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그렇다면 '대우맨'의 이미지는 어떨까? 대우그룹은 해체된 지 몇 년 지난 터라, 당시 조사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하지만 '대우맨'의 이미지는 어떤 형태로든 분명 존재했을 시기였다. 개인적으로는 '대우맨' 하면, '나이답지 않게 의리를 중히 여기는 중년남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의~리!'라는 말을 유행시킨 한 영화배우보다는 좀 더 묵직한 캐릭터다. 이러한 이미지가 각인된 것은 지난 2014년 경인일보와 인천경영포럼이 주최한 조찬강연회에서다. 이 강연회의 강사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김 전 회장과 한솥밥을 먹던 많은 이들이 행사장을 찾아 김 전 회장을 보필(?)하는 모습이었다. 그룹이 해체된 지 15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대우맨'들에게 그는 여전히 '회장님'인 듯했다. 공교롭게도 그날 강연 제목은 '사람을 키워야 미래가 있다'였다. 행사장의 대우맨들은 김 전 회장이 '키운' 사람들이었다.김 전 회장이 타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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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비운의 총수' 김우중 지면기사
김우중이 자본금 500만원으로 대우그룹의 모태인 대우 실업을 창업한 건 1967년, 그의 나이 31세였다. 봉제품을 생산해 동남아 미국 등지에 수출하면서 무섭게 외형을 불려 나갔다. 그의 '세계경영'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를 토대로 30년 만에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조선 등 2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2, 3위의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1998년 해외 법인은 396개에 육박했다. 파죽지세로 세계를 정벌하는 칭기즈칸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 '킴기스칸'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대우신화'라고 했고, 샐러리맨들에겐 우상이었다."아무도 가지 않은 곳에 가라.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라"며 일갈했던 그의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당대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집마다 서가에는 이 책이 꽂혔고, 이와 함께 '탱크주의'를 표방하는 대우전자의 TV, 냉장고, 세탁기가 주류를 이뤘다. 샐러리맨들은 첫 자동차로 대우 '르망'을 선택했다. 이랬던 대우그룹의 신화는 1999년 7월 유동성 위기로 그룹이 몰락하면서 막을 내린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그룹이 망하자 한때 '팽창 경영의 모델'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그의 세계 전략은 '문어발 경영'으로 평가절하됐다.대우의 몰락에는 당시 김대중 정부의 오판과 음모가 있었다는 지적은 지금도 끊이질 않는다. 그의 수출 드라이브가 성공하고, 외환위기라는 파도 앞에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재계의 모습은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방만한 경영의 일차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당시 대우그룹의 분식회계는 충격이었다. 41조 원의 분식회계와 9조 원 부당 대출, 수출대금 20조 원 해외 밀반출 사건이 터지면서 그는 해외 도피생활에 들어갔다.'비운의 총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별세했다. 향년 83세. 김우중에 대한 평가는 '돌진형 리더십의 화신'에서 '희대의 사기꾼'까지 극과 극을 오간다. 그의 공과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오랜 기간 논쟁이 지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김우중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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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화장실안의 마사회 비정규직 지면기사
비정규직 문제는 문재인 정부 들어 가장 논쟁적인 화두다. 대통령은 2017년 5월 취임하자 마자 인천공항공사로 달려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고, 7월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대통령이 비정규직 제로 약속을 공공부문에 한정한 건 민간부문까지 강제할 수 없어서다. 전국민 비정규직 제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아무튼 정부는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없애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부채비율이 8천764%인 한국국제협력단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실적으로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모범 공공기관으로 선정될 정도였다. 그 결과 인천공항은 1만명의 비정규직이 '계약 갱신' 공포에서 벗어났고, 지난 한해 339개 공공기관에서 늘어난 임직원이 3만6천명이나 됐다.하지만 예상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가장 큰 문제는 경영진단 결과 구조조정이 당연한 부실 공공기관들 마저 정규직 대폭 확대로, 구조조정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인건비 보조 등 국민 세금으로 부실 공기업의 불필요한 조직을 운영한다면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어긋난다. 역차별도 문제다. 구의역 사망사고 청년이나 김용균씨 처럼 같은 공공부문 비정규직이라도 파견직 근로자는 여전히 열악한 근로환경을 감내하고 있다. 민간부문에서는 정규직이 줄고 비정규직이 대폭 확대됐다.그러나 자유시장경제 논리로 정부의 일방적인 공공부문 정규직 제로 정책을 비판해도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우가 드러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어제 경인일보가 보도한 마사회 미화원의 비인간적인 휴게실 실태는 분노를 유발한다. 미화원들은 화장실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고객들이 용변 보는 소리를 들으며 쉰다고 한다. 한 미화원은 '나는 청소용품'이라고 했단다. 그나마 계단 밑에 가설한 휴게실은 양반이라니, 이들이 느꼈을 인간적 비애와 모멸감의 크기를 짐작하기 어렵다.마사회 정규직의 평균 연봉은 9천209만원으로 준시장형 공기업 중 최고다. 이들은 미화원들을 화장실과 계단 밑에 숨겨두고 최고 임금을 향유하고 있었다. 공기업들이 인간적 수준에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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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정치 실종 지면기사
정치는 인간의 전유물인가. 답은 '아니오'다. 동물도 정치를 한다. 음모도 꾸민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동물 행동학자 프란스 드 발의 기념비적 저작 '침팬지 폴리틱스'(바다 출판사 刊)는 침팬지의 정치 행위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 나게 보여준다. 가령 침팬지 두 마리가 서로 싸우면 반드시 제3의 침팬지가 나타나 그중 한 마리와 공동전선을 구축한다. 싸우는 숫자가 많을 경우에는 더 큰 연합이 이뤄진다. 인간의 눈엔 침팬지들이 그저 맹목적으로 싸움에 가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계산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 발의 연구결과다.개미는 인간 외에 노예를 부리는 유일한 동물이다. 개미 박사 최재천 교수의 '개미 제국의 발견'(사이언스 북스 刊)에 따르면 개미는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합종연횡의 정치 전략을 다양하게 구사한다. 특히 남아메리카에서 서식하는 아즈텍 개미는 인간 뺨칠 정도의 정치술을 구사한다. 종족을 초월해 붉은 여왕과 검은 여왕이 함께 알을 낳고 애벌레를 키우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왕국이 완성되고 나면 패권을 둘러싸고 여왕개미들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날카로운 이빨에 허리가 잘려나가는 여왕이 속출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여왕개미가 식량을 모두 차지한다. 승자 독식이다.20대 국회의 모습이 실망, 그 자체다. 지금까지 이런 무능한 국회를 본 적이 없다. 대립만 할 줄 알지 정치가 없다. 모든 면에서 최악이다. 경제난에 불안한 안보, 여기에 청와대를 둘러싼 잇따른 잡음으로 국민의 좌절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기에 북한은 느닷없이 동창리 고체연료 실험으로 한반도를 다시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니 5천만 국민이 승선한 '대한민국호'가 정상적인 운항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한다. 서로를 탓하며 삿대질에 여념 없는 여·야 정치권 탓이다. 침팬지와 개미는 종족 번식과 생존을 위해 정치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 정치인들의 정치 행위의 목적은 무엇인가. 권력투쟁에 빠진 한국당, 청와대 눈치만 보는 집권 여당, 한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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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이혼 위자료 지면기사
지난 10월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발표한 '2019 미국 400대 부호'에 제프 베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의 전 부인인 맥킨지 베조스가 순 자산 총 361억 달러 (43조5천730억원)로 15번째 부호에 이름을 올렸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이혼'으로 불린 제프 베조스와의 이혼 위자료로 그의 아마존 주식 지분 25%를 받은 덕분이었다. 1993년 결혼한 맥킨지는 이듬해 제프가 아마존을 창업하자 도서 주문과 배송, 회계 등을 맡아 밤낮으로 일했다. 이혼 당시 주변에서 "제프가 가진 주식의 절반을 달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그래서다.맥킨지가 받은 위자료는 인류 역사상 이혼 소송을 통해 배우자가 받은 최대액수다. 이전에는 2014년 러시아 부자 리볼로 블레프가 전 재산의 40%인 45억 달러(약 4조6천억원)가 최고였다. 그다음이 1999년 예술품 거래상인 알렉 와일든스타인이 이혼하면서 내놓은 25억 달러(약 2조9천억원), 다음은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17억 달러(약 1조7천억원)였다.국내에도 세기의 이혼이라 불리는 사건이 있었다. 2014년 2월부터 시작된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과 전남편 임우재 전 삼성전기 고문의 이혼 소송. 임 고문은 2조5천억원으로 추정되는 이 사장 재산의 절반을 이혼 위자료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1심에선 86억1천300만원, 2심에선 141억1천300만원을 재산분할금으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통상 법원에서 재산분할 비율을 판단할 때는 혼인 기간·재산 형성의 기여도 등을 따지는데 이들이 오래전부터 별거를 해왔다는 점과 이 사장의 재산형성에 임 고문이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 고려됐다.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이 이혼과 함께 위자료 3억원과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보유한 SK(주) 주식 42.3%에 대한 재산분할을 청구하는 소장을 서울가정법원에 제출했다. 최 회장이 "혼외 자식이 있다"고 고백한 지 4년 만이다. 최 회장은 9월 말 기준으로 SK 주식 1천297만 주를 보유하고 있다. 노 관장의 청구를 법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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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형사과장 황운하 지면기사
요즘 보도를 통해 낯익은 이름을 자주 접한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하명수사 의혹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황운하 대전지방경찰청장이다. 그를 처음 본 것은 1996년 인천서부경찰서에서였다. 그는 이 경찰서의 형사과장이었다.당시 형사과에는 민간인 신분의 '형사 아닌 형사'가 한 명 있었다. 이명세 영화감독이었다. 이 감독은 영화 '형사수첩'(가제)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강력반 형사들을 밀착 취재하던 중이었다. 강력반장이 "반원이 늘어 일손을 덜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이 감독은 형사들과 한 몸으로 움직였다. 일과 후 형사들이 찾는 선술집은 물론, 위험하기 그지없는 범인 체포현장까지 찰거머리처럼 따라붙었다. 이처럼 '현장밀착형' 시나리오 작업을 거쳐서인지 훗날 영화가 개봉됐을 때 관객들은 스크린에 흘러넘치는 리얼리티에 박수를 보냈다. 이 감독은 형사들이 조폭처럼 쇠파이프를 들고 다니거나, 범인의 아지트를 급습하기 전, 긴장을 풀기 위해 단체로 노상방뇨하는 모습까지 필름에 담았다.당시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영화감독 한 명이 강력반을 따라다니는데 안전에 신경이 쓰인다"며 '이명세 형사'의 존재를 알려준 이가 황운하 과장이다. 마땅한 기삿거리를 찾지 못하던 차에 뜻밖에 '일용할 양식'을 구했던 기억이 새롭다.더 강렬한 기억은 그가 파주의 집창촌을 쓸어버린(?) 사건이다. 수사과정에서 미성년자들이 대거 파주 용주골로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새벽 시간, 형사들을 총동원해 관할지역도 아닌 파주에서 윤락녀와 포주, 성매매자 등을 무더기로 잡아들였다. 이 일로 그는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는 찬사와 '공권력을 남용했다'는 비난을 동시에 샀다. '참으로 거침없는 경찰'이라는 게 당시 사건으로 각인된 황운하의 이미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인천서부서를 떠나서도 각종 수사에서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갔다. 수시로 검찰과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이명세 감독의 영화가 애초의 '형사수첩' 대신 '인정사정 볼 것 없다'란 뜻밖의 제목으로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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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미시마 유키오 지면기사
1970년 11월 25일. 일본 육상 자위대 동부지역 건물 옥상에서 일장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한 군복 입은 사내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며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 혼을 유지하는 것은 자위대뿐이다. 일본을 지킨다는 것은 피와 문화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사무라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는 것인가. 나를 따르는 자는 없는가." 45세의 극우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다.'일왕을 보호하는 방패'라는 의미의 민병대 '방패회' 대원 4명과 함께 난입해 사령관을 인질로 잡고 1천여명의 자위대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이렇게 '군국주의 부활'을 외쳤다. 하지만 자위대원들의 야유와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그러자 미시마는 '셋푸쿠'라는 할복에 이어 옆에서 목을 쳐주는 전통적인 사무라이 의식으로 목숨을 끊었다. 실제로는 겁을 먹어 배를 찌른 상처는 겨우 10㎝였고 목을 베기로 한 자는 칼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세 번이나 내려쳤다고 한다.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1949년 동성연애자의 내밀한 풍경을 다룬 '가면의 고백'으로 등단한 미시마는 '일본적 미의식을 바탕으로 글을 쓴 전후 최고의 작가'라는 평을 들었다. 특히 그를 유명하게 한 건 56년 작 '금각사(金閣寺)'다. 전후 일본의 황폐함을 비극적인 아름다움으로 한 단계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은 이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확보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정치성향의 '천황 주의자'로 바뀌면서 그를 애지중지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조차 그의 변신을 혼란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미시마 유키오의 사위 도미타 고지가 신임 주한 일본대사로 3일 부임했다. 극우 작가의 가족이라서 극우 성향일 거라는 우려도 있지만, 실제로는 전임인 나카미네 야스마사 대사보다는 더 유연한 입장이란 평가가 나온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9년 주한 일본대사관 참사관과 공사로 근무한 경험도 있다. 또한 일본 북미국장을 지내는 등 대표적인 미국통이기도 해 한일관계를 미국의 시각으로도 이해할 것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