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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의 회초리 지면기사

    요즘도 개업 인사장 등을 보면 '강호(江湖) 제현(諸賢)의 지도 편달을 바란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편달'이 무엇인가. '편(鞭)'은 가죽채찍이고 '달(撻)'은 '매질할 달'자다. '편달을 바란다'고 했대서 진짜 가죽채찍을 휘둘렀다가는 당장 폭행죄 감이다. 편달을 '편책(鞭策)' '편초(鞭●)' '편태(鞭笞)' '편축'이라고도 한다. '편축'의 '축'은 '木+丑'의 글자다. 그런데 가죽채찍으로 맞는 아픔은 나무 회초리와는 비교가 안된다. 그래서 관리를 매질하는 것은 편달 또는 '편격(鞭擊)'이라 했고 생도 훈도용 채찍질은 '복달'이라고 해서 구별했다. '복'은 '종아리 채 복'자다. 그렇다면 '교편을 잡는다'가 아닌 '교복을 잡는다'가 적확(的確)한 말이다.종아리 채 회초리의 초(楚)는 가시나무다. 회초리는 반드시 가시나무라야 했다. 그 회초리 매질을 '초달(楚撻)' 또는 '달초(撻楚)'라 했으니까 '교편을 잡는다'가 아니라 '교초(敎楚)를 잡는다'가 바른 표현이다. 아무튼 '사랑의 회초리'냐 감정과 분노의 매질이냐의 시비는 세계 어디고 그칠 날이 없다. 92년 8월5일자 베이징(北京) 만보(晩報)는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쇠똥을 강제로 먹인 야만적인 초등학교 교사에게 후베이(湖北省)성 법원이 징역 2년을 선고했다”는 기사를 실었고 그 해 7월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시 기쿠(企球)중학교의 한 교사는 성적 불량 학생에게 전기 찜질을 해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30점 이하는 70V, 50점 이하는 50V의 전기 고문을 가했다는 게 아닌가.미국, 영국도 체벌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체벌 금지 선진국이라면 핀란드(1783년)를 비롯한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정도다. 말씀 그대로 사랑의 회초리야 필수불가결이다. 그러나 초등학생을 메다꽂아 뇌출혈을 일으키게 한다든지 전치 몇 주에다 정신과 입원까지 하게 하는 매질은 안된다. 그건 '체벌'뿐 아니라 '심벌(心罰)'에다 평생 가시지 않는 정신적인 위해가 되기 때문이다. 전치 3주의 구타로 엊그제 구속됐다는 한 초등학교 교사는 그 점을 망각했던 것

  • 떡값 지면기사

    떡값은 사정기관조차 ‘떳떳하지 못한 거래 관계로 오가는 돈’이라고 해석하여 기소하고, 어떤 때는 '서로 부담없이 주고 받는 돈’이라고 해석해서 모르는 체하기도 했다. 떡값이란 정치인들과도 많은 관련이 지어져 있는데 현행 정치자금법은 정치인들이 규정한 절차에 따라 금품을 수수하지 않을 경우 예외 없이 무조건 처벌 대상이 된다.미국 공직자의 경우 1회에 20달러 이상의 선물이나 접대는 원칙적으로 금지되고, 20달러 이하라도 동일인으로 연간 50달러를 초과하면 안된다. 또 우리와 유사한 접대문화를 갖고 있는 일본의 공직자는 이해 관계자로부터 금전이나 물품의 증여와 향응 접대뿐만 아니라, 금전의 대부도 금지된다. 또 접대와 관련하여서는 당사자가 이해관계자인 경우 그 비용을 각각 부담하더라도 금지하고 있다. 이해 관계자와의 골프는 누가 보더라도 각자 부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이에 반해 우리 공직사회의 금품 수수는 심각하다. 얼마 전 한 여론조사기관의 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25%가 공무원에게 금품을 주었고, 준 이유는 공무원의 암시 때문에가 50.2%, 그리고 관행이기 때문에가 41.4%이고, 이중 80%는 금품 제공의 효과가 긍정적이라고 답변했다. 이렇다면 단순 떡값은 없다는 말이 된다. 떡값은 본래 회사나 기관단체에서 명절때 직원들에게 주는 약간의 특별수당을 일컫는 말이었다. 때로는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이 대가를 바라고서 주고 받는 돈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엊그제 검찰이 전국 특수부장회의를 열고 '떡값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과거 3천만~5천만원이 돼야 구속하던 관행을 깨고 떡값 1천만원 이상이면 돈의 성격에 따라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떡값 처벌의 액수를 규정한 것이다.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미풍양속이었던 '떡값'이란 단어가 부정적인 이미지로 변했다. 과거 정권에서는 떡값이 몇 천만원은커녕 사과상자에 수억원이 담기기도 했다. 이러다가는 머지않아 국어사전에 ‘떡값’이 고유명사로 실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기 전에 아예 떡값이라는 단어를 뇌물과 연관짓는 일을 삼가야 하지 않

  • 청계천 지면기사

    물에도 명당(明堂水)이 있다. 조선 태종 6년(1406년) 600명의 인부를 동원, 인공으로 뚫은 개천이지만 서울의 청계천이 명당수로 꼽히는 까닭이 있다. '한경지략(漢京識略)' 개천(開川) 조(條)의 기록처럼 조선 땅의 모든 강물이 서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반해 서울의 개천(開川)만은 동쪽으로 흐르기 때문이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언급처럼 백악(白嶽→北岳), 인왕, 목멱(남산) 등 산골짜기 물이 모두 동으로 합쳐 흘러 중량포(中梁浦)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개천'이 곧 청계천이다. 조선 초기 왕조실록 등 모든 기록에 '開川'이라 했듯이 청계천의 옛 이름은 '개천'이었고 영조 이후에 청계천으로 개칭됐다는 것이다.'이 곳 방산(芳山)은 개천과 더불어 장안 사람들의 뜨락으로 각광을 받았다. 물 빠진 개천 바닥은 돌팔매싸움, 편싸움 터로 이용되었고 낮에는 한길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아낙네들 수십, 수백명이 실버들 늘어진 개울가에서 연두색 장옷을 쓴 채 부지런히 빨랫방망이를 내리쳤고 개천 석축 가에는 오색 빨래가 널렸다'(漢京識略 都城 條)는 그 청계천을 보전하려는 선현들의 노력도 대단했다. 집현전 수찬 이선로(李善老)가 세종께 주청했고 교리 어효첨(魚孝瞻)은 “명당수가 더러우면 패역흉잔(悖逆凶殘)의 징조이며 신령(神靈)이 불안한지라…” 더럽혀선 안된다며 세종 앞에서 일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훗날 유득공(柳得恭)과 이덕무가 주고받은 청계천 화답 시(和韻) 또한 유명하다.정월 대보름 휘영청 달빛 속의 다리밟기(踏橋)는 어떻고 대광통교(大廣通橋),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水標橋), 영풍교(永豊橋), 태평교(太平橋), 영도교(永渡橋) 등 정겨운 다리 이름은 어떤가. 동대문 남쪽 성벽 밑엔 다섯 개의 아치형 구멍이 나란히 연결된 오간수문(五間水門)이 있었고 임꺽정이 수달처럼 도성을 빠져 드나들던 비상문이 바로 그 문이었다. 그런 600년 명당수 청계천을 콘크리트로 뒤덮어버린 것은 무지막지한 개발 논리의 폭거였다. 교통난, 주변 상권 등 당장의 문제도 없지 않지만 청계천이 복원된다는 것은

  • 신용불량 공무원 지면기사

    93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다. 우리 일행의 안내를 맡은 고려인 가이드는 구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 사회의 혼란상을 '1불 공화국'으로 표현했다. 호텔과 음식점에서의 팁은 물론이거니와 거리에서 경찰과 문제가 생겨도 1달러면 만사형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1달러는 마치 소련 공산주의를 무너뜨린 자본주의의 힘을 보여주려는 듯 곳곳에서 신통방통한 위력을 발휘했다.특히 세관 마저도 1달러에 점령당한 장면은 충격이었다. 1달러를 머릿수 만큼 거두어주거나, 여행가방에 슬쩍 끼워두면 모든 사람과 물건이 무사통과였다. 부도난 사회주의에서 싹튼 공무원들의 비리는 그 이후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반복해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면 자본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공무원들은 비리에서 비켜서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자신있게 'Yes'를 외칠 수 있는 우리가 아니다. 더욱 큰 일은 공무원들이 비리와 독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범죄 환경이 점점 구조화되고 있다는 점이다.최근 금융감독원 자료에 의하면 공무원·교사·국영기업체·군인·은행원 4만6천여명이 금융 신용불량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 공무원은 2만1천명이 넘어 100명 중 4명의 공무원이 신용불량의 딱지를 붙이고 근무중이다. 국영기업체 직원 1만3천700여명, 은행원 8천명, 군인 3천명 가까이가 은행으로 부터 빚 독촉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신용 상실이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인 경제체제에서 호랑이 보다 무서운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공무원과 은행원, 군인, 교사가 득실거리고 있다니….은행빚에 몰려 민원인의 청탁과 학부모의 촌지를 거절못하는 공무원과 교사, 눈앞에 오락가락하는 현금다발에 심란한 은행원, 국방 보다도 목전의 채무상환이 다급한 군인들을 상상하면 정말 끔찍하다. 얼마전 형사가 사람을 납치한 일도 우연이 아닌 듯 싶어 더 그렇다. 카드빚으로 인한 각종 범죄가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를 지켜 줄 파수꾼들 마저 아슬아슬한 환경에 처해 있으니, 신용대란의 막판이 어디까지 치달을지 몰라 이래저래 국민만 불안한 시절이다. /윤인수(논설위원)

  • 햇빛 싸움 지면기사

    알렉산더 대왕이 통(桶) 속의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찾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고 묻자 “아무 것도 필요 없으니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한데 그에게 알렉산더가 한 말 또한 유명하다.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였을 것이다.”그 디오게네스를 시조로 모셔야 할 일조권(日照權) 싸움은 오늘날 너무나 잦다. 북한에 대한 '햇볕(陽光) 정책'이 옳으냐 그르냐 그런 시비가 아니라 “내게도, 우리 집에도 햇빛(日光)을 달라”는 주장과 싸움이다. 고층 아파트만 치솟았다 하면 일조권 시비가 붙는 도시는 물론 농촌도 다르지 않다. 대형 그린하우스(비닐하우스)가 10m 높이까지 설치되는 바람에 뒷농작물에 일조량이 줄고 통풍이 안돼 수확량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98년 2월 법원의 명확한 판결도 내려졌다. “동지(冬至)를 기준으로 오전 8시에서 오후 4시 사이에 4시간 이상 일조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일조권 침해에 해당된다”는 것이다.일광반사경(heliostat)이나 집광경(集光鏡) 등 일조권에 따른 이른바 '태양산업(solar business)'도 일어선 지 오래다. 90년 1월18일자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은 옥상에 설치한 센서가 받은 광선을 응달진 벽면에 장치한 거울에 반사시켜 실내로 보내는 '채광 아파트(신주쿠(新宿)역 부근)'에 대해 보도했고 광섬유와 집광 로봇을 이용한 실내 일광욕 시설도 소개했다. 하지만 기적처럼 스며드는 쥐구멍 햇빛도 햇빛 나름이고 지하 벙커나 고문실에 끌어들이는 일광도 일광 나름이다. 너무 강하면 시신경이 상하고 정신까지 다치기 때문이다.88년 6월엔 서울 롯데월드의 대형 유리 돔에 반사되는 햇빛이 너무 강해 눈이 부시고 안질까지 생긴다는 이웃의 시비로 난투극까지 벌어지더니 이번엔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를 배출한 1천200년 고찰인 봉은사 승려들이 주변의 46층짜리 아파트에서 반사되는 강렬한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 기도를 할 수 없다”는 시비가 뜨겁다. 일조권 쟁취 싸움이 아니라 '지나친 일조권' 거부 싸움인 것이다. 이

  • 자동차 관련 세금 지면기사

    지방자치단체마다 이 달말 마감되는 제1기분 자동차세 납부독려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신문마다 광고도 하고 버스에서는 안내방송이 계속 들린다. 1~2분기로 나뉘어 부과되는 자동차세는 경기도에서만 이번 1기분 부과액이 2천414억원에 올 목표액이 3천768억여원이나 된다니 이럴 만도 하다.자동차세는 일제 강점기때 마차나 인력거에 차세(車稅)를 부과하다가 그 이후 1961년 지방세법에 의해 사치세의 성격을 띠면서 자동차세가 공식 부과돼 지금까지 지방세원의 중요한 세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자동차 1천만 시대를 살고 있는 소유자들의 불만도 높아지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재산세에 비하여 자동차세가 턱없이 높게 책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재 780만원짜리 1천500㏄급 소형승용차 한 대에 붙는 연간 세금 20만9천여원은 시가 4억원 상당인 서울 강남의 30평형대 아파트에 붙는 재산세와 비슷하다. 또 하나 불만은 같은 자동차의 경우에도 형평성에 문제가 많다는 점이다. 헌법재판소의 합치결정은 받았지만 배기량만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배기량이 같은 외제 고급승용차와 국산 자동차의 세금이 동일하다.또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경우 주행세를 따로 지불해야 하고 휘발유 등 기름 값에도 높은 비율의 세금이 포함되어 있는데 미국이나 일본 등에 비해 턱없이 높은 세금이 부과되고 있는 점도 불평의 소지가 되고 있다. 생활필수품이 된지 오래인 자동차를 아직도 사치품으로 분류, ‘특별한 소비’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한다.자동차세가 지방세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감세할 경우 지방세원의 급격한 감소를 염려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불합리한 세금징수를 계속한다면 이야말로 행정편의주의 혹은 세수편의주의가 아니겠는가. 이제 자동차가 보편화된 현실에 맞는 합리적 조세제도가 정착돼야 하겠다. 생활필수품이 되다시피한 자동차가 '봉'이 돼서는 곤란하다. 불필요하게 자가용을 굴리는 경우도 많지만 우리나라 자동차 소유자의 세금부담이 OECD 국가중 최고 수준임을 감안한다면 문

  • 1弗과 1억弗 지면기사

    동·서독은 신중했다. 동독 공산당 서기장 울브리히트가 서독 하이네만 대통령에게 정상회담 제의 서한을 보낸 것은 69년 12월17일이었다. 그러나 답장은 즉각 보내지 않았고 브란트 서독 총리가 슈토프 동독 총리에게 만나자는 역제의 답장을 보낸 것은 그 한 달 뒤인 70년 1월22일이었다. 슈토프는 맞장구를 쳤고 한 달 뒤인 2월 19일이나 26일쯤 만나자고 했다. 그 역시 전화가 아닌 편지였다. 하지만 브란트는 연방 각료회의 검토와 미·영·불과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며 제의 날짜 한 달 후인 3월 중순 이후로 하자고 했고 그런 신중한 절차를 거쳐 분단 21년만의 역사적인 첫 동·서독 정상회담은 70년 3월19일 동독 에어푸르트에서 열렸다.그들은 서두르지 않았고 20년간 9차례 정상회담 끝에 드디어 통일의 위업을 이뤘다. 심복을 통해 쥐도 새도 모르게 방수복(防水服)도 안 입힌 채 '물밑 접촉'을 벌이게 하지도 않았고 당당하게 편지를 주고받으며 타진하고 진행했다. 또 7월 장마 젖은 하늘에 번개 치듯 정상회담 날짜를 '전격(電擊)' 발표하지도 않았다. 김일성이 사망한 그 해 94년 방북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간접적으로 제의하는 식도 물론 아니었다. 더구나 정상회담 대가로 10억달러를 요구, 결국 1억달러를 주었느니 5억달러를 어쨌느니 하는 얘기도 듣지 못했고 송금이 늦어 회담 날짜가 연기됐다는 전설도 들은 바 없다. 2차 회담도 약속대로 3개월 후에 열렸다.김일성의 첫 제의야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성사된 회담을 먼저 제의한 쪽은 남쪽이지만 독일은 동독이 먼저였다. 다만 첫 정상회담 장소가 '동'과 '북'이었다는 점만이 같을 뿐이다. 궁금한 건 94년 그 해 김일성이 생존, YS와 정상회담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도 그런 어마어마한 '면회료' 청구서를 사전에 내밀었고 약속을 파기, 답방을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YS만은 “기런 거액이라 카더라도 장차 갱제 교류가 이뤄지면 가능할끼 아입니까”해가며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단 1달러도 주지 않았다던 1달러가 1억달러의 몇 분의 1이 맞느냐는 셈법은 누구한

  • 이공계 홀대 지면기사

    필자가 대학에 입학하던 1970년대만 해도 공과대학은 그야말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박정희 정권 시절 기술입국과 이공계 우대정책 등으로 인해 공과대학들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었다. 실업계고교 출신자들도 대학진학시 정원의 30% 범위에서 특례입학을 인정해 농·공·상고 출신들이 대거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초 서울대에서 공대의 등록률이 81.7%로 사상 최저를 기록하고 대학원이 미달되는 등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화되고 있음은 심히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물리 화학 수학 등 기초과학이 홀대받고 실업계고교도 고사(枯死)위기에 처한지 오래다.청소년들이 벌써 힘들고 어려운 과학기술이나 기초학문을 기피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고소득이 보장되는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는 얘기여서 씁쓸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데는 과학기술과 공업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 과학기술자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는데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변변한 천연자원도 없고 관광문화자원도 빈약한 우리 나라가 살 길을 과학기술발전에 두고 1960∼1970년대 과학입국을 내세우며 국가정책을 펼친 결과 1980∼1990년대의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을 잊은 것은 아닐까. 과학기술자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 나라 수출의 주종인 반도체·정보통신·자동차·해외건설플랜트 등 분야의 성장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청소년들이 이공계 진출을 기피하는 것은 과학기술자가 더 이상 사회적 지위의 향상이나 부(富)를 얻을 수 있는 선망의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공계 출신들은 민간기업에 입사해도 관리직에 비해 승진이나 연봉수준이 떨어진다. 공직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기술고시 출신들은 행정고시 출신에 비해 승진은 물론 보직에서 불리하다. 행정직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고위직인 1급까지 오르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엊그제 노무현 대통령이 시흥의 산업기술대를 방문, “앞으로 이공계 출신이 대우받는 사회가 온다”며 기술인들을 격려했다. 장인정신(匠人精神)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과학기술자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

  • 아… 6·25 지면기사

    “존경하는 이·브·쓰딸린 동지에게. 조선 해방의 은인이시며 전세계 근로인민의 수령이신 당신께서는 자기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야 싸우는 우리 조선 인민을 항상 고무 격려하여 주시며 우리에게 배려를 베푸러주시며 각 방면으로 원조를 주시는데 대하야 조선노동당을 대표하야 충심으로부터의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중략) 미 침략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는 우리의 형편이 좋지 않었다고 볼 수 없었슴니다. 적들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야 남조선 최남부의 협소한 지역에 몰리어드러가게 되어….” 50년 9월29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쓴 편지다.70년 출간돼 세계적인 화제를 일으킨 '흐루시초프 회고록'엔 이 편지를 쓰기 1년 전인 49년 겨울 모스크바에 간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제시한 남침 시나리오 이야기가 나온다. 스탈린의 최측근인 흐루시초프의 생생한 기억이 전하는 문제의 시나리오 주제는 '속 빈 강정'이었다. 일격만 가하면 남한은 '속 빈 강정'처럼 부서진다는 게 김일성의 호언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의 호언대로 남한은 낙동강까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려 깨진 '속 빈 강정'이 되는가 싶더니 유엔군의 참전으로 쫓기자 '쓰딸린 동지'에게 원군(援軍) 편지를 썼던 것이다.한국군 전사 13만7천899명, 부상 45만742명, 민간인 사망 37만3천여명, 미군 전사 3만6천940명, 부상 9만2천134명, 납북 8만2천959명, 전쟁미망인 20만명, 고아 10만명, 이산가족 1천만명, 민간 피해 22억8천만달러, 전비 208억달러…. 그런데 아직도 550여 참전용사는 보훈병원에 누워 있다. 유해도 발굴된다. 재작년만 해도 122구나 발굴됐다. 이 끔찍한 전쟁은 김일성이 일으켰다. 50년 3월5일 '쓰딸린' 별장에서 그의 재가를 얻어 일으켰다는 것은 94년 러시아 국영방송 오스탄키노가 다큐멘터리로 제작, 전세계에 공증(公證)된 바 있고 SBS와 KBS도 그 해 6월2일과 3일 방영했다.오늘이 벌써 53년. 그런데 아직도 한반도 이 땅에선 전쟁의 그림자가 꺼질 줄 모르고 '한반도'도 아닌 '반(半)의 반도(半島)' 남쪽의 전

  • 우울한 기념촬영 지면기사

    2001년 미연방수사국(FBI) 요원 로버트 필립 헨슨이 이중간첩으로 체포되자 미국은 발칵 뒤집어졌다. 헨슨은 15년 동안 옛 소련과 러시아에 일급정보를 넘기고 140만 달러를 챙겼다.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주 비엔나 주민들은 그런 헨슨을 6명의 자녀를 둔 평범한 가장으로만 알았다. 정보를 사들인 러시아도 그저 암호명 'B'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영국의 상류층 엘리트들이 사회주의를 신봉해 2차세계대전때 소련 스파이를 자청한 '케임브리지 그룹'의 '제5의 사나이'도 첩보세계의 익명(匿名)·익면(匿面)의 윤리(?)를 잘 보여준 인물이다. 5인의 케임브리지 동문 스파이 중 킴 필비, 거이 불게스, 도널드 매클린, 안토니 브런트 등 4명은 신원이 밝혀져 소련으로 망명했으나 남은 1명은 깨끗이 증발해 '제5의 사나이'라는 신비한 별명을 붙여준 것이다. 결국 85년 존 케언크로스가 제5의 사나이로 밝혀졌는데 이미 그의 나이 72세로 영국대외정보부 MI6, 영국 외무부·재무부에 근무하다 74년 은퇴한 노인이었다.이 뿐 아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일등공신인 이중간첩 가르보는 패전의 멍에를 안긴 독일 나치정권으로부터 철십자훈장을 받을 정도의 철면피였다. 또 2차대전 당시 영국 스파이 두스코 포포프는 종전후 대영제국훈장을 받았는데, 그 장소가 런던 리츠호텔의 바(bar·술집)였다. 이렇듯 첩보세계는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암호만으로 존재하는 음지의 세상인 것이다. 독일 통일후 서독의 주요인사들이 동독의 첩자로 드러나 '스파이 대란'이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다. 총성없는 전쟁터인 첩보전에서 얼굴 공개는 곧 사망선고나 마찬가지인 셈이다.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원 간부들과 촬영한 사진이 그대로 인터넷 신문에 게재돼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암호로만 존재했을 국정원 핵심 책임자들의 얼굴이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그것도 청와대 전속 사진사가 대통령이 호의를 보이는 인터넷 신문에만 몰래 전해주었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얼굴이 공개된 국정원 간부들이 누구를 만나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의 국정원 격려 방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