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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위와 맹추위 지면기사
함박눈, 폭설과 함께 온 이번 추위를 신문과 방송에서 '강추위'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강추위'의 '강'은 '强'의 뜻이 아니다. '맨손' '맨발'의 '맨'처럼 순수한 우리말 접두어다. 눈물 한 방울 없이 우는 울음이 '강울음'이고 억지로 부리는 샘(시샘)이 '강샘'이듯이 '강추위'란 눈을 동반하지 않은 '맨추위'란 뜻이다. 따라서 이번 추위는 사나운 추위, '맹추위'가 적절한 말이다.아무튼 혹독한 소한 추위가 몰아닥쳤다. 하지만 어제의 영하 15.5도(서울)∼20도(철원) 정도는 혹독한 추위라 할 수 없다. 에스키모 땅인 북극권의 그린란드와 러시아 땅 시베리아, '마지막 변경'으로 불리는 북미 알래스카, 이름 자체가 동토(凍土)인 아이슬란드, 그리고 남극 땅 추위를 상상하면 “이 정도야” 할지 모른다. 연료가 부족해 '날고기를 먹는 인간'이란 뜻의 에스키모, '그린란드(녹색 땅)'가 아니라 '화이트랜드'로 불려야 할 눈과 얼음의 땅. 그곳은 영하 30∼40도가 보통이고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주변은 영하 60도까지 내려간다. 북구 스웨덴만 해도 혹한에 폐를 보호하기 위해 '렁 플러스'라는 마우스피스까지 개발, 출퇴근 때 물고 다니는 모습이 꼭 흰 뼈다귀를 물고 있는 개를 연상케 해 웃음을 자아낸다.지구 역사상 최저 기온은 83년 7월 남극 보스토크 기지에서 측정한 영하 89.6도였다. 그곳 겨울(6∼8월)은 보통 영하 40∼50도까지 내려가고 연평균 기온만도 영하 23도다. 그러니 영하 5∼10도의 요 며칠 한파에도 각각 200여명과 59명이 동사했다는 방글라데시와 인도 북부의 '전설'을 그곳 남극 기지에서 듣는다면 어떨까. 하기야 영상에도 얼어죽는다. '혹한 내습 89명 동사'라는 90년 1월6일자 뉴델리 신문들 제목의 그 '혹한'은 놀랍게도 영상 2도를 지칭한 것이었다.오늘의 소한으로 이 겨울도 한겨울이다. 춘원(春園) 이광수의 추위 묘사처럼 '모두들 고양이 모양으로 동그랗게 웅숭그린' 어깨들을 활짝 편 채 저 겨울 바다 수영족(族)과 얼음 구덩이 자맥질의 극기 훈련 악동(惡童)들을 한 번쯤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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찹쌀 모찌 지면기사
어느 나라 사람이든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가 적지 않다. 문화와 종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설과 비슷한 풍경이 세계 곳곳에서 펼쳐진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명절을 맞아 식구들과 이웃이 함께 나누는 음식이다.우리는 가래떡을 방앗간에서 뽑아 굳힌 다음 썰어서 떡국을 끓여 먹는다. 베트남에서는 집집마다 수박을 준비해 잘랐을 때 빨갛게 잘 익었으면 다복하다고 믿는다. 이란은 이란어로 '시' 발음으로 시작하는 일곱 가지 재료를 사용해 음식을 준비한다. 마늘(시르) 식초(세르케) 사과(십) 등이 사용되는데 각각 풍요와 즐거움, 건강과 행복을 상징한다. 인도에서는 큰 냄비에 우유와 쌀을 넣어 죽을 끓여 먹으며 멕시코 사람들은 12월31일 자정 무렵에 포도알 12개를 먹으며 소원을 빌기도 한다. 또 공교롭게도 이집트는 새해 첫 날 양의 머리 부분과 발목 그리고 달콤한 케이크를 먹는 등 다양한 풍습이 있다.1월1일을 크게 기념하는 사람들로 일본인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중국과 달리 일본은 같은 한자문화권이면서도 음력의 개념이 없다. 그래서 12월28일을 전후해서 새해 1월4~5일까지 이어지는 일주일 정도의 긴 설 연휴에 들어간다. 이 때면 집집마다 찹쌀떡을 준비하는 일로 분주해진다. ‘모찌’라고 불리는 이 새 해의 떡은 찹쌀가루를 절구에 쪄서 둥글둥글한 모양으로 만든다. 모찌 만들기에는 찹쌀을 치대는 작업이 힘들고 많은 시간을 요한다. 그러나 요즘은 연중 내내 슈퍼에서 판매하기 때문에 모찌를 집에서 만드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우리의 가래떡이 그렇듯이.이런 모찌를 먹다가 목에 걸려 올해에도 일본 노인 6명이 질식해 숨졌다고 한다. 25명은 또 병원신세를 지고 있단다. 해마다 20여명 정도의 노인들이 똑같은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일본 소방당국은 새해를 앞둔 연말부터 주민들에게 모찌를 잘게 잘라 꼭꼭 씹어서 물과 함께 먹으라는 당부를 할 정도다. 노인들의 귀중한 목숨을 앗아가는 '모찌떡 사고'가 올 연말에서 내년초에도 또다시 반복돼 새해 음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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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머리와 꼬리 지면기사
전래 우화(寓話) 한토막. ‘뱀 한마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뱀의 꼬리는 머리에게 불만이 많았다. 도대체 꼬리의 처지는 손톱만큼도 생각않고 오직 자기(머리) 편한대로만 끌고다니는 것이었다. 꼬리는 툭하면 돌부리 나뭇가지 등에 긁히고 찔려 상처투성이가 됐다. 참다못한 꼬리가 더 이상 끌려가지 않으려고 나뭇가지를 칭칭 감고 외쳐댔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머리)를 끌고 다니겠다.” 머리는 “네까짓게…” 하면서도 별수없이 꼬리를 따랐다. 하지만 꼬리에겐 눈이 없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이리 저리 마구 헤매다 그만 낭떠러지로 떨어져 머리와 함께 죽고 말았다’. 서로가 아끼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대신, 무시하고 반목한 결과가 빚은 비극이다. 역시 우화답게 풍자와 교훈이 곁들여 있다.2030세대 5060세대 이야기가 해를 넘기고도 좀처럼 그치질 않는다. 지난해 말 대선에서 드러난 표심이 꽤나 충격이었나 보다. 마치 세대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라도 세워진 듯한 모습들이다. 혹자는 이렇게 한탄한다. 젊은 층은 “우리가 세상을 바꿨다”고 기뻐하지만, 노장년 층은 그 결과를 시대의 선택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한 채 가슴앓이만 한다고. 심지어 의기양양해진 2030세대에 비해 5060세대는 경제력 위축에 정치적·이념적 상실감까지 겹쳐 괜히 불만스러워 한다는 심한 소리도 들린다. 그야말로 ‘뱀 머리와 꼬리’의 반목을 즐기기라도 하듯이.동물(뱀) 이야기로 시작한 김에 끝맺음도 그렇게 해야겠다. 고래는 무리 중 한마리가 곤경에 처하면 무리 전체가 힘을 모아 돕는다고 한다. 일례로 동료가 포경선 공격을 받으면 근처 모든 고래가 몰려와 빙둘러 원을 그리며 그 고래를 감싸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이타적 행위는 비단 고래뿐만 아니라 무리지어 공동체생활을 하는 동물들 사이에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란 게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다. 아마도 이기심 반목 따위론 결코 공동사회를 유지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물사회가 이럴진대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세대간 벽을 논한다는 게 어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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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와 '계미' 사이에서 지면기사
아무래도 신정을 기준으로 간지(干支)를 새기기는 좀 그렇다. 언론에서는 계미년 새해가 밝았다며 12지중 '양(未)'이 의미하는 바를 널리 알리고, 새로 나온 양력달력에는 1월달부터 계미(癸未)의 해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2003년 1월 한달은 꽉차게 모두 임오(壬午)의 날이다. 임오의 말 궁둥이가 눈에 선연한데 양력 달력은 억지로 계미의 양뿔을 들이미는 형국이다. 세시풍속은 음력을 따르면서, 세상의 모든 비즈니스는 양력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한자문화권 사람들의 시대적 오류인 셈이다.양(羊)의 이미지가 유순하고 온화해서인지는 몰라도 역사적으로 양의 해에는 큰 탈이 없었다고 한다. 또 양은 인류가 문명을 열기 전인 신석기시대부터 인류에게 헌신해왔다. 고기는 물론이고 그 가죽은 문명 전에는 추위를 막아주었고 이후에는 무지(無知)를 막아주었다. 양피지에 담긴 역사 종교 신화 문학은 오늘날 화려한 인류 문명으로 꽃피어 있는 것이다. 신께 인간을 대신해 바칠 신성한 동물도 양뿐이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길 잃은 양떼이기도 했으니, 신에게는 인간과 양이 동종(同種)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양이 아직까지도 낯선 동물이고 한국문화에서 양의 위치는 미미하다. 관련 신화나 전설도 찾아보기 어렵다. 농경민족인 우리가 유목민족의 가축인 양을 접한 시기가 5천년 역사에서 볼 때 극히 최근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양의 유순한 이미지는 우리를 닮았다. 발정난 숫양의 신기(神氣)도 월드컵 4강신화를 만든 우리의 신바람과 매우 유사하다.그런데 다가오는 새해의 전망은 모두가 우리를 힘들게 할 것으로 보이니 걱정이다. 북핵문제도 그렇고 불투명한 경제전망도 그렇다. 대선으로 불거진 사람사이의 갈등도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아직은 음력으로 날을 세고 싶어진다. 물러가는 임오가 마지막 힘을 모아 이런저런 액운을 뒷발질로 멀리 멀리 차내주었으면 해서다. 그것도 얼마 남지 않은 한달 동안에…. 계미 새해에는 한민족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한해가 됐으면 하는 소망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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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의 종소리 지면기사
가장 짧은 시간과 영원한 시간은 소름 끼치도록 잔인하고도 지독한 극(極)과 극이다. 영원한 시간을 '겁(劫)'이라고 한다. 하늘에 사는 천인(天人)이 길이가 사방 40리(약 16㎞)나 되는 바위를 100년에 한 번씩 얇은 옷자락으로 스쳐 그 바위가 모두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겁'이고 사방 40리나 되는 크나큰 성에 겨자 알을 가득 채워두고 100년에 한 알씩 모두 집어내도 끝나지 않는 시간이 영겁이라고 할 때의 그 '겁'이다. 또 '겁'의 100배가 백겁, 1천배가 천겁이고 세상의 시작∼끝의 시간이 '대겁(大劫)'이다.반대로 가장 짧은 시간은 '찰나(刹那)'다. 손끝 한 번 퉁기는 시간(彈指頃)이 찰나다.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은 잠깐(暫間), 잠시, 순간, 순각(瞬刻), 전순(轉瞬), 순식간, 별안간, 삽시간, 돌차간, 호홀지간(毫忽之間)이다. 올림픽 100m 결승 때 켜 드는 그 스톱워치로 잴 수 있는 100분의 1초가 그런 시간이다. 그러나 가장 짧은 시간은 상상으로나 가능할 10억분의 1초인 나노(nano)와 1조분의 1초인 피코(pico)다.제야(除夜)의 종소리가 울리면 가장 짧은 시간들의 산탄(散彈)에 쫓기는 삶을 뚫어져라 생각한다. 영겁에 비하면 찰나도 못되는 인생이 빠르기는 또 얼마나 빠른가. 누가 황소 꼬리에 불을 붙여봤길래 세월이 '꼬리에 불붙은 황소처럼 내닫는다'고 하는가. 빠른 세월을 날아가는 화살에 비유하기도 한다. 50대→60대→70대 나이가 들수록 올라탄 시간의 속도감은 더하단다. 내릴 수도 없는 이 아찔한 삶의 속도감을 어찌하랴. 보다 압축되고 정제된 고밀도의 상황적 시간, 공간적 시간인 이른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보람차고 위대한 가치를 창조하는 그런 시간으로 살 수밖에 없으리라.뉴 이어 이브, 제야의 종소리 한 번에 포도 한 알씩을 따먹으며 새해 소망을 빈다는 스페인 사람들처럼 이 제야를 견디기엔 우리 목숨마다 주어진 시간들이 너무나 침중(沈重)하고 지엄하지 않은가. 평화의 상징인 양의 해 내년은 우리 겨레의 고뇌와 회한(悔恨)을 뛰어넘는 환희와 감격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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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복제 아기 지면기사
5년전 복제양 '돌리'가 출현해 인류를 놀라게 했던 생명공학은 쥐아기를 탄생시켰고 우리나라에서도 복제 젖소 '영롱이'가 태어났다. 당시로서는 모두가 충격적인 일이었고 앞으로도 더 큰 충격들이 기다리고 있다.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21세기에는 인간에 의해 개량된 전혀 다른 인간형이 출현할지 모른다'고 예언했다.미국의 종교단체 ‘라엘리안 무브먼트’가 인간복제에 착수해 초기 실험을 실시한지 수년만에 드디어 처음으로 인간복제를 통한 여자 아기를 탄생시켰다는 외신보도가 전해지면서 세상이 또 충격 속에 휩싸이고 있다. 이 단체가 운영하는 비밀조직 ‘클로네이드’사 연구책임자인 브리지트 부아셀리에 박사는 26일 남성 세포에서 채취한 핵을 난자에 주입해 초기 단계의 배아로 키워내 제왕절개를 통해 아기를 탄생시켰다고 AFP 통신에 밝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류 역사의 일대 충격이 아닐 수 없다.몇 년전 상영된 ‘DNA’라는 영화는 픽션(Fiction)이지만 유전자 조작과정에서 탄생한 온갖 동물 형상의 기형 인간들을 보여주며 인간복제의 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경고하고 있다. 복제양 돌리도 결국은 죽었고 연구과정에서 수많은 기형들이 나타난 적이 있다. 그래서 미국 하원도 과학적 연구목적에 한정해 인간배아 복제를 허용하자는 법안도 부결시켰다. 법이 배아복제를 허용할 경우 곧 인간복제 시험을 가능케 할 위험이 더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인간 생명은 정상적인 가정을 이룬 부부 사이에서 사랑의 결실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 인류 탄생 이후 일관된 자연질서다. 실험실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과학자의 손에서 생명이 태어난다면 이 땅의 질서는 파괴되고 인간의 존엄성은 더 이상 무의미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다가는 그야말로 100명의 아인슈타인과 1천명의 히틀러가 다시 탄생하지 말란 법이 없다. 공상과학소설에나 등장했던 미녀 상반신과 물고기 하반신의 인어공주나, 중생대 공룡의 부활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처럼 인간의 생명질서가 파괴된다면 전 인류가 연대해 '인류보존운동'이라도 벌이게 되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아니, 전율(戰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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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판 돈키호테 지면기사
'사라져간 중세의 기사도에 흠뻑 빠져 그 시절을 그리다 마침내는 정신까지 놓아버린 돈키호테. 그는 스스로 기사가 됐다는 착각 속에 갑옷을 입고 칼을 찬 채 광기와 몽상의 여행길을 떠난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부정과 비리를 도려내고 학대당하는 사람들을 돕는다며, 심지어 풍차와도 겨루는 등 좌충우돌하면서 우스꽝스러운 행적을 기록해나간다. 당연히 그런 그에게 돌아온 건 언제나 비통한 실패와 패배의 연속일 뿐이다’. 세르반테스의 풍자소설 ‘돈키호테’ 줄거리다.“인종격리 정책을 내걸고 1948년 대통령에 출마했던 스트롬 서몬드 상원의원이 당시 당선됐더라면 미국은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 상원의 트렌트 로트 의원(미시시피)이 얼마 전 이같은 발언을 했다가 호된 곤욕을 치렀다. 미국내 인권운동가 등의 항의가 빗발친 건 물론이고, 부시 대통령으로부터도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다. 결국 그는 그때까지 차지하고 앉았던 상원 공화당 대표직까지 내놓아야 했다. 내년이면 상원의 공화당 원내총무를 맡을 참이기도 했건만, 그 역시 과거 선조들의 영광(?)만을 그리다 돈키호테 꼴이 되고 만 셈이다. 지난 날 수많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붙잡아다 노예로 부려먹던 선조들의 세계가 그렇게도 그립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던 것일까.돈키호테는 그토록 가혹한 패배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가상한(?) 용기와 고귀한(?) 뜻을 조금도 꺾지 않은 인물로 그려져 있다. 로트 의원 또한 자신의 의지를 굽힐 뜻은 전혀 없는 모양이다. 상원 공화당 대표직 사임 후 첫 공식 발언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정적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든 희생양일 뿐이다”라고.유난히도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존중을 강조해온 나라가 미국이다. 그런 미국에서 로트 의원 같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상원의 집권당 대표직을 맡았을 뿐 아니라 원내총무까지 예정될 수 있었다는 게 좀처럼 쉽게 이해되질 않는다. 역시 크고 넓은 나라인지라 포용력 또한 한없이 넓어서일까. 그건 그만큼 또 다른 로트 의원이 많이 나올 수 있다는 의미도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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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판 송년회 지면기사
무능자대주(無能者大酒), 무능한 사람이 술만 잘 마신다는 말도 있듯이 '아함경(阿含經)'이라는 불경은 '음주육실(飮酒六失)'부터 가르친다. 술을 마시면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고, 온후한 성격이 변해 싸우게 되고, 명예를 잃어 나쁜 소문이 퍼지고, 성질이 거칠어지고, 지혜가 줄어드는 등 여섯 가지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술은 '백 가지 독의 으뜸(百毒之長)'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일본에선 술 잘 못마시는 사람을 '게코(下戶)'라 하여 '하치 인간'으로 여긴다. 오묘한 것은 또 '성스러울 성(聖)'자가 '맑은 술 성'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래선가 '聖'을 청주의 별칭으로 삼는다.적절히 마시는 주도(酒道)야말로 중요하다. 중국에선 즐거워하고(樂), 이야기하고(說), 웃고(笑), 춤추고(跳), 노래하는(唱) '양반오경(五景)'과 주정하고, 욕하고, 때리고, 울고, 토하는 '상놈오경'부터 가리는 주도를 들고 있고 임어당(林語堂)은 봄 술은 뜰에서, 여름 술은 들에서, 가을 술은 강물에 배 띄운 채, 그리고 밤술은 달빛 아래서 마셔야 한다고 말한다. 94년 일본 보건부(厚生省)가 작성한 '음주십계명'도 그럴싸하다. 웃어가며 마셔라,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라, 강권하지 말라, 주량의 눈금을 넘지 말라, 자정을 넘기지 말라 등.달랑 한 장의 달력하고도 며칠만을 남겨둔 채 전세계적으로 울려 퍼지는 송년회 건배 합창이 지구 별을 흔들 정도다. 구호 또한 여러 가지다. 치어스(미·영·호주), 프로스트(독·네덜란드), 아보트르 상테(프랑스), 토스트(캐나다), 친친(이탈리아), 사우데(브라질), 스하로쇼네 즈다로비에(러시아), 칸페이(중국), 간파이(일본) 등. 한데 외기 어려운 주도보다는 'say when' 한 마디라도 염두에 새기는 게 어떨까. 술잔을 든 사람에게 천천히 술을 따르면서 '어디까지 따라 주랴'고 묻는 예의가 '세이 웬'이다. 그래야 즐거운 송년회를 함께한 동료끼리 친구끼리 “주도 좋아하네” 해가며 무작정 마시다가 만취의 선을 넘어 그만 새까맣게 끊긴 필름으로 저승 문지방까지 넘나드는 '송명회(送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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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말리는 인물 지면기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東京)도 지사. ‘노(No)라고 말 할 수 있는 일본인’이란 작품을 써 일본 국내에선 문필가로도 제법 이름이 나 있다지만, 한국인에겐 그의 ‘제3국인’발언으로 더 잘 기억되는 인물이다. 재작년 4월, 그는 이런 말로 국내외 분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많은 제3국인과 외국인의 흉악범죄가 계속되고 있다. 지진이 일어날 경우 이들의 소요가 우려된다.” 여기서 제3국인이란 2차대전 전후 일본 거주 한국인과 대만인을 경멸조로 속칭해오던 말이었다. 당연히 우리 국민이 격분했음은 물론이다. 한편으론 그 옛날(1923년 9월초) 간토(關東) 대지진 때의 광기어린 대학살이 연상돼 새삼 몸서리 쳐지기도 했다.그 후로도 그의 기막힌 망언 버릇은 좀체 고쳐지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든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무작정 내쏟았다. “중국인의 일본 이주는 유전학적 공해다. 중국인 이주자들은 인종 오염의 주범이다”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러시아에 본때를 보여줘 북방 4개 도서 영토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한다” 등등…. 그야말로 천방지축 좌충우돌, 돈키호테가 따로 없었다. 그런 인물에 정색하고 분노했던 게 차라리 어이없을 정도다.그런 그가 최근엔 또 엉뚱하게도 노년 여성들을 향해 망측한 포문을 열었다. “문명이 가져온 가장 유해한 것은 할머니다. 여성이 생식능력을 잃고도 살아가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다”라고. 게다가 이런 말도 덧붙였다. “긴상자매(100세 이상 살았던 쌍둥이 할머니들) 나이 때까지 사는 것은 지구에 심각한 폐해다.” 참 입심도 좋은 못말리는 인사다. 그가 만일 한국에서 몇달 전 눈물깨나 쏟게 만들었던 영화 ‘집으로…’를 본다면 또 어떤 기발한 악담을 내뱉을지 은근히 기대(?)도 된다.결국 ‘할머니’발언으로 일본 여성들로부터 성차별 등을 이유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했다는데, 글쎄 그 정도로 여성들 분이 풀릴지 모르겠다. 그야 어떻든 그같은 돈키호테가 한국의 도지사 시장이 아니라는 게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다. 하긴 그런 인물을 국민이 뽑을 리도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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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大選) 체감온도 지면기사
우리나라 역대 최저기온 랭킹 1위는 1933년 1월12일 중강진의 -43.6℃다. 남한에서는 1981년 1월5일 양평에서 -32.6도℃를 기록한 것이 최저다. 양평 기록은 이후 '소주병이 얼어터진 추위'로 인구에 회자되곤 한다. 그러나 범위를 세계로 넓혀보면 한반도의 추위는 봄볕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북반구에서 가장 춥기로는 시베리아 내륙이 으뜸인데 베르호얀스크에서 -67.8℃를 기록한 게 기상관측 사상 최저기온 타이틀을 차지했다. 베르호얀스크 인근에 인구 6만의 도시 야쿠츠크가 있으니, 중강진이나 양평의 남북한 동포들은 감히 춥다고 나설 처지가 아닌 셈이다. 그런데 남극에서 기상관측이 시도되면서 시베리아도 머쓱해졌으니, 1960년 남극 소련기지에서 -88.3℃를 기록, 드디어 불멸의 최저온 세계 정상으로 등극한 것이다.추위가 -50℃ 이하가 되면 바람에 의해 다시 환산되는 체감온도가 무의미해진다. 즉 바람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마냥 추운 것으로 인체가 느낄 수 있는 추위의 한계다. 이 정도쯤 되면 '별의 속삭임'이 들린다고 한다. 숨속에 포함된 수증기가 차가운 대기와 접하자마자 얼면서 예리한 소리를 내는데, 바로 숨이 얼어붙는 이 음향이 '별의 속삭임'이다. '숨조차 얼어붙는다'는 표현이 비현실적이라고 함부로 단정할 일이 아니다. 당연히 이런 추위에서는 영웅도 두손 두발 다들어야 한다. 1812년 나폴레옹은 65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들어갔다, 동장군의 일격에 25만명만 살려서 겨우 빠져나왔다. 그 나폴레옹은 1815년 워털루에 내린 비 때문에 완전히 주저앉았으니, 그는 하늘이 버린 영웅이라 할만하다.갑자기 날씨 얘기를 꺼낸 이유는 대선 이후 국민들이 느끼는 정치체감 온도가 극단적으로 갈려서다. 노무현 당선자를 지지한 세대는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라며 열기에 들떠있는 반면, 반대했던 세대들은 왠지 모를 썰렁한 냉기에 몸을 움츠리고 있다. 선거 후유증이 세대간 벽으로 남을까 걱정이다. 이래선 안될 일이다. 승리한 세대의 건강한 열기가 보수적인 장·노년세대의 냉기를 따뜻하게 녹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