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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대통령 지면기사

    71년 아이티에 19세 대통령이 등장했던 것은 독재자 뒤발리에가 20세 이상만이 될 수 있는 공무원법을 뜯어고쳐 그의 아들을 세습토록 했기 때문이었다. 도(Doe) 육군상사가 검은 선글라스의 위풍당당한 얼굴로 80년 4월 쿠데타를 일으켜 라이베리아의 이른바 '서전트 프레지던트(육군상사 대통령)'가 된 것도 불과 28세 때였고 리비아의 카다피가 69년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것도 27세의 육군중령 때였다.합법적인 30대 대통령도 쌨다. 일륨지노프가 93년 러시아 칼미크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30세 때였고 가르시아가 85년 페루 대통령이 된 것은 36세 때였는가 하면 90년 아이티의 아르시티드는 37세, 94년 코스타리카의 올센과 89년 브라질의 콜로르는 39세였다. 40대 대통령은 더 흔하다. 미국의 케네디만 해도 43세(60년)였고 박정희 최고회의의장 때가 44세, 그의 5대 대통령 때(63년)가 46세였다. 작년에 당선된 볼리비아의 키로가는 41세, 94년 멕시코의 세디요와 콜롬비아의 삼페르는 각각 42세와 43세였고 96년 불가리아의 스토야노프가 44세, 바로 지난 달 에콰도르의 구티에레스가 45세, 지난 5월 콜롬비아의 우리베가 49세….그들에 비하면 노무현 당선자의 56세는 중후한 편이다. 전후(戰後) 베이비 부머 세대, 단카이(團塊) 세대로 지구 별을 대표하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클린턴 전 대통령도 노 당선자와 56세 동갑이다. 지난 10월 당선된 동티모르의 구스마오와 94년 권좌에 오른 핀란드의 아티사리도 46년생 동갑이다. 노 당선자는 그런 광복 후 세대에다 한글 세대이기도 하다. 당선 직후 현충원을 참배, 방문첩에 '멸사봉공하겠습니다'라고 한글 사인한 그대로다.한데 중국에선 세대교체를 '연경화(年輕化)'라고 한다. 장쩌민(江澤民)을 비롯한 70∼80대의 눈에는 50∼60대도 '가벼운 나이'다. 77세의 DJ나 지난 3월 78세로 4선 대통령이 된 짐바브웨의 무가베의 눈에도 56세는 가뿐한 나이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천명(天命)을 안다'는 나이도 한참 지난 56세에다 내일 모레면

  • 여론조사의 힘 지면기사

    반세기 전인 1948년 미국 대선에서 시카고의 한 신문이 토마스 듀이 공화당 후보가 트루먼 대통령을 꺾고 당선됐다는 오보(誤報)를 낸 적이 있다. 여론조사를 과신한 나머지 일어난 중대한 잘못이었다. 당시 트루먼이 그 신문을 들고 웃고 있던 사진이 걸작으로 남아 있음은 물론이다. 최근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도 '슬레이트'라는 잡지의 웹사이트가 출구조사 결과를 토대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조지 부시 텍사스 주지사를 19% 포인트 차로 따돌리고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우리나라에서도 여론조사의 '헛발질'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96년 15대 총선 출구조사에서 신한국당의 압승을 예측했다가 과반수 의석미달로 나타나면서 여론조사기관이 망신을 당했다. 2000년 16대 총선 출구조사에서도 예측을 깨고 한나라당이 압승했다. 하지만 이번 대선 결과를 보노라면 인터넷이나 미디어 선거가 자리잡아 가는데다 여론조사 방법도 과학화돼 여론조사가 정치판단의 보조수단에서 벗어나 현실정치를 직접 결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느낌이다. 우리 정치에서도 여론조사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이다.1987년 대선에서 본격 도입된 여론조사는 당시 한국갤럽이 선거결과 예측조사를 실시해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당선을 실제 결과와 2.2% 포인트 차이로 맞췄다. 그 때는 선거여론조사가 불법이었지만 선거법 개정으로 여론조사가 가능해진 92년 대선부터 여론조사는 활성화됐다. 선거 두달여를 앞두고 6차례에 걸쳐 후보자별 지지도 변화 추이를 조사한 결과 줄곧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6~9% 포인트 정도 리드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또 결과도 그렇게 됐다. 노무현 당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여론조사가 정치권의 신뢰를 얻는 결정적인 고비가 된 셈이다.이번 대선에서도 투표가 종료된 직후인 오후 6시 TV 방송 3사는 일제히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1.5~2.3% 포인트의 근소한 차로 노무현 당선자가 앞설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개표도 시작하기 전에 당선자의 예측이 나왔고 결과도 거의 적중했다. 밤새 개표를 기

  • 긍정과 부정 지면기사

    중국의 건국신화엔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등장한다. 여기서 삼황은 신농씨(神農氏)·복희씨(伏犧氏)·수인씨(燧人氏)를 가리키며, 신농씨는 농경을 발명했고, 복희씨는 수렵술, 수인씨는 불을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이들 삼황이 문명의 기반을 닦았고, 그 토대 위에 황제(黃帝:중국민족 최초의 조상)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뒤를 이어 전욱·제곡·요(堯)·순(舜)의 네 임금이 순서대로 중국을 다스렸다 하며, 이 다섯 임금을 통칭해서 5제(五帝)라 부른다.그런데 5제 가운데 마지막 두 임금인 요 임금과 순 임금은 덕으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을 뿐 아니라, 백성들도 아무런 근심 걱정 부족함 없이 역사상 가장 편안한 삶을 누렸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공자(孔子)가 ‘요·순시대’라는 말을 만들어 쓴 이래 지금까지도 요·순시대라면 태평성대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른바 정치의 이상향이라면 으례 요·순시대를 일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요·순시대는 과연 요 임금과 순 임금의 덕치만으로 이뤄졌던 것일까.행위과학분야에 피그말리온(Pygmalion)효과이론이란 게 있다. 어떤 행위요인에 대해 행위주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들이 그 요인에 긍정적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믿고 기대하면 실제로 긍정적 효과가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즉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주위의 예언과 기대가 행위자에게 영향을 주어 결국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좀더 쉽게 풀이하면 주변에서 스스로 긍지를 갖고 자신감을 심어주고 기대를 품으면 어떤 일이든 잘 풀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요·순시대라는 것도 두 임금의 덕치뿐 아니라 백성들의 이같은 믿음과 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때마침 어제 우리 국민은 새 대통령당선자를 뽑았다. 향후 5년간 이 나라를 이끌어갈 분이다. 다분히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국민들이 바라는 게 한 둘이 아닐 듯싶다. 이럴 때 이왕이면 피그말리온효과를 기대해보는 건 어떨까. ‘부정은 부정을 낳고 긍정은 긍정을 낳는다’고도 하던데.

  • 대통령 선거 지면기사

    후진국 대통령 선거야말로 가관(可觀)이다. 후보 수효부터가 그렇다. 93년 8월의 나이지리아 대통령 선거엔 무려 250명이나 출마했다. 중도에 포기한 후보도 있긴 했지만 마치 수백명이 참가한 마라톤대회를 연상케 했다. 오랜 군정 끝의 첫 민간 대통령 선거이긴 했지만 도대체 대통령 자리라는 게 얼마나 군침이 돌고 입맛이 당겼길래 250명이나 대거 몰려들었던 것일까.23명이나 출마한 아이티의 87년 11월 대통령 선거는 더욱 가관이었다. 놀랍게도 19세 최연소 대통령이라는 세계 기록을 세운 장 클로드 뒤발리에 부자의 30년 세습 독재 끝에 치러진 선거도 선거였지만 인구 660만의 95%가 문맹이었다. 그래서 투표 용지엔 마치 범인 수배 얼굴 같은 23명 후보의 사진을 싣는 것도 모자라 소, 돼지, 개 등 상징 가축 그림을 기호마다 그려 넣었다. 지난 5월의 말리 대통령 선거에도 24명이나 출마했다. 하기야 선진국인 프랑스의 지난 4월 대통령 선거에도 17명이나 출마하지 않았던가.선거 분위기도 엉망이었다. 아이티엔 폭력이 난무해 선관위 건물이 방화로 불타버리고 대통령 후보와 선관위 경호원 등 무려 500여명이 살해당했다. 짐바브웨 역시 대통령 선거를 앞둔 작년 11월 한 달 동안만도 6건의 정치적 살인과 115건의 고문이 자행됐다.그러니 이번 우리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는 얼마나 선진형인가. 첫째, 단거리 경주 선수처럼 7명→6명의 알맞은 후보가 나왔다. 둘째, 지난 10월의 유고연방 세르비아공화국 대통령 선거처럼 투표율이 45·46%에 그치는 바람에 무효(유효는 50% 이상)가 돼버려 재선거를 치를 우려도 없다. 셋째, 사담 후세인의 100% 득표율 따위를 흉내낼 창피스런 후보가 나올 염려도 없다. 넷째, 대통령 직접선거의 경제 손실은 워낙 엄청난 것이지만 그래도 이번엔 법정 선거 비용 341억원에도 못미칠 것이라고 한다. 다섯째, 역대 대통령 선거 중 금권·관권 시비와 고발이 줄어든 가장 깨끗한 선거라지 않던가. 21세기의 첫 대통령 선거가 드디어 오늘이다. 이제 일곱→여섯 잘난 후보 중에 '보다 잘난'

  • 투표 지면기사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마침내 무소불위 신군부정권의 항복선언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6·29선언이 그것이다. 그해 6월29일 아침 서울 관훈동 민정당사 9층 회의실에 나타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긴장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문을 읽어내려갔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각계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첫째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이로써 1972년 소위 10월 유신으로 빼앗겼던 대통령 직접선거권은 장장 15년만에 국민의 힘으로 되찾게 된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치른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마치 모처럼 참정권을 되돌려받은 기쁨을 한껏 만끽하듯 무려 89.2%라는 사뭇 높은 투표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런 기쁨과 감회도 세월이 가면서 차츰 식어간 것일까. 5년 뒤에 치른 14대 대선투표에선 그때보다 자그마치 10% 가까이나 떨어진 81.9%에 그쳤고, 또다시 5년이 지나 치른 15대 대선에선 그보다도 못한 80.7%에 머물었다. 이런 추세라면 당장 내일로 다가온 16대 대선에선 또 얼마나 투표율이 떨어질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투표 불참은 곧 나라의 장래를 결정하는 소중한 권리의 포기라든지, 국민으로서의 책무를 회피하는 일이라는 등 교과서적인 말을 모를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여겨진다. 오죽하면 2천500년 전 고대 아테네에선 정치적 무관심자에게서 시민권까지 박탈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때 아테네 민주정의 황금기를 연 페리클레스는 다음과 같이 정치적 방관자를 힐난했다고도 한다. “우리는 사람이 개인적인 일뿐 아니라 공적인 일에도 관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우리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무관심한 자로서뿐만 아니라 ‘쓸모없는 자’로 간주하기 때문이다.”설마 자진해서 쓸모없는 자로 전락하려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은데, 글쎄….

  • 독재자와 아들 지면기사

    최근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이라크 국민회의'와 '쿠르드 애국연맹' 등 50여개 이라크 반체제 단체 대표 300여명이 런던에 모였다. 목적은 사담 후세인 체제 붕괴 이후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우선 후세인 정권 핵심인사 49명을 재판에 회부하기로 했는데, 후세인이 포함된 것은 당연하고 그의 장남 우다이와 차남 쿠사이도 포함됐다. 정권이 무너지면 3부자(父子)가 심판대에 오르게 된 셈이다.우다이는 엽기적인 악행 때문이라도 사형감이다. 아버지의 경호원을 살해하고 숙부를 칼로 난자한 패륜아인 우다이는 공원을 지나다 새신랑과 거니는 신부를 호텔로 끌고가 사람들 앞에서 성폭행하는 등 천인공노할 성적(性的) 비행을 저지른게 한두 건이 아니다. 국가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그는 또 경기에 진 운동선수에게 변기에 머리처박기, 구덩이에 파묻기, 콘크리트로 만든 축구공 차게 하기 등 기상천외한 체벌을 가했다고 하니, 재판이전에 성난 군중의 돌팔매에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면수심의 장남이 못미더운지 후세인은 차남 쿠사이에게 친위조직인 공화국수비대 지휘는 물론 특수보안기구와 특수공화국군을 맡기는 등 편애하고 있다. 실제로 쿠사이는 후세인이 와병중일 때는 비공식 최고권력기구인 후세인 가족회의를 주재하며, 후계자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아들에 대한 후세인의 애증과는 상관없이 정권이 뒤집어지면 3부자는 멸문(滅門)의 심판대에 함께 서야 할 입장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독재자와 그 자식들은 이처럼 '정치공동체'로서 같은 운명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그런데 또 다른 유형의 독재자 아들이 뉴스에 올랐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주인공이다.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은 14일 보도에서 “김정남이 최근 프랑스에 비자를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며 그의 방문 목적이 파리 디즈니랜드 관광일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만일 추측이 사실이라면 김정남 역시 독재자의 철부지 아들이지 싶다. 아비는 지금 미국과 사활을 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데 '북한 KGB(국가안전보위부)' 부위원장인 아들은 미국

  • 핵 겨울 지면기사

    일본의 '금년의 한자'는 '돌아올 귀(歸)'자다. 북한에 납치됐던 5인이 24년만에 귀국했고 거품 이전 수준으로 돌아온 경제와 옛날 노래가 다시 유행하는 회귀현상 등에 의한 결정이다. '歸' 다음은 北→拉→愛→蹴 순이다. '北'은 북한, '拉'은 납치, '愛'는 출생한 황실 공주 이름, '蹴'은 월드컵 축구다. 한데 대한민국 '금년의 한자'라면 어떤 글자가 될 것인가. 단연 핵(核)을 비롯해 선거의 選→게이트의 門→도청의 盜→월드컵의 '蹴'쯤이 아닐까.핵전쟁 가능성엔 '설마'가 없다. 13일자 AP통신은 “북한의 핵 개발 재개 선언은 한국과 미국이 오랫동안 두려워했던 최악의 시나리오(worst-case scenario)”라고 했고 AFP통신은 “북한이 대통령 선거 중인 한국에 폭탄을 투하해 후보들이 낙진(落塵)을 막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고 타전했다. 일본의 요미우리(讀賣)신문도 13일자 사설에서 “북한이 핵 병기에 전용 가능한 병기급 플루토늄을 용이하게 생산할 수 있는 흑연감속로(黑鉛減速爐)를 재가동한다면 10년 이내에 연간 100발 이상의 핵병기를 양산할 수 있다”고 썼고 14일자 아사히(朝日)신문 역시 “미국과 북한이 '지와지와' 위험 수역에 들고 있다”는 제목을 달았다. '지와지와'란 마치 홍수 때의 한강 수위처럼 싸목싸목, 천천히 조금씩 차오르는 모양이다.94년 당시도 위기였다. “북한 핵 관련 시설 폭격과 함께 수십만명을 동원하는 전쟁 계획을 수립했었다”는 게 지난 10월20일자 워싱턴포스트지의 페리 전 국방장관 기고문 요지였다. 북한의 핵 개발 의혹만으로도 94년 상반기를 한반도 전쟁 준비로 보냈다는 것이다. 미국이 지난 2월28일 공개한 녹화 테이프 내용도 “베트남전 때 핵 사용을 검토했었다”는 닉슨의 대화였다.핵전쟁은 인류의 종말만 부르는 게 아니다. 핵전의 연기와 먼지 등이 대기권을 뒤덮어 수개월 또는 몇 년 동안 어둠이 덮이고 기온이 20∼30도나 곤두박질쳐 생태계 파괴는 물론 농사조차 불가능하다는 게 이른바 '핵겨울'이라는 것이다. 이 음산한 회색 겨울이 제발 '설마'로만 끝나는

  • 한국판 장미전쟁 지면기사

    장미는 5월의 여왕이라고도 한다. 오랜 세월동안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뭇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왔다. 클레오파트라가 애인 안토니오를 위해 마루에 깔았던, 나폴레옹이 조세핀을 위해 침실에 뿌린 꽃도 장미다. 경제전망의 청신호가 켜졌을 때도, 증시(證市)의 전망이 밝을 때도, 또 이번 대선 후보들이 희망적인 공약을 내세울 때도 여지없이 '장밋빛'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닌다. 그 만큼 장미가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황홀경과 아름다움 그것이다.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꽃을 얻을 수 없다는 격언도 있고 시인들은 가시가 있어 더욱 아름답다고 노래한다. 지구상에 초록 말고는 별의별 색을 다 갖추고 있을 정도로 1만5천여종이 넘는다. 1455년부터 무려 30년간에 걸친 이른바 '장미전쟁'도 있었다. 영국 왕실에서의 왕권획득을 위한 귀족간 내란으로 랭커스터가왕가 붉은 장미, 요크가가 흰 장미를 각각 문장(紋章)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했다.우리나라에서도 6년간에 걸쳐 지리하게 끌어온 장미분쟁이 일단락됐다. 12일 대법원이 국내 화훼업자들이 독일의 세계적인 장미 육종회사인 코르데스사(社)를 상대로 벌였던 장미를 둘러싼 분쟁에서 한국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는 장미에 대해 외국 육종회사들이 로열티를 지불하라고 주장하고 나선 이래 1심과 2심에서 무승부를 이루고 이번 최종심에서 코르데스사(社)의 '레드 산드라(Red Sandra)'에 대해 상표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이로써 가뜩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던 국내 화훼농가는 한시름을 놓게 됐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국내 농가는 물론 화훼전문기관에서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국제무역에서 로열티 지불을 둘러싼 분쟁이 계속되고, 뉴라운드와 다자간 무역협정 등 통상의 장벽이 높아가기 때문이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뚜껑에 몰래 가져왔던 시대와 신품종 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이 있는 시대는 엄연히 다르다. 농촌진흥청에서도 국산 장미품종을 개발하고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앞으로 계속될 농산물 관련 무역전쟁에서도 이길 대책을 미리 준비해야 할 때다.

  • 멋쩍은 물음 지면기사

    저무는 한길에//맨발로 달리는/신문팔이 아이//매서운 겨울바람/뒤쫓아 달립니다.//“신문, 신문, 신문삽쇼.”//아이가 소리지르면/바람도 소리칩니다.//춥지 않습니다./배도 고프지 않습니다.//싸움이 끝나는 날//일선 가신 아버지가/돌아오실 때까지//그 아이는/견디는 아입니다. 〈이종택님의 동시 ‘신문팔이 아이’〉그때는 정말 그랬다. 비록 전쟁(6·25)통에 폐허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으며 너도 나도 헐벗고 굶주렸지만, 슬픔 중에도 꿈은 잃지않고 가꾸어나갔다. 이 시에 나오는 신문팔이 아이처럼 전선에서 싸우는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또 전쟁이 끝나면 헤어진 가족을 되찾을 수 있고, 어떻게든 폐허를 딛고 새삶을 꾸릴 수 있다는 기대와 의지가 있었기에. 그래서 추운 것도 몰랐고, 배고품도 견딜 수 있었다.어디 그때 뿐이랴. 지금의 어른들이 아이 시절 찌든 가난을 미처 벗지 못했으나, 그래도 누군가 “이담에 커서 무엇이 되고싶니”하고 물으면 신이 나서 이렇게들 대답했다. “대통령이요, 군인이요, 경찰관이요, 비행기 조종사요, 마도로스요, 의사요, 선생님이요…”라고. 직업의 가짓수가 몇 없다보니 다소 단순하긴 했어도 나름대로 열심히들 미래의 꿈을 펼쳐보였다.얼마 전 한국교육개발원이 도시 저소득층 초·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무려 30.6%나 “미래에 희망이 없다”고 응답했다 한다. 모든 게 아름답고 신기하게 보이는 청소년기는 한창 희망에 부풀 나이라고들 하던데. 저소득층인 만큼 가난에서 오는 좌절감일까. 그렇다면 최근 “물고기처럼 자유스럽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초등학생의 경우는 또 어떻게 설명이 될까. 그리고 전쟁의 폐허위에서, 찌든 가난 속에서도 꿈을 가꾸었던 지금의 어른들은….어린이는 “꿈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꿈이 있기에 생기와 웃음이 있고, 그 꿈을 키우면서 성숙하고 발전한다고들 하던데…. 누가 이 아이들에게서 꿈과 웃음을 앗아갔을까. 어른된 처지에서 염치는 없지만, 부질없는줄 번연히 알면서도 멋쩍게 물어본다.

  • 대선 공약(空約)죄 지면기사

    대통령 선거든 무슨 선거든 공약 남발엔 첫째 부도 책임이 없다. 둘째 그 어떤 법에 저촉될 염려도 없다. 셋째 '공약 위반 죄'나 '공약(空約) 예약 죄' 같은 게 있어 덜커덕 걸려들 리도 없다. 넷째 돈 한 푼 안들이고 한껏 생색 잔치를 베풀 수 있다. 다섯째 수백 가지 공약이 허공의 쓰레기로 사라져도 쓰레기 수거비 한 푼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맘놓고 정신 놓고 대선 공약을 남발할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공약 위반 죄' 같은 걸 신설하면 어떨까.공약 남발을 '주작부언(做作浮言)'이라 한다. 터무니없이 '뜬 소리' 즉 헛소리를 지어낸다는 뜻이다. 또 실천도 하지 못할 것을 떠벌려 놓고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는 뜻으로 '대언불참'이란 말도 있다. '참'은 '斬' 밑에 '心'이 붙는 '부끄러울 참'자다. 한데 그 대언불참의 대표적인 주자들이 바로 '시냇물이 없는데도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공약하는 정치가'라는 게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의 말이다.대언불참, '식언(食言)의 대가'라면 히틀러부터 꼽힌다. 그는 파펜(Papen) 정부에 협조하겠다고 하고서도 그 정부에 대항해 싸웠고 뮤니크(뮌헨)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면 자살하겠다고 호언하고서도 자살하지 않았다. 우리 대통령들의 식언 사례만 해도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92년 대선 때 3당이 내건 핵심 공약 실천비만도 무려 150조원이 든다는 게 전경련의 분석이었다. 어느 후보는 3년 내에 300억달러의 무역 수지 흑자에다 아파트를 반값에 공급하겠다고 했고 어느 후보는 조선왕조 부활과 국회의원 폐지 등 기상천외한 공약을 하기도 했다.말도 안되는 공약까지 남발하느니 차라리 보드카 값 인하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91년 러시아 대선에서 옐친과 리슈코프에 이어 3위를 차지했던 지리노프스키가 가상하다 할까. 꾀로 남을 속이는 게 사기(詐欺)다. 지키지 못하는 대선 공약도 물론 잔꾀로 속이는 건 아닐지라도 국민을 속이는 건 속이는 것이고 사기는 사기다. 또 한 분의 '위대한 대선 공약(空約)자'가 나오지 않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