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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줄어든 工大지망 지면기사

    마크 트웨인이 세태 풍자소설 '금도금시대'(The Gilded Age)를 출간, 정재계와 사회부패상을 비판한 것이 1873년이었다. 그만큼 19세기 말 미국은 배금주의가 팽배했다.이러한 시대를 살아온 철강왕 A 카네기가 1902년 1천만달러를 들여 카네기 연구소를 설립한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대사건이었다. 지난 1991년 일본과학계가 이 거액을 인건비 기준으로 해서 91년 화폐가치로 환산한 결과 무려 2조6천억엔에 달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기업인들의 인식은 과학연구는 돈만 삼키는 위험한 사업이었다. 카네기는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경제적 부를 쌓은 미국이 유럽국가에 있는 과학연구소처럼 기초과학연구의 체계를 갖추는 것이 국력에 상응하는 품위이자 위신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몇 달뒤 록펠러 부자가 600만달러를 들여 기초의학연구소를 세웠고 1930년에는 수학과 이론 물리학의 센터인 프린스턴 고등연구소가 설립됐다. 이로써 미국에서도 과학자가 사회적인 대접을 받는 기틀이 다져진 것이다.그러나 2차 세계대전까지만 해도 유럽은 여전히 과학의 전당, 기술 창조의 메카로 군림했다. 미국이 높은 임금과 파격적 대우로 유럽의 과학 두뇌를 유치하고 국내 인재 양성에 열 올린 결과 60년대 미국 과학기술자들의 임금은 유럽에 비해 거의 두배에 달했다. 이로 인해 61년부터 65년까지 5년동안 유럽의 저명 과학 기술자 5만여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다른 외국과의 격차는 줄었지만 미국에서 이러한 과학 기술자 우대 정책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정부는 최근 학생들의 이공계 기피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이공계 졸업생에게 병역혜택을 주는 등 방안을 마련중이라고 한다. 종전에 최고 7대3으로 이공계 응시자가 많았던 대학 수능시험에서 지난해에는 10대5의 비율로 인문계 응시자가 많아지자 정부가 대책을 서두르게 된 모양이다. 그러나 이공계 대학 지망생을 늘리기 위해서는 과거 미국이 보여준 것과 같은 과학 기술자가 우대받는 풍토조성과 지원이 더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 이와 함께 우수 이공대생 확보를 위해 대입 수능시험후 인문 이공계간 교차 지원을

  • '악의 축' 지면기사

    온갖 동물들이 홍수를 피해 '노아의 방주'로 몰려왔다. 선(善)도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러나 노아는 “짝이 있어야 태워 준다”며 배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선은 숲으로 돌아가 짝을 찾다가 악(惡)을 데려왔다.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게 된 연유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이야기로 미루어 선이 먼저인 것 같지만 아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동시에 따 먹었고 그의 아들 가인(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여 인류 최초의 악의 화신(化身)인 살인자가 됐다. 제우스의 '판도라 상자'에서도 악의 종류만 쏟아져 악이 우선인 것 같지만 선과 악의 시작은 동시로 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인류 역사는 가능하고 그래야 흥미롭고 지루하지 않다.선과 악의 두 축이 세상을 이끈다. 축(軸)이란 수레 양쪽 바퀴 가운데 구멍에 끼우는 긴 나무 또는 쇠다. 그러니까 네 바퀴 수레엔 앞뒤 두 개의 축이 끼워진다. 그중 앞 뒤 어느 축이 악의 축인지, 악의 축은 왜 필요한지, 구약성서 '욥기'의 악이 존재하는 이유와는 상관없이 악의 축은 늘 끼워져 있게 마련이다. 가인과 아벨, 다윗과 골리앗, 예수와 헤롯왕, 걸주(桀紂)와 우탕(禹湯), 공자와 도척처럼 말이다. '악이란 흉한(亞) 마음(心)이다. 마음먹기 달렸다' '기(氣)에는 선과 악이 함께 들어 있다(퇴계)'는 등의 주장은 실감나지 않는다. 십자군 등 종교전쟁처럼 선악 인식이 확연해야 짜릿하고 지킬박사와 하이드, 이반과 알료샤, 절대 반지를 둘러싼 뚜렷한 선과 악의 결투(반지의 제왕), 흥부와 놀부, 콩쥐팥쥐 등 모든 소설, 영화의 주인공 또한 선악 대비가 뚜렷해야 작품답다.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한 부시의 발언이 세계적인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2차 대전 때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가 '악의 추축(樞軸)'으로 불렸지만 아무튼 북한의 반발이 거세다. “능력없는 북한을 거명하는 것은 공항에서 80세 수녀를 알몸 수색하는 것과 같다”는 워싱턴포스트의 평도 모욕적이다. '악의 축'이 아니라는 것을 북한은 서둘러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 카드 빛 지면기사

    최근 카드 빚 때문에 빚어지는 사건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얼마 전 마산에서 카드빚에 쫓긴 한 여대생이 자살하고 충주에서는 20대 두명이 카드빚을 갚기 위해 중학생을 납치, 가족에게 돈을 요구하다 붙잡혔다. 어제는 또 20대 여성 3명이 미국 입국이 거부됐는데 귀국후 조사과정에서 이들이 카드빚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알선 업자의 소개로 미국 윤락업소에 취업하려 했음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카드 빚으로 인한 이같은 불행한 일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카드 빚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중남미의 윤락 업소까지 진출, 멕시코시티에는 2년전부터 한국인 여성의 윤락 유흥업소 5곳이 새로 생겨 성업중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카드 빚을 갚아주면 동거생활등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인터넷 동거사이트에 글을 띄운 여성도 있다고 한다.카드 빚 부작용을 우려하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월스트리트저널지는 지난 2000년 7월 6일자에서 미 국민1인당 평균 7천500달러의 카드 빚을 지고 있고 개인의 빚은 무려 6조5천억달러에 이르고 있다며 이들 개인이 파산할 경우 금융불안이 우려된다고 했다. 이 신문은 카드회사나 은행들이 파산신청을 한 사람들에게까지 신용카드를 남발하는 것이 주요 원인이라고 보도했다. 우리나라의 잇단 카드빚 사고도 생각해 보면 이러한 개인 파산과정의 한 단면이다.미국이 카드 남발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처럼 마구잡이는 아니다. 미국에서 카드를 처음으로 발급 받으려면 반드시 1년이상의 은행거래를 통해 신용을 쌓아야 가능하다. 이에 비해 한국은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거리에서도 아무에게나 발급해준다. 모집인에게 카드회원1명 유치할 때마다 1만원 이상의 수당을 주기 때문이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이로인해 신용카드 발행장수가 지난해말 현재 7천500만장으로 작년 한햇동안 23%나 늘었고 신용카드 대출액도 무려 157조원으로 97년보다 거의 5배나 늘었다는 것이다. 주로 주택담보 대출인 가계빚 316조원과 함께 새로운 은행부실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마침 금융감독원이 이에 대한 대

  • 묘한 인심 지면기사

    ‘교외의 근사한 집에서 출발한 이민생활은 그러나 머지않아 뒤틀어졌다. 한국에선 명문대 출신에다 회사 간부까지 지낸 아버지였지만, 이곳에선 어떤 회사도 아버지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살림은 급격히 쪼들렸다. 결국 아버지는 할렘 근처의 카드가게 의류공장 등을 전전하다 자그마한 세탁소 일로 어렵사리 삶을 꾸려가야 했다. 미국생활 10년, 아버지는 산더미같은 빚과 수치심, 인종차별, 따돌림 등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했다. 그가 폭설이 내린 뉴욕동부 퀸스의 한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을 때 그의 주머니엔 단돈 2달러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몇해 전 아버지의 유골과 함께 고국을 찾은 어느 이민자 아들이 LA타임스에 기고한 글 내용이다. 한국계 이민자들이 꿈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힘들고 서러운 건 비단 아메리칸 드림에서만 겪는 일이 아니다. 코리안 드림을 좇아 한국에 몰려온 30만 외국인 근로자들의 애환과 고통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형편없는 저임을 받으면서도 한국인들이 3D라고 기피하는 힘들고 더럽고 궂은 노동을 하루 12시간 넘게 감내하고 있는 게 대부분 그들의 삶이다. 그나마 그들의 약점을 이용한 임금체불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상습구타 성폭행 등 갖은 핍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오죽 견디기 어려웠으면 며칠 전 포천에선 100여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이 집단 파업을 벌이기까지 했다. 다행히 나흘만에 타결점을 찾았다지만, 지금 같아선 제2, 제3의 포천사건이 다시 없을는지도 의문이다.미국 등 서방세계로 이민간 한국인들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차별과 편견, 비인간적 대우라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 우리인데도 정작 국내의 외국인 근로자들을 갖가지로 핍박하는 걸 보면 세상 인심이라는 게 참 묘하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네가 미국 등에서 받는 서러움을 대신 그들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려는 유치한 감정들이 발동해서일까. 아니면 강자보다도 되레 더 약자를 괴롭힌다는 약자들의 소인배 근성일까.

  • '일본주식회사' 지면기사

    요즘 하루 평균 100명의 일본인이 자살한다. 장기 경제 불황 탓이다. 게다가 '뉴스위크' 도쿄지국장 조지 워프리츠의 30일자 '일본주식회사' 리포트가 충격적이다. 그는 몰락하는 다이에그룹과 일본 경제를 'King of the zombies'라고 했다. zombie(좀비)란 마법으로 되살린 송장, 체온만 남아 있는 산 송장(未冷屍)을 뜻한다. 일본 경제가 산 송장 기업들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것이다. 다이에는 300여 기업, 356개 점포, 연간 매출 2조9천억엔, 직원 5만명의 대 유통그룹이다. '카리스마-나카우치와 다이에의 전후(戰後)'라는 책과 자서전 '유통혁명은 끝나지 않았다-나의 이력서'가 증명하듯 설립자 나카우치는 50년간 확장만을 거듭해온 입지전적, 신화적 인물이다. 그런 다이에가 부채 2조5천600억엔에 긴급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1월 중 70%의 사업을 정리한다는 것이다.경제대국 일본이다. 95년까지만 해도 세계 500대 기업의 매출 순위 1∼4위를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이 휩쓸었고 아시아 500대 기업의 17위까지를 석권했다. 수출도 우리가 623억달러였던 89년 그들은 2천751억달러였고 우리가 95년 10월 달성한 1천억달러를 일본은 16년 전인 79년에 해냈다. 금년 예산도 112조원과 81조2천300억엔 차이다. 그런 일본이 90년대 들어 66개사가 파산했고 미국 기업 부채의 2배, 슬로바키아 수준의 신용 등급, 4월1일부터 1천만엔 이상 예금 보장 중단, 기업 부실 채권 224조엔에다가 5.6%의 사상 최악 실업률, 주식시장 하락, 환율 134엔대 등이 엎쳤고 '3월 금융위기설'까지 덮친 것이다.그뿐 아니라 105년 역사의 경제지 '實業の日本'까지 3월호로 휴간되고 국립대학 101개 중 24개가 통합에 합의했다. 더욱 억울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재건 지원금이다.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2억9천600만달러인데 왜 일본이 5억달러나 내야 하는가'다. 우리는 4천500만달러라고 했다. '경제 동물'에서 '경제 인간'으로 진화(?)하려는 그들의 고통이 커 보인다. 월드컵이 과연 일본 경

  • "모두 죽여라" 지면기사

     ‘베트콩 기습으로 병력 3분의 1을 잃은 미 제11보병여단 찰리중대 윌리엄 켈리 중위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을주민 중에도 베트콩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주민 전원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때마침 전우들의 죽음에 분노해 있던 병사들은 주민들을 마을회관 앞에 모아놓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미치광이 사격은 어린이를 포함, 최소한 504명이 목숨을 잃고 나서야 겨우 그쳤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8년 3월 16일 벌어진 참혹한 밀라이마을 대학살사건 전말이다. 밀라이에 버금가는 대학살은 6·25전쟁 때 한국 땅에서도 벌어졌다. 가장 유명한 게 지난 99년 AP통신에 의해 폭로된 ‘노근리 사건’이다. 1950년 7월 26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의 철교밑 터널 속에 있던 피난민들을 향해 미군들이 무차별 사격, 수백명이 살해된 사실을 AP통신이 들춰낸 것이다. 당초 미국은 이를 완강히 부정했으나 유족들의 강력한 요구로 한미공동조사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해 1월 ‘노근리 사건은 철수중이던 미군에 의해 피난민 다수가 사살된 사건’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마침내 미군의 민간인 학살행위를 공식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발포가 상부 명령에 의해서인지 여부는 미국측의 일관된 부인으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두리뭉실 넘어갔었다. 그리고 1년, 영국 BBC방송은 며칠 전 ‘6·25 때 미군지휘부가 노근리를 포함한 여러 곳에서 양민에 대한 무차별 사격명령을 내린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BBC는 내달 1일 ‘모두 죽여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물을 방영, 이런 사실을 확인시켜줄 것이라고 한다. 방송은 ‘모든 피난민들에게 발사하라’는 등 민간인들에 대한 사살명령 문서가 발견됐다고 밝히고 있다. 한사코 우발적 사건임을 주장해온 미국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자못 궁금하다. 노근리의 진상은 정녕 무엇일까. 비록 반세기 전 일이라지만 진실을 규명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 그나마 외신(外信)에 의해서나 겨우 하나 하나 알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처지도 꽤는 답답하다.

  • 바둑의 스포츠化 지면기사

     프로 바둑기사들은 시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직한 수졸(守拙·초단), 젊고 어리석은 약우(若愚·2단), 싸움을 좋아하는 투력(鬪力·3단)의 과정을 거쳐 조금 재주를 부릴 줄 아는 소교(小巧·4단)에 이른다. 그리고 지혜를 쓸 줄 아는 용지(用智·5단)와 이치를 깨닫고 통하는 통유(通幽·6단)가 돼야 비로소 모양새와 실용을 갖추는 구체(具體·7단)가 된다. 그 다음에야 조용한 마음으로 세상을 조감할 줄 아는 좌조(坐照·8단)에 이르러 신의 경지라는 입신(入神·9단)의 단계에 도달한다. 냉엄한 승부의 세계에서 바둑의 고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뼈를 깎는 몸과 마음, 실전의 수련이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명칭들이다. 이러한 바둑은 때로는 협상을 통한 평화, 태풍과 전운, 피흘리는 치열한 공방전,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술수 등을 반상에 수담(手談)을 통해 펼치는 묘미로 한·중·일 3국에서는 일찍부터 가장 많은 애호가를 확보하고 있는 두뇌 스포츠로 자리 잡아왔다. 반상에서는 지위·학력·연배없이 두 당사자에게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며 361개 착점 어디에 두어도 상관없는 자유 평등의 민주주의의 원칙이 지배할 뿐 부정 부패의 소지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바둑이 대한 체육회로부터 정식 스포츠 종목으로 인정 받았다. 서양의 체스나 브릿지 게임이 IOC(국제 올림픽 위원회)로부터 이미 지난 90년 스포츠 종목으로 인정됐음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늦은감이 있다. 바둑이 한·중·일 3국의 틀을 벗어나 세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79년 일본이 처음 40여개국이 참가하는 세계 아마추어 바둑선수권 대회를 열면서부터였다. 그러다 1988년 일본의 후지쓰배, 그 이듬해 대만의 잉창칭배, 90년 한국의 동양증권배등 세계선수권대회가 잇달아 창설됨으로써 국가간 실력비교도 가능해졌다. 한국은 1993년 진로배 국가대항전 우승과 이들 3개 대회의 싹쓸이 우승으로 세계최강국으로 군림 지금까지 거의 10년동안 왕좌를 놓치지 않고 있다. 중국은 바둑 종주국으로, 일본은 바둑 선진국으로 자부하는 가운데 한국은 바둑 최강국의 입지를 확실히 다진

  • 외척의 비리 지면기사

     작자 미상의 전기체(傳記體) 고대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은 한마디로 주인공 인현왕후의 덕행록이자 찬양록이며 장희빈과의 선악대위록(善惡對位錄)이다. 그만큼 인현왕후는 '仁顯'이라는 이름 뜻 그대로 어질고 착했다. 장희빈의 농간으로 폐비가 됐어도 그녀에 대해서, 또는 지아비 숙종을 향해 일언반구의 볼멘 불평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 인현왕후의 인품은 전적으로 아버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에게서 받은 감화 덕이었고 부전여전(父傳女傳)의 내력 그대로였다. 그는 조선왕조의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의 문하생으로 그 스승에 그 제자답게 경서(經書)에 밝고 사림간에 명망이 높았지만 그보다는 숙종의 장인, 즉 외척(外戚)으로 단 한 마당의 세도도 부리지 않은 채 58세의 삶을 마감한 그 점으로 더욱 돋보이는 인물이다. 성종 때 승지 벼슬로 있던 임금의 장인이 있었다. 그가 고급 자단향(紫檀香) 목재로 호화주택을 짓고 뻐긴다는 소문이 성종의 귀에까지 들리자 그를 불러 물었다. “그게 사실이렷다?” “소신이 어찌 그럴 리가 있겠사옵니까? 추측컨대 소신을 모함하는 무리들이….” 그러나 임금이 측근을 시켜 조사해 본 결과 사실이었다. 성종은 “지나치다”는 측근의 만류에도 들을 여유조차 주지 않은 채 처형토록 명령한다. 또 남인(南人)의 거두 허적(許積)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씨가 몸종을 보내 사사로이 친정을 돕도록 청탁한다. 허적이 거절하자 권세만 믿고 날뛰는 후궁의 몸종이 공갈을 친다. 허적은 즉각 때려죽이도록 명령한다. 이른바 '절월(節鉞)'이 상징하는 '생살여탈권'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숙종 때 영의정를 지낸 허적이 그 허적이다. 조선왕조만 해도 늘 외척의 세도로 얼룩졌다. 대원군이 동기간(형제자매) 없는 민규수(明成황후)를 며느리로 맞은 까닭 역시 요즘도 어느 TV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그대로 안동 김씨 외척의 60년 세도에 넌더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현대사는 어떤가. 이, 박 정권 때만도 건너뛴 외척의 세도는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숨이 찰 정도다. 작금 꼭 그 꼴

  • 맥도널드의 변화 지면기사

    맥도널드 햄버거는 곧 미국의 상징중 하나다. 그만큼 기업 이미지가 강하다. 맥도널드 햄버거의 기업 이미지가 강한 것은 빨간 코에 빨간색 둥근 모자를 쓴 광대 모습의 로널드라는 캐릭터 덕분이다. 공식 기록상 맥도널드 햄버거점이 처음 문을 연 것은 창업자 레이 크록이 1955년 미국 일리노이주 데스 플레인즈의 레스토랑에서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실은 이보다 훨씬 전의 일이다.뉴 햄프셔주 베드포드가 고향인 모리스 맥도널드와 리처드 맥도널드 형제는 영화배우의 꿈을 안고 1928년 할리우드로 갔다. 그곳에서 영화배우가 되는데 실패한 이들 형제들은 1948년 네온사인간판에 맥도널드라고 쓰인 햄버거 가게를 차렸다. 당시의 식당들은 대개 손님의 주문에 따라 음식을 팔았다. 그러나 맥도널드 식당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햄버거를 미리 만들어 15센트라는 파격적인 싼값에 팔았다. 이것이 맥도널드 햄버거의 효시다. 당시 밀크 세이크 대리점을 하고 있던 레이 크록은 이들 형제들에게 상표와 제조 기술을 다른 사업자에게 팔겠다고 제의, 승낙을 받고 1955년 정식 맥도널드 햄버거 1호점을 낸후 1961년에는 아예 이들 형제들로부터 맥도널드 햄버거의 운영권을 270만달러에 사들였다.현재 맥도널드 햄버거는 전세계 121개국에 2만9천여개의 점포, 150여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세계적 패스트푸드점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사세가 급신장한 것은 품질 가격 청결 고객위주의 영업전략이 주효했겠지만 광대 모습의 로널드라는 캐릭터가 큰 몫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런데 이 로널드 캐릭터가 프랑스에서는 맥을 못추고 거리에서 사라지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내 반(反)세계화주의자들의 반미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로널드 캐릭터가 1963년 미 워싱턴DC매장에 등장한후 처음 겪는 수모다. 그대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전통 만화의 주인공 아스테릭스(프랑스 골족의 영웅)를 캐릭터로 삼아 맥도널드 햄버거점 입구에 세워놓는다고 한다. 맥도널드가 추구하는 세계속 현지화(Glocalization)전략 때문이다. 기업의 세계 현지

  • 잘 사는 나라(?) 지면기사

    외식(外食)이라면 기껏해야 중국집 자장면 정도를 떠올리던 때가 있었다. 불과 20~30년 전 일이다. 그때엔 외식거리도 그리 흔치 않았지만, 자장면은 비교적 값이 싸고 집에서 먹지 못하는 별식(別食)이라는 점에서 거의 유일한 외식거리로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더구나 작업장이나 사무실 기타 상점들까지 전화 한 통화면 어디든 신속하게 배달되었기에 근로자들 뿐 아니라 회사원, 도시 상공인들의 한끼 식사로는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조금 살만하다는 도시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지, 특히 더 빈궁했던 농어촌에선 외식 자체를 꿈도 꾸지 못했었다.그러던 우리도 차츰 생활이 피어지면서 소위 외식문화라는 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외식거리도 다양해졌다. 자장면 정도는 이미 햄버거와 피자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고, 그밖에 일식(日食) 양식(洋食) 한식(韓食) 등도 나름대로 전문화 고급화를 내걸며 갈수록 세분화되어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도시가계의 음식료비에서 외식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10% 안팎에 머물던 것이 이제는 무려 36%(99년 기준)로 높아졌다. 외식금액도 가구당 월 2만2천원(88년 기준)에서 14만6천원으로 자그마치 540%나 증가했다. 참 많이도 발전했다는 느낌이 든다.연간 15조원어치의 음식물이 쓰레기로 버려진다는 발표가 나왔다(99년 기준). 15조원이라면 지난 99년 한햇동안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액 24조5천억원의 60%에 해당된다 한다. 이는 또 자동차 수출액 14조5천억원과 맞먹으며 농수산물 수입액 9조5천억원보다는 되레 1.5배가 많다는 계산도 나온다.더욱 안타까운 건 이처럼 엄청난 낭비액 가운데 절반이 훨씬 넘는 8조5천억원어치가 외식부문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외식이라면 자장면 한 그릇값도 아까워 주저하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한해에 몇조원씩을 버리면서도 외식을 즐기는 시절이 됐으니 우리나라도 분명 잘 살게는 된 모양이다.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30%에 불과하고, 끼니를 거르는 아동이 무려 16만명에 이른다는 게 좀체 믿겨지지 않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