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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정의 의자와 모래시계

    법정의 의자와 모래시계 지면기사

    지난해에 입적한 법정 스님은 땔감으로 쓰던 참나무 장작으로 의자를 만들고 그것에 '빠삐용의 의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화속 주인공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게 인생을 낭비한 죄 때문이었듯이, 스님도 그 나무 의자 위에 앉아 혹시 자신도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깊은 산속의 암자에서 명상과 참선을 하며 홀로 지내신 스님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경계를 해야 하는 마당에, 하물며 우리같은 속인들이야 시간의 속절없는 흐름 속에서 어찌 마음을 제대로 가다듬을 수 있겠는가. 시간이란 생각하면 할수록 복잡하고 까다롭기 짝이 없는 대상이다. 우리는 시간에 의해 태어나고 시간에 의해 죽는다. 시간은 우리를 낳고 또 거두는 것이다. 어찌보면 살아 움직이는 건 시간 자체일 뿐이고, 인간 개개인은 그 시계의 숫자판 위에서 째깍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미세한 바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인간이 시간의 흐름을 재는 작은 단위로 잠시 존재했다가 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래시계 속에 들어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한 해가 지날 때마다 365개의 모래 알갱이를 소모한다. 우리 발밑에서는 끊임없이 모래가 빠져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모래가 남아있지 않게 되면 우리의 생체 시계는 완전히 멎고 만다. 그러나 시간은 그렇게 가차없고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같은 것만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이란 무척 상대적이다. 뇌 의학과 관련된 임상보고서에는 몇 가지 특이한 사례들이 발표되고 있다. 뇌 작동에 이상이 생긴 한 남자는 시간의 흐름을 남들보다 더 빠르게 인식한다고 한다. 때문에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갈 때, 그 찻잔이 입을 향해 달려드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뇌의 해마 조직에 손상을 입은 한 남자의 경우에는 기억이 15분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시간의 역사를 감지하지 못하고 15분이라는 영원한 현재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 특별한 사례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시간이 항상 물리

  • 학교폭력 예방, 타인존중 학습으로부터!

    학교폭력 예방, 타인존중 학습으로부터! 지면기사

    지난 해 12월 친구들의 폭력에 시달리던 대구의 한 중학생이 자살로써 자신의 생을 마감한 안타깝고 슬픈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의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시·도교육감들과 함께 학교폭력 대책을 의논하고, 언론 매체들은 연일 학교폭력의 원인과 실태, 대책과 관련하여 전문가들의 백가쟁명(百家爭鳴)식 주장을 전하고 있다. 그동안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자살과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할 때마다 문민정부에서부터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쳐 현 MB정부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이 나서서 학교폭력 대책을 주문하고 교육과학기술부가 중심이 되어 학교폭력 종합대책을 세우는 등 매번 반복적 노력을 해 온 게 사실이다. 2004년에 제정된 현행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도 그러한 노력의 소산이었다. 이 법률은 학교폭력의 예방과 대책에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피해학생의 보호, 가해학생의 선도ㆍ교육 및 피해학생과 가해학생 간의 분쟁조정을 통하여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학생을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법률은 학교폭력을 예방하고 근절하기 위하여 국가, 지방자치단체, 단위학교 수준에서 해야 할 일들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장관은 학교폭력대책기획위원회를 구성하여 학교폭력의 예방 및 대책에 관한 정책 목표·방향을 설정하고, 학교폭력의 예방 및 대책에 관한 기본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여야 한다. 특별시·광역시·도에서는 학교폭력대책지역위원회, 단위학교에서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학교폭력의 예방과 대책에 대한 방안을 수립하여야 한다. 그리고 단위학교에는 전문상담실을 설치하고 전문상담교사를 배치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학교장은 학생의 육체적ㆍ정신적 보호와 학교폭력의 예방을 위하여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교육을 학기별로 1회 이상 실시하여야 한다.이렇게 법률을 제정하고, 교육과학기술부와 시·도교육청, 단위학교들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학교 폭력 예방과 근절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전개해 왔다고 얘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생들이 다른

  • 케빈 베이컨 6단계 법칙과 L2L

    케빈 베이컨 6단계 법칙과 L2L 지면기사

    미국 영화배우 케빈 베이컨은 1994년 한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할리우드의 모든 배우는 자기와 같은 영화에 출연했거나, 아니면 자기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는 다른 배우와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케빈 베이컨의 6단계'라는 게임도 나오고 책도 나왔다. 케빈 베이컨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풍자기사도 있었고, 심지어 케빈 베이컨이 알카에다와 연결되어 있다는 풍자기사도 있었다. 여섯 번만 거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결된다는 케빈 베이컨 6단계 법칙은 오늘날 SNS 활성화로 그 단계가 축소되고 있다.연결 단계가 간소화되려면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케빈 베이컨처럼 큰 연결고리가 있어야 한다. 물류에서 이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거점(hub)이다. 항공사들은 거점 공항 중심의 항로 개발을 통해 한정된 직항로 수를 갖고도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지역으로 운항한다. 거점(hub)-바퀴살(spoke) 방식에서 각 지역의 물건은 일단 거점으로 간 후, 그 거점에서 다른 거점으로 보내진 후, 다시 개별 지역으로 수송된다. 모든 지역은 거점에서 바퀴살로 연결되기 때문에 한정된 연결로를 갖고도 많은 개별 지역에 연결되게 하는 것이다.이러한 거점 중심 방식은 지역 간 연결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수도권 거점과 지방 거점을 각각 하나씩 운영하는 물류회사에서는 서울에서 춘천으로 물건을 운송할 때 대전을 경유할 때가 많다. 한 시간 거리를 네 시간 거리로 만드는 연결이다.특히 지방과 지방은 직접 연결되지 못하고 서울을 매개로 연결되는 경향이 강하다. 춘천에서 부산으로 갈 때 거리상으론 중앙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가깝지만, 시간상으론 서울을 경유해서 KTX나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지름길이다. 우리의 서울은 남한 전체의 지도상으론 서북쪽에 치우친 변방임에 분명하나, 연결 지도에 있어서는 중심이다.연결 단계가 거점을 통해 간소화되면 될수록 거점과 주변 간의 불평등은 심화된다. 세상이 연결되면 될수록 그 연결고리에 있는 사람들의 영향력만 커지지 연결고리에 없는 사람들은 주변에 머무르기가 쉽다.이에 비해 비(

  • 학교폭력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

    학교폭력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 지면기사

    지난 20일 한 대구 중학생이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해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매스컴엔 이 사건이 매일 보도되었고 인터넷에서는 사람들이 그 잔혹성이 얼마나 진화되었는지 통탄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그 원인과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하고 사람들은 망각할 것이다.그러나 이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방치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2011년 학교폭력 실태에 관한 청소년폭력예방재단의 자료에 따르면 재학기간 동안의 학교폭력 피해 경험을 묻는 질문에 대해 23%가 학교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응답했고, 이 중 54%는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폭력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폭력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매스컴 보도에 의하면 경찰조사 과정에서 가해자들은 과거에 별 탈 없던 평범한 학생으로 이 사건은 그저 장난이었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또한 가족구성원이나 경제적인 면에서 평범한 가정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래의 학생지도를 피상적인 개인가정환경이나 행동양태에 따라 소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심각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학생들 개개인에게 물어 보면 정직한 대답을 얻기 힘들지만 익명의 설문조사를 통해 학교 전체를 상대로 하면 의외로 학생들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또는 목격한 폭력사태나 따돌림, 그에 대한 문제의식, 신고의 문제점 등을 말함으로써, 사태 파악이나 해결 방법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학교폭력의 원인으로는 핵가족 중심구조에서 자란 결과, 부모가 과잉보호하여 아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잠재된 폭력성이 나타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이런 현상은 중국에서 '소황제'라고 불리는 무례한 아이들이 양산된 경우와 같다. 학교에서는 입시교육 뿐만 아니라 올바른 인성교육을 통해서 공동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교육해야 한다. 선생님들이 모여서 해결 방안

  • 삼년상의 정치학

    삼년상의 정치학 지면기사

    삼년상은 유교의 고유한 의례다. 군주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사후에는 삼년상을 치렀다. 임금이건 평민이건 사람의 자식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회계든, 농사든, 학제든 주로 1년을 단위로 삼는데 부모의 장례는 어째서 3년이어야 할까? 사람이 태어나 제 발로 걷고, 제 손으로 숟가락을 뜨기까지 3년간은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유교는 설명한다. 그 동안 부모는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는' 은혜를 베푼다. 이 보살핌은 일방적이기에 절대적이다. 그것을 되갚을 수 있는 기회는 평생토록 없다.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야 그 은혜를 유추하여 되갚는 의례를 재현해 볼 따름이다. 즉 태어나서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3년의 경험이 삼년상의 수치적 근거다. 오늘날로 당겨와 해석하자면 삼년상은 부모의 죽음을 기화로, 인간 삶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명상하는 '인문학 페스티벌 기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나아가 삼년상에는 더 깊은 뜻이 들어있다. 부모에게조차도 '빚지고는 못 살겠다'는 오연한 자존심 말이다. 부모에게 입은 신세조차 빚으로 여기고, 그 빚은 장례를 통해서라도 되갚고야 말겠다는 '자존심 강한' 인간관이 그 밑에 깔려있다. 그래서 옛날에는 부모의 죽음에 삼년상을 치르고서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통치자의 경우에서 발생한다. 과연 한 나라의 안위를 책임진 국가경영자가 제 부모의 장례 때문에 3년씩이나 공직에서 물러나 있어도 될 것인가? 유교를 표방한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자주 삼년상 문제가 정치적 이슈가 되곤 했다. 특히 국가건설 초창기에는 인재풀이 좁았기에 몇몇 관리들이 삼년상을 치르느라 물러나면 국가경영에 큰 타격을 입곤 했다. 요즘 인기를 끄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주인공인 세종의 처지가 그러했다. 그래서 세종은 한 달을 한 해로 쳐서, 삼년을 석 달로 줄이는 편법을 쓰기도 하였다(이것을 '단상'이라고 부른다).지난 주말, 북한의 통치자 김정일이 죽었다. 그 아버지 김일성의 사후에 '유훈

  • "시적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시적으로, 인간은 거주한다" 지면기사

    건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내가 믿기로는 그 건축이 서는 땅이다. 이 땅과 관련한 '지문'이라는 단어가 요즘 내 건축의 중요한 화두며, 지난 일년 동안 써 온 이 칼럼의 주제어이기도 했다. 지난 글을 통해 나는 서양과 우리의 도시에 대한 차이를 역사적 맥락을 통해 설명했다. 서양인들은 도시를 머리 속에서 구상하고 이를 평지에서 실현한 반면, 우리의 선조들은 땅을 먼저 이해해서 그 생리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으며, 그 맥락을 다치지 않도록 가만가만히 마을의 구조를 얽고 섞는다고 했다. 지맥과 산수, 명당이 그런 말이며 배산임수가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로마군단 캠프가 유럽 중요 도시들의 원형이니 이 임시적이고 표준화된 도시는 결국 땅과는 무관한 다이어그램이었으며, 그 관습이 르네상스 시절, 더욱 다이어그램적인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 도시는 반드시 평지에 세워졌다고 했다.우리는 다르다. 산과 계곡과 물길로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 놓은 땅 위에 지어지는 우리의 마을은 이미 공간적이며 입체적이다. 랜드마크는 인공적인 게 아니라 자연의 산세와 물길이 이루는 풍경이었고, 그 속에 자리하는 집이 땅과 밀착되지 않으면 오히려 죄스러운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잠시 기대어 살 뿐이며, 집의 수명이 다하면 주된 재료인 흙과 나무는 그대로 다시 땅으로 귀속되어 자연과 합일되는 이치였으니, 자연을 깔고 뭉개며 세우는 서양의 집과는 그 근본이 다른 것이다.터무니라는 말이 있다. '터-무늬'에서 파생된 이 말은 말 그대로 터에 새겨진 무늬를 뜻한다. 터무니없다는 것이 근거없다는 말이고 보면, 터에 새겨진 무늬를 몽땅 지우고 백지 위에 다시 짓는 재개발 같은 사업은 터무니없는 사업이요, 그 결과로 얻어져 판에 박은 아파트에 사는 삶은 터무니없는 삶 아닐까. 그래서 도시의 유목민 된 우리의 삶은 떠돈다.이 터무니를 한자말로 지문(地紋)이라고 고치고, 자연의 무늬 위에 삶의 기록이 덧대어지므로 문양 문(紋)을 글월 문(文)으로 바꾼 게 지문(地文)이다. 땅은 엄청나

  • 시장이 청중 수준을 만든다

    시장이 청중 수준을 만든다 지면기사

    유럽 문화에서 부러운 것 중의 하나가 관객 기반이 아닐까 싶다. 정장 차림의 원숙한 관객들이란 연주가에겐 최상의 선물일 것이다. 좋은 관객이 좋은 극장을 만들고 고스란히 그 감동을 되돌려 받는다. 거꾸로 관람에 익숙하지 않은 불편한 관객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때문에 오페라, 콘서트, 연극, 미술관에 안목있는 청중과 콜렉터들이 얼마나 있는가가 도시의 문화 성숙도를 말해주는 증표다.필자는 클래식 대중화를 위해 80년대부터 해설음악회란 것을 수백 회나 진행해왔는데 지금은 상당한 인프라 확충과 관객 기반의 증가를 몸으로 느낀다. 돌이켜 보면 70~80년대는 르네상스, 필하모니 같은 감상실 문화가, 80년대는 오디오 및 음반 회사의 레코드 및 영상감상회가 주종을 이뤘다.그러다 번스타인 해설음악회를 본뜬 '금난새 해설음악회'가 나오면서 대중화는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90년 들어 대학의 사회교육원과 지자체 구민회관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2000년 들어서 예술의전당을 출발한 '11시 콘서트'는 공연의 패러다임을 바꿔 아침 시간대에 주부들과 소통하며 전국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정착되었다.직업상 수천 회의 공연을 경험한 평론가 입장에서 지역에 따라 관객 편차가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즈음은 학부모들이 문화를 좇아 주거를 이동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 한다. 문화가 도시 경쟁력과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청중이 없어 좋은 공연물을 소화할 수 없다면 공연 기획사들이 회피하기 때문에 그 격차가 날로 심해진다. 정부도 이런 심각한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란 것을 운영해 제작비 절감, 네트워크 교류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러시아 관객들처럼 발레리나 이름을 축구 선수 이름 외듯 한다든가, 연주회에서 무조건 큰소리로 앙코르를 외치지 않는 성숙한 문화를 만들어 가려면 비평가도 필요하겠지만 행정의 장인 시장(市長)의 마인드가 대단히 중요하다.모차르트 시대의 귀족들은 모차르트가 작곡하고 연주한 곡에 대해 바로 즉석에서 평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천재 모차르트도 귀족들의 입맛을 맞추며 예술성을

  • 유권자는 담화의 광장이 필요하다

    유권자는 담화의 광장이 필요하다 지면기사

    격동하는 현시대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정치가들은 선거 때 유권자들에게 납작 엎드리면서 잘 모시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일단 유권자가 한번 모셔보라고 당선을 시켜주면 유권자는 뒷좌석에 팽개치고 사익 추구 또는 소속 정당의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한다. 야당도 집권당이 무리하게 과속할 때 절제하는 견제 장치가 아니라 깜빡 잊고 켜 논 사이드 브레이크처럼 무조건 집권당에 반대만 하면서, 타는 냄새 뿐만이 아니라 아예 최루탄 냄새까지 풍기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처럼 정치제도가 삐꺽거리는 것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새로운 정당, 정치세력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과거에 유권자들은 선거철에만 정치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가 있었고 평상시에는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매체를 통해서 정치에 의견을 피동적으로 반영하는데 그쳤다. 이제는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이런 모델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경제생활에서 "소비자는 왕이다"라는 대접을 받아 온 유권자들은 정치면에서도 같은 대접을 바라고 있다. 소셜네트워크는 이런 시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등장했다.소셜네트워크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며, 어떻게 사용되느냐는 그곳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슈에 대한 지식과 대화에 대한 태도에 달려있다. 다른 관점을 배우려고 하는 자세라면 담론과 소통의 장이 될 수 있고, 자신과 같은 생각만을 접하려고 한다면 선동의 매개체로 전락할 것이다.얼마 전 국회에서 한미자유무역협정(FTA)이 통과된 후 각계 반응이 다르다. 어떤 이는 이제는 미국시장에서 한국 기업이 차별 받지 않고 진출하여 힘을 마음껏 써 볼 기회가 될 것처럼 생각하고, 어떤 이는 좋은 세상이 다 끝나고 이제는 미국기업의 냉혹한 이윤추구 때문에 한국 산업이 거덜나고, 국민들의 삶이 더 빠듯해질 뿐만 아니라 정부의 정책수행이 ISD(투자자 국가소송제)에 의해서 제한을 받기 때문에 이것은 망국의 조약이라고 부르고 있다.필자 의견은, 총체적인 경제적 성장은 더 빨라질 것으로 본다. 대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더 높아질 것이고, 수출이 늘어나고, 경쟁이 치열해

  • '사이'에 대한 명상

    '사이'에 대한 명상 지면기사

    사람이란 개인이 아니라 관계로 이뤄진 존재다. 사람을 한자로 인간(人間), 즉 '사람 사이'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제 한 몸 건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상대방과 제대로 관계를 맺을 때라야 참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 짓을 해야 사람이지!'라는 우리 속담도 같은 의미다. 여기 '사람 짓'이란 곧 상대방과의 사이를 제대로 수행할 적에야, 즉 소통할 수 있을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덕담으로 자주 쓰는 '사이좋게 지내라'는 당부 속에도 그런 뜻이 담겨있다.이 점에 주목한 것이 유교의 오륜이다. 오륜은 5가지 인간 관계망, 즉 네트워크를 뜻한다. 부자간, 부부간, 벗들간의 사이를 잘 이룰 때라야, 사람다움을 획득한다. 오륜의 핵심은 나를 중심에 놓지 않고, 외려 상대방을 중시하는 데 있다. 노랫말을 빌리자면,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문제는 상대방의 처지로 바꿔 생각하기가 몹시 어렵다는 사실이다. 옛날 공부란 입장 바꿔 생각하기를 몸에 익히는 과정을 일컬었다. 명륜당이라, '오륜을 닦아 밝히는 집'이 대학(성균관)의 본부건물이었던 까닭도 그 때문이다.인터넷이란 컴퓨터 통신망이다. 관계를 맺어 서로 연결하고 또 소통한다는 점에서 인터넷의 핵심도 '사이'에 있다. 인간의 간(間)과 인터넷의 인터(inter)는 그 뜻이 똑같은 것이다. 인터넷의 특징은 정보교류가 상호적이고, 수평적이라는 점에 있다. 인터넷은 위에서 하달하는 명령보다는 평등하게 교류하는 정보가 주를 이룬다. '사람의 사이'가 상대방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사람다움을 이뤄낸다면, '정보의 사이' 곧 인터넷 세상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람들의 자발성으로 구성되는 곳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사람이든 인터넷이든, '사이'는 도덕성을 본질적으로 내장한 듯하다.이 사이를 이어주는 것을 정치라고 부른다. 정치란 청와대나 정부청사, 혹은 의사당에서 이뤄지는 의사결정 과정만이 아니다. 도리어 비근하고 구체적인 일상 즉 가족간, 동료간의 사람 사이를 적절하게 소통하는 것이 정치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 '성찰적 도시, 메타폴리스(Metapolis)'

    '성찰적 도시, 메타폴리스(Metapolis)' 지면기사

    중세에 지은 이탈리아 시에나 시청사 내부에는 암브로지오 로렌체티가 그린 도시와 농촌의 관계를 나타내는 프레스코 벽화가 있다. 그림 속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는 많은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고 밝은 분위기의 시민들은 상거래에 몰두하고 있다. 반면에 어둡게 그려진 성 밖에는 농부들이 죄다 머리를 숙이고 경작에 열중하는 동안, 잘 포장된 도로 위를 성에서 나온 귀족들이 사냥도구를 실은 말을 타고 하인들을 데리고 가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옛날에도 도시와 농촌의 차이는 빈부와 신분의 차이였던 게다. 사실 도시가 발생하고 나서야 농촌이라는 공동체가 생겼다. 농촌은 도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공급처였으니, 늘 도시에 의해 그 성격이 정해졌고 도시가 요구하면 사라지기까지 했다. 이 특별한 신분의 도시 거주민을 성내에 산다고 하여 부르주아라고 불렀다. 성벽은 농민에게는 완고한 상징이었던 것이다.그러나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정신의 자유를 얻고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물질의 자유를 취득하게 된 19세기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포화상태를 견디다 못한 성벽은 마침내 허물어지고 도시는 이제 기회의 땅이 되어 보랏빛 미래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확장 일로에 놓이고 만다. 그렇게 커진 도시를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라고 부른다. 현대에서도 주변에 위성도시를 여럿 둔 대도시를 의미하는 말이어서 그 배경은 확장과 성장에 있다. 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이 메트로폴리스는 오늘날 무려 450개나 되며, 이는 천만 명 인구의 메갈로폴리스를 낳아 현재 세계에 20여 도시에 이르는데, 이 초대형 도시는 도시 상호간의 연합을 촉진하여 에큐메노폴리스라는 이름으로 지구 전체의 도시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폭발적이었다. 이대로 가면 2050년에는 인류의 75%가 도시민이 된다고 한다.미래를 예견하는 이들은 죄다 비관적이었다. 온실가스, 지구 온난화, 이상기후, 석유자원의 고갈, 원자력의 공포 등등…온갖 지표와 예측도 불안하다. 과연 우리 인류는 지속할 수 있을까?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 화려한 종착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