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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예술은 거리가 필요하다 지면기사
10·26 재보선 서울시장 선거는 박원순 시민운동가의 승리로 끝났다. 박 시장은 변화를 열망하는 시민의 승리라고 답했다. 재보선은 끝났다지만 정치권은 내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향해 무한질주할 것이다.국민이 요구하는 변화의 실체가 뚜렷이 무엇인지는 입장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경제가 잘 돌아가 사람 살기가 좀 편했으면 하는 요구일 것이다.이제 우리나라도 몇 번에 걸친 보수와 진보 진영의 권력 장악을 해오면서 진저리 치는 이전투구의 싸움을 펼쳐 온 만큼 이제는 투쟁보다는 설득하고 포용하는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반대를 위한 반대는 정치에 혐오감을 주고, 각자의 세(勢) 규합만으로는 어느 쪽도 큰 승리를 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기존의 식상한 정당(政堂)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 최근 신당론(新黨論)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안철수 서울대과학기술대학원장 같은 인물을 찾기 위해 당은 물론 지자체에서도 큰 고민에 빠진 것이다.박 시장이 오세훈 전 시장의 측근을 가까이 둔 것도 포용의 리더십을 통해 보다 강력한 변화의 열망을 실현하려는 뜻일 것이다. 여기서 정치와 예술의 나쁜 관행도 이번 기회에 좀 고쳤으면 한다. 사실 MB 정부 들어 최장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유인촌 전 장관이 예술에 정치색깔은 맞지 않다고 옷을 벗긴 사례가 몇 있지 않았는가. 말은 옳지만 결과는 엉뚱하게 코드인사 역풍으로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꼴이 되고 말았다.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옷을 함께 벗어야 한다는 관행이 이제 예술계 전체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문화계는 나름대로 굳건한 질서와 전통이 자리 잡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름석자도 생소한 인물이 정치권력을 업고 등장하면 예술가들은 아연실색이다. 이들이 훈장이라도 단듯 종횡무진하면 예술가들은 허탈감에 빠져 창조력이 감퇴하고 숨고 싶을 것이다. 박수 받을 사람은 떠나고 인적 네트워크가 빈약한 실습 수준의 인물이 나타나 다시 시동을 켠다면 이는 변화가 아니라 후퇴요 잘못하면 침몰이다. 예술은 정치가 혼돈스러울 때에도 시민을 위로해 주고 믿음을 주어야 한다. 제정(帝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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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오늘날의 정당을 반면교사 삼아야 지면기사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젊은 유권자들이 정당도 없고 정치 경험도 없는 무소속 박원순씨를 시장으로 선출했다. 이것은 정치가들이 현 세대들이 겪고 있는 등록금, 취업, 안정적 고용, 육아, 주택 등의 문제를 유권자 입장에서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당 싸움을 비롯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국회에서의 몸싸움 등을 함에 따라 시민들이 현실 정치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시민 개개인의 조그만 목소리가 침묵으로 사라졌던 과거와 달리 소셜네트워크는 이를 수용, 정제, 확장함으로써 하나의 웅장한 교향악을 창출하는 효과를 냈다.과거에는 정당에 가입하면 경쟁상대가 타 정당의 소수 정치인 뿐이었으나 이제는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새로운 다크호스 등장 가능성으로 과거의 좋은 시절은 다 가버렸다. 한국의 신문도 정치인과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2008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언론 수용자 의식조사 자료에 의하면, 시민들은 신문기사 및 뉴스에 대한 설문에서 기자들의 전문성이나 신문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신문에 대한 신뢰감은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적으로 편파적이라고 느낀 사람이 68.8%, 국민의 이익보다 자기 회사이익을 우선한다고 보는 사람이 67.8%, 부유층과 권력층 입장을 대변한다고 보는 사람이 65.8%, 정치·경제에 대한 비판 부족 59.2%, 정정보도 부족 59.2%, 대책 제시없이 비판 일변도 56.6%, 사실보도와 기자의견 구분 모호가 56.4%였다. 반면에 2009년 언론인 의식조사에 의하면 국민이 신문을 신뢰한다고 보는 언론인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 언론인보다 9.3%가 많았다. 신문이 이런 착각 속에서 시민들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변화를 꾀하지 않으면, 기존의 일부 독자들은 관성으로 신문을 계속 읽겠지만, 어떤 독자들은 금품공세를 해야만 구독을 할 것이고, 젊은 세대들은 신문을 염두에 두지 않고 아예 소셜네트워크를 주 정보원으로 삼을 것이다. 신문이 광고수입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있으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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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입 지면기사
오백년 전, 지리산 골짜기에 숨어살던 조식 선생이 출세한 제자와 함께 저녁 밥상을 맞았다. 내내 기름진 음식을 먹던 제자는 헐한 밥과 박한 찬이 목에 넘어가질 않았다. 선생이 한 마디 던졌다. "자넨 음식을 등으로 먹질 못하는구먼!" 헐한 음식을 억지로 삼키려면 목울대를 울리고 등을 움찔해야 넘어가는 것을 두고, '등으로 먹는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음식은 창자를 채우기만 하면 될 뿐, 입맛에 집착하지 말라는 회초리다.저녁 무렵 텔레비전을 켜면 언제나 먹을거리 타령이다. 이마엔 비질비질 땀을 흘리며 목젖이 다 보이도록 입을 벌려 음식을 우적우적 씹는다. 또 그게 채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전에 엄지손가락을 쑥 내밀고서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이"해 가며 호들갑을 떤다. 먹는 음식을 두고 이런 추한 모습을 꼭 보여야 맛기행이 되고, 고향 탐방이 되는 것일까 싶다.50년 전 보릿고개 시절 오늘의 풍요를 헤아리지 못했듯, 또 머지않아 굶주리는 때가 있을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 그래서 저 입들이 두려운 것이다. 문득 "음식에 탐닉하는 걸 비천하게 여기는 까닭은 고작 입의 욕망에 휘둘려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라던 맹자의 말이 귀에 따갑다. 먹는 입은 더러워지기 일쑤인 것이다.음식을 삼키는 입보다 더 조심스런 것이 내뱉는 입이다. 말 속에는 그 사람의 사람됨이 들어있다.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람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흰소리를 자주 하면 사람이 실없어지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입으로 내뱉는 것이 모두 다 말은 아니다. 지키지 못할 말, 책임지지 못할 말, 거짓말은 '말'이 아니다. 말 속에 의미가 없고, 말 뒤에 실천이 따르지 않는 것은 '소리'일 뿐이다. 소리를 내는 것은 짐승이다. 흰소리, 발림말, 거짓말은 새가 지저귀는 것이나 개가 짖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니까 말이 뜻을 잃고 소리로 떨어지면, 사람은 곧장 짐승으로 추락하는 것이다.옛말에 "사람이 사람 짓하기 어렵다"라더니 말 한마디 잘못에 짐승이 되고 마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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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폴리 지면기사
지난 9월1일 개막된 광주디자인비엔날레가 이번 주말 막을 내리게 된다.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고 담론의 계기를 만들어 그 지평을 넓힘으로써, 디자인비엔날레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줬다는 유수한 해외 언론들의 찬사가, 그간의 노력에 대한 좋은 위로가 되었다. 여러 전시 중에서도 광주폴리라는 이름으로 광주의 도심에 지은 작은 공공시설물이 이번 비엔날레의 성격을 단연코 부각시켰다고 했다. 폴리(Folly)는 원래 '다소 우둔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을 뜻한다. 지난 80년대 중반 버나드츄미가 파리의 라빌레트공원을 설계하여 지은 35개의 시설물을 폴리라고 부른 이후, 건축용어로 자리 잡으면서 간단한 구조물이지만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는 도시의 공공시설물로 알려지게 되었다.광주는 문화수도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문화와 관련된 많은 도시정책을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비엔날레의 총감독직을 맡고 광주를 오가면서 본 도시 모습은 이에 걸맞은 게 아니었다. 급조한 듯한 신도심의 풍경과 낙후된 구도심이 어정쩡하게 결합된 모습은 우리 땅에 있는 여느 지방도시와 다를 바 없었으니, 치졸하였다. 풍부한 녹지와 유려한 광주천 그리고 언제나처럼 듬직한 무등산이 빚는 자연환경은 특별한 아름다움이며 그 속에서 빚어 온 인문의 역사는 빛나는 것임에도, 파행적 근대화 과정이 만든 불구의 풍경이었던 것이다.나는 사라진 광주의 읍성에 주목하였다. 광주가 역사도시임을 밝혀주는 광주읍성은 1900년대 초 일제에 의해 도시 확장을 이유로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라진 읍성은 도심 내 중요한 도로가 되어 그 존재의 사실이 남아있고, 읍성 안에는 여전한 옛길들이 있었다. 이 광주읍성의 흔적을 밝혀낸다는 것은 역사도시 광주의 복원이며, 원도심과 신도시의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도시 발전의 정체성을 찾는 일일 게다. 따라서 우리는 이 2.3킬로미터에 달하는 읍성길을 따라 읍성을 출입하는 문이 있던 자리와 모서리부분 10군데에 광주폴리를 짓기로 하였다. 어느 곳은 작은 공원으로, 어느 곳은 작은 공연장 혹은 전시장, 또는 버스정류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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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레퍼토리 준비하는 지자체들 지면기사
엊그제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인천시립합창단의 뮤지컬 오라토리오 '모세(우효원 작곡)'공연이 있었다. 시립합창단으로선 이례적으로 2억원의 예산을 투자해 브랜드 상품을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그런가하면 고요하고 정적인 정가를 음악극으로 만들어 새로운 변화의 옷을 입히는 것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꼈다.부산국제영화제는 영화의 전당 개관 기념으로 월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콘서트가 있었는데 5천명의 청중이 큰 감동을 느꼈다. 각 도시마다 시립교향악단이 있긴 하지만 시가 월드필하모닉을 지원해 시민 만족을 높이고 도시 문화 역량을 키웠다는 평가다.대전시립교향악단도 지난달 서울 콘서트에서 변신의 모습을 보여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처럼 극장은 극장대로 지자체는 지자체대로 문화 역량을 키우기 위해 그간 소외되었던 예산을 클래식에 투자하고 있다.관객이 많이 모이는 것이야 대중문화 쪽이지만 이제는 사회 전체가 명품을 찾는 고급 정서가 지배적이어서 클래식을 선호하는 쪽으로 방향이 선회된 느낌이다.서울시합창단은 오는 12월 '칸타타 한강'(임준희 작곡)을 준비하고 있는데 한 은행에서 전석 티켓을 구매하겠다고 요청이 왔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그만큼 클래식에 대한 시장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이다.경남에서도 경남오페라단에 매년 지원을 하는 지역은행이 있어 문화가 풍성하게 꽃피고 있는 데 이는 나눔이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기 때문이고, 지자체도 공공투자를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하는 것은 문화의 방향을 바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무릇 세상의 이치가 풍성해지면 보다 나은 것을 찾게 된다. 대중문화 한류가 시장 논리 면에서 거대한 수효를 만들어 가고는 있지만 '동남아'라는 한계시장에서 맴돌고 있다. 지금의 10대 청소년과 드라마 청중들로 채워진 시장을 벗어나 유럽시장을 공략하려면 현재의 상품으로는 지속적인 시장 개척이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유럽은 동유럽과 서유럽에서조차 서로의 문화적 자존심에서 격차를 보이고 있는데 자신들이 접하지 않은 동양의 문화가 이곳 상류사회로 쉽게 젖어들 수 없음은 당연하다. 우리 것이 소중하다고 일방적으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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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 직접민주주의 불러 올까? 지면기사
미국에선 지금 기존의 경제질서에 저항하는 운동이 뉴욕에서 시작하여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는 구호 아래 3주째 접어든 젊은이들의 데모는 잠깐 모였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백 명은 아예 인근 공원에 노숙을 하며 데모를 하고 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불만을 기존 정당정치가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느낀 사람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전달된 정보에 따라 데모에 참석하여 그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다. 기업의 남용과 탐욕, 월스트리트 파워에 반대하는 데모가 지난 9월 17일 뉴욕에서 시작되어 10월 2일 일요일에는 700명의 참가자가 도로 점거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런 취지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보스톤 등 여타 대도시에서도 데모를 시작했다.지금 데모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주로 80년대 또는 90년대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물질적으로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지내 왔고 또한 인터넷을 통한 정보 소통에 익숙한 세대다. 부시 대통령 말기 때부터 시작된 경제위기에 직면한 젊은이들은 대학을 다닐 당시엔 비싼 등록금을 지불했고, 졸업 후엔 일자리가 없어 융자받은 부채에 허덕인다. 또한 직장을 찾기는커녕 인턴십도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 세대들은 지금 좌절을 경험하면서 낙담하지 않고 그 돌파구를 찾으려 하고 있다.과거에는 이런 불만의 소리는 친구들 사이의 대화에서나 술집에서 하는 토론 속의 불평으로 끝났겠지만, 이제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네트워크 덕분에 불만이나 다양한 의견들이 인터넷에서 수렴되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데모 참가자는 온라인 조직을 통해서 돈, 음식, 담요 등을 기부받기도 하고, 새로운 참가자들도 모으고 있다.그 이전 세대들도 현실에 불만이 많은 것은 마찬가지다. 경기 침체로 실직한 사람들이 은행으로부터 집을 몰수 당한 경우도 많이 있다. 금융기관의 방만한 주택자금 대출로 시작된 경제 위기는 정부의 금융기관에 대한 지원금으로 진정되었지만 정부지원이 주택상환금 감소에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금융기관들이 CEO들의 경제적 희생 없이 직원 감소를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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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장(助長) 의 끝 지면기사
가을이 익어간다. 하루가 다르게 들판은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논배미에 가까이 가서 보면 이 논이나 저 논이나 벼들의 키가 가지런하다. 이삭의 무게로 고개를 숙인 각도조차 한결같다. 문득 놀라움에, 내리비치는 햇살을 따라 하늘위로 눈길을 돌린다. 눈이 부시다. 태양과 하늘의 공평함에 눈이 부신다.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하늘과 땅은 어떤 종류를 특별히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더니 지금 들판에서 그 현장을 본다. 햇살이 고루고루 비치기에 벼의 키 크기가 저리 고르고, 하늘에서 뿌려주는 빗줄기도 이곳저곳이 두루같기에 이삭의 무게조차 저렇게 평등한 것이리라. 저 천지자연의 공평무사함에 기대어, 제 욕심만 채우는 자를 두고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라고 손가락질 했을 것이고 또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라며 제 결백을 하소연하기도 했을 터였다.그러나 지금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공평과 공정에 목마르다. 지난 해 난데없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낯선 책이 초장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 그러하고, 올 여름 느닷없이 안철수 현상이 온 나라를 들었다 놓았던 것도 그러하다. 안철수 현상을 두고, 좌파라느니 우파라느니 편을 가르는 분석들도 있었지만, 실은 유독 이 정권들어 심각해진 권력의 사유화와 공공성의 훼손에 대한 반발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문득 조장(助長)의 고사가 떠오른다. 옛날 중국 땅에 오랜 가뭄이 들었다. 봄에 심은 묘들이 크지를 못하고 말라 죽을 판이었다. 하루는 정신이 맑지 못한 노인이 들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서 "아이구, 힘들구나. 내가 묘를 키워주고 왔네"라는 것이다. 자식들이 놀라 들로 나가보니 묘를 키워준답시고 뿌리를 뽑아 올려, 온 들판의 싹들이 말라죽게 되었더라는 이야기다. 오늘날까지도 나쁜 짓을 도우는 것을 '조장한다'라고 쓰는 어투가 된 내력이다. 조장의 고사는 사사로움과 어리석음을 상징한다. 세상의 어려움을 '내'가 나서서 널리 바로 잡겠다는 설익은 영웅주의와 사물의 이치를 모르는채 덤벼드는 무지의 낭패가 이 고사속에 들어있다. 조장이 무서운 것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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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면기사
이상향으로 번역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가 1516년에 지은 소설책의 제목이었다. 그는 그리스어에서 두 단어를 차용해서 만들었는데, 그 뜻이 이중적이다. TOPIA는 장소, 땅이라는 분명한 뜻을 가지는데 비해, U의 의미가 이중성을 띤다. '유'라고 발음되는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eu, ou가 다 같이 '유'로 발음되지만, eu는 좋다라고 하는 뜻이며 ou는 아니라고 하는 뜻이니, e와 o를 빼고 그냥 'u-topia'라고 하면, 좋기는 좋은데 이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것이 된다. 그 책 속에는 유토피아를 설명하는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유토피아는 위쪽에 그려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며,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정해진 입구에 도달해야 한다. 모든 출입을 감시하는 망루가 입구에 솟아 있고, 이를 통과하면 내부를 해자가 또 감싸고 도는데, 곳곳에 설치된 감시망루를 거쳐 섬의 가운데로 들어가면 이 땅을 다스리는 영주의 성채가 나타난다. 즉 한 통치자의 지배하에서 철저한 감시체계를 거쳐 안전을 담보 받는 세계가 유토피아의 모습이었다.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에 대단한 영향을 준 이 책은 급기야 신도시의 중요한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이윽고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한 신도시들이 아프리카 북부에서 스칸디나비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세워졌다.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유토피아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시대마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등장한 신도시 모두가 이상적 세계를 동경한 것이었으며 현대의 마스터플랜이라는 도시계획의 수법도 유토피아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실현된 유토피아의 사회가 그야말로 이상향이었을까? 불행히도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범죄는 잘 계획된 도시에서 오히려 더욱 많아졌고 갈등과 대립은 전형적인 도시의 문제가 되었다.우리의 땅에도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은 많은 신도시들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세워졌으나 많은 도시문제를 양산한 바 있다. 신도시는 그렇다 쳐도, 더 큰 문제는 오랫동안 고유한 삶터를 일구어온 우리의 옛 도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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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힘 소프트파워를 키우자 지면기사
애플이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으로 세계 시장을 휩쓸고, 구글이 모토롤라와 합병하면서 IT코리아가 20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았다. IT 강국으로까지 불렸던 우리 대부분의 SW회사들도 경영 악화로 워크아웃에 놓인 상태다. 업계는 이 모두가 정부의 오락가락 정책 혼선이 빚은 결과라고 성토한다. SW 경쟁력의 핵심이 기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성장시키지 못해 뒤늦게 뒷북을 치고 있지만 앞으로 이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될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한때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며 키웠던 벤처기업이나 신지식인을 부추겨 세웠던 신화는 신지식인 1호였던 영화 용가리 심형래 감독의 좌절로 막을 내리고 말 것인가. 지금껏 소프트웨어를 지켜 온 기업들은 대기업들이 부족한 인력을 모두 빼가는 현실에서 할 말을 잃는다. 비단 IT 업계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반의 현상일 것이다. 가깝게는 겉만 화려하게 지어진 미술관, 공연장, 무늬만의 오페라하우스 등 선진국과 비교하지 않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속빈강정의 궁색함이 그대로 드러난다.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소프트웨어의 근간이 되는 개인의 독창성이나 창의력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왜곡, 변질되기가 일쑤다. 소설가, 화가, 작가, 발명가 등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진심어린 창작 지원이 없다. 때문에 창작자들이 겪는 척박한 현실은 양질의 소프트웨어 개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래도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 등 세계시장에서 큰 호응을 끌고 있다거나 걸음마 단계에 있지만 우리 공연물들이 국제무대 진출을 염두에 두고 제작에 땀 흘리고 있는 모습은 희망이다. 엊그제 국립극장에서 판소리 수궁가를 보았다. 세계적인 오페라 연출가 아힘(Achim Freyer) 프라이어가 1인 오페라라 할 수 있는 판소리에 스토리 배역을 나누고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 판소리의 세계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결코 우리 힘으로 세울 수 없었던 정교한 무대와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져 판소리의 새 지평을 열어 보인 것이다.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쉽게 알아듣기 힘든 사설이나 문화적 차이를 과연 외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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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은 왜 필요한가? 지면기사
애플 최고 경영자(CEO)였던 스티브 잡스는 대학에서 서체를 공부했고 그것이 훗날 애플 컴퓨터의 아름다운 활자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 그는 서체 공부와 컴퓨터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잡스의 지식은 놀랍게도 훗날 애플 컴퓨터회사에 혁신을 가져왔다.이처럼 혁신은 기존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에서의 시도와 노력에서 생긴다. 따라서 혁신은 대부분 과거의 틀에 얽매이는 다수의 집단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과감히 추구하는 소수의 집단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시도되는 경우가 많다.다양한 정보와 생각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산업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필요하다. 기존의 가치관과 생활태도를 고집하면 정체된 사회를 살아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역동적인 국제화 사회를 헤쳐가는 데는 힘들 것이다. 미국의 대학들도 이런 점을 생각하여 학생들을 교육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예전에는 미국 대학들이 역사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았던 흑인들에게 보상해주는 차원에서 다양성(diversity)의 문제를 다뤘지만, 근래에는 다양한 배경 (인종, 성별, 소득, 종교 등 여러 측면)과 사고 방식을 가진 사회 구성원이 어떻게 갈등을 해결해 가면서 살 것인가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물론 이것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사회환경을 반영해서다.다양화는 항상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수들은 수업 중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도, 학생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백인이 대부분인 대학이나, 교수가 종신 계약 (테뉴어)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는 교수는 학생들의 수업평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사람들은 왜 자기와 다른 사고 방식을 좋아하지 않을까? 이것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나 불편함이다. 멋진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가슴이 설레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미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다. 아름답다고 평판이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