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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직성이 생명이다 지면기사

    청소년.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싱싱하고 정의에 불타며 무엇보다도 정직한 이름이 아닌가? 최근 여론조사에서 나온 한국 청소년의 반부패 인식지수가 10점 만점에 6.1이라니,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청소년 18%가 "10억원을 번다면 10년을 감옥에 가도 좋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서 성인들의 반부패지수는 몇 점이나 될까, 참으로 참담하고 두려울 뿐이다. 아침이 조용한 나라에서 백의민족으로 살아온 은근과 끈기의 후손들이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우리 선현들의 말씀은 세살 먹은 아이도 안다. 하지만 이 말이 우리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는 것은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부정부패는 못 배운 사람보다도 더 많이 배운 사람들이, 가진 것이 없는 자 보다 더 많이 가진 자들이, 권력이 없는 자 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통사람 보다는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저지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이 참담한 현실을 치유할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평생동안 선진국, 후진국 등 40여 개 국을 다니면서 도대체 선진국과 후진국은 무엇이 다르며, 무엇이 선진국을 만드는 요인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여러 나라 국민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그들의 사고방식과 고유한 문화 그리고 생활양식을 배우면서 느낀 점은, 그토록 다양하고 독특한 문화 속에서도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유사하다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선진국은 인재를 중요시하는 창의적 교육정신을 바탕에 둔 수월성 교육을 시키는 훌륭한 교육제도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선진국 국민은 정직하고, 책을 많이 읽으며, 여성의 사회활동이 많다는 것이다.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 선진국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길은 국민의 정직성을 회복하는 것 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정직성은 인간관계와 사회에 믿음과 신뢰를 주는 묘약으로서 인간 모두가 추구하는 자유의 원천이며, 이 자유는 곧 인간조건의 신비와 매듭을 푸는 열쇠로서 바로 삶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의 독서력은 그 국가의 성장

  • 산악인들이 고봉에 오르는 힘 지면기사

    산악인들은 왜 명줄을 걸고 산에 오를까.특히 7천, 8천가 넘는 고봉들은 직벽에 가까운 벼랑이 많은데다가 만년빙하가 쌓여 있기 때문에, 8천 이상되는 히말라야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는 그곳을 일찍이 '죽음의 지대'라고 불렀다. 산소가 모자라 제대로 숨을 쉴 수 없고, 빙벽은 물론 위험한 크레바스가 거미줄같이 깔려 있으며, 극한의 추위와 눈사태 등의 위험이 상존하니 그야말로 죽음을 향해 한발한발 내딛는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수많은 산악인들이 일상의 희생을 무릅쓴 채 돈을 모으고 시간을 모아서 그 '죽음의 지대'에 기꺼이 도전하고 있다.왜 그들은 산에 오를까. 돈이나 어떤 명리를 위해서? 아니면 좋아서? 미쳐서?산악인들이 고산에 올라서 돈을 벌거나 이름을 드높이는 것은 극히 소수가 누리는 부가가치일 뿐이다.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자기 명줄을 걸고 정상에 올라도 현실적인 어떤 보람도 거두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등반가는 이르기를, 고산등반을 하려면 첫째 목숨을 걸 수 있는 용기, 둘째 가족과 직장으로부터 버림받아도 견뎌낼 수 있는 용기, 셋째 등반을 끝내고 돌아와 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갖추어야 비로소 프로등반가라 할 수 있다고 설파한 바 있다. 참으로 비장한 출정사가 아닐 수 없다.그렇다면 좋아서 그들은 오르는 것일까. 단순히 '좋아서' 라고만 말하고 말면, 위의 비장한 출정사에 비해 그 낱말이 너무 범박해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또 '미쳐서' 라고 말하면 표현의 천박함 때문에 산악인들이 혹시 화를 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저렇게 따져 보면, 산악인들의 고산등반엔 확실히 어떤 합리적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순수한 쾌락의 추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야성적인 등반가였던 쿠쿠츠카는 고산 등반에서의 '며칠'은 일상에서의 '몇년' 혹은 '몇십년'을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그 어떤, 내적가치를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내적가치의 전제조건은 말할 것도 없이, 반대급부에 대한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도전 자체를 순수하게 즐기고싶은 인간

  • 이순신 장군의 붓 지면기사

    우리 민족이 가장 사랑하고 숭배하는 인물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다. 한때 거의 모든 초등학교에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경상남도는 역점사업으로 '이순신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순신 장군을 세계화하고 남해안 시대 문화관광을 선도하기 위해서 1천500여억원을 투입한다.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알리기, 거북선 건조 등 세계화작업과 이충무공 정신선양, 거북선 탐사 등 19개 사업이 전개되고 있다. 이 사업은 전라남도에서도 함께 추진하고, 일본에서도 참여 의사를 밝혀오고 있다. 이순신 프로젝트 중 흥미로운 것은 거북선 찾기이다. 경상남도는 거북선이 수장된 곳으로 예측되는 거제 칠천량 해저를 샅샅이 뒤져 거북선 잔해를 찾아내자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광화문 대로에 긴 칼을 든 구국의 영웅으로 서있다. 다른 한 손은 붓을 들고 있다. 그는 해군 사령관으로서 칼을 들고 작전지휘를 수행해 23전 전승으로 조선을 구하고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찬란한 기록을 남겼다. 이순신은 칼을 들고 작전지휘를 하였지만, 한 손은 붓을 들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사령관으로서 어느 누구보다 휴식과 수면이 필요했다. 그의 건강은 곧 국가존망과 결부돼 있었다. 밤이면 보초 이외에 모든 군졸들이 취침해 내일의 전투를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장군만은 잠들 수가 없었다. 그가 수행한 전투와 전쟁 상황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군졸들이 잠든 밤중에 장군은 정신의 피로 먹을 갈았다. 칼보다 더 날카로운 붓을 들었다. 전투를 수행하면서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전투 상황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일이 더없이 중요함을 느꼈다. 기록하지 않으면 시간이 망각의 바이러스를 풀어 사실과 진실을 퇴색시키고 소멸시켜 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임진왜란은 조선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했고, 전쟁 중에 가장 고단하고 고뇌하고 잠 못 들어 했던 사람은 이순신이었다. 그는 7년간의 전쟁 중에서 단 하루라도 마음 놓고 잠 들 수 없었다. 그의 손엔 칼과 함께 붓이 들려져 있었다. 그가

  • 생각대로 쓰다 지면기사

    미국산 쇠고기 파동, 유가의 급등과 미국발 금융위기, 그리고 중국산 분유 사태는 우리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오랜 가뭄과 늦더위는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고 이러한 기후변화의 낌새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바꾸려 들고 있습니다. 미국의 금융 위기가 우리 살림살이의 위기가 될 줄을 우리 같은 것들이 어찌 알고, 어마 어마하게 잘 사는 나라의 은행이 망할지를 우리 같은 것들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런 사태에 대응하는 나라 일꾼들의 긴장된 얼굴을 화면으로 보며 우린 그냥 덜컥덜컥 겁이 날 뿐이었습니다. 넥타이 풀고 회의하는 그들의 입과 얼굴을 살피는 언론들도 모두 정신 차리지 못하고 숨이 차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아우성만 칠뿐 이 명백한 위기에 대처해야 하는 그 어떤 현실적 타개책도, 장기적 계획도, 대안도 없이 슬그머니 위기의 꼬리가 사라지려고 합니다.위기는 문제의 핵심과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위기를 기회라고 말하지요. 이런 위기를 맞아 모두들 입을 모아 어렵다고 하고 힘들어 죽겠다고 하면서, 그러나 거리에 차량의 물결은 넘치고 주말이면 차들이 고속도로와 산과 들을 메웁니다. 식당과 술집은 사람들로 넘치고, 거액을 쏟아부은 지자체들의 내용 없는 축제의 애드벌룬은 이 고을 저 고을의 가문 하늘에 둥둥 뜬 구름을 잡습니다. 위기라는 말이 뻥 같지요. 혹 이 위기의 국면만 모면하면 된다는 생각인지도 모르지요. 에라, 모르겠다. 그러려면 그러라는 똥배짱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런 위기는 또 옵니다. 다시 올 위기의 파고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구체적일 것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혼돈과 공포의 파고는 일순간에 우리들의 일상을 덮칠 수 있다는 것을 우린 알아야합니다. 이번 금융위기는 말 그대로 우리가 글로벌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글로벌하게 실감했지요.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글로벌하다해도 문제의 단초는 우리에게 있고, 그 해결 방법의 실마리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경제 성장을 제일로 치는 가치와 덕목을 재고할 때가 왔습니다. 정치도

  • 이땅의 교육은 어디로!

    이땅의 교육은 어디로! 지면기사

    지구상에서 이 땅의 학생과 학부형 같이 힘든 삶을 사는 나라가 또 있을까!세계에서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제일 많고, 정부 예산 10%를 초과(1년간 20조원)하는 세계 제일의 사교육비를 쓰는 나라에 남은 것은 좌절감과 허탈감 그리고 무기력뿐이라니. 진정 교육의 왕도는 없는 것인지?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인가? 크게는 자연의 질서를 가르치는 것, 지성과 감성을 조화롭게 키우는 것, 작게는 교육 그 자체를 머리에 처넣는 것이 아니고 머리에서 꺼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창의력과 상상력 그리고 사고력을 높이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초·중·고·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것은 고학력이 될수록 질문이 적을뿐 아니라 학교수업이 점점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생의 70%이상이 4년 동안 한 번도 질문을 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다면 이런 교육을 어떻게 평가해야할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고학력으로 갈수록 입시에 매달려 암기 위주의 반복적인 학습과 문제를 이해하지(why)않고 푸는 방법(how)만을 강요하는 일률적인 강의로 학생들이 흥미를 잃은 재미없는 교실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 보낼 때 하는 말의 거의 전부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이다. 한편 유대인 부모들은 "학교 가서 질문을 많이 하라"라고 가르치며, 동시에 엄마가 아이들의 입술에 달콤한 꿀을 발라주고 "배움이란 이렇게 달콤한 거야"라고 가르친다. 지극히 적은 소수민족인 유대인이 모든 학문분야에서 세계 정상에 우뚝 서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정에서 어떻게(how)가 아니고 왜(why)라고 하는 접근 방법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유도하게 되고 거기에서 창의력과 상상력이 생겨나고, 동시에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통해서 사고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교육은 일률적으로 머리에 처넣는데만 급급한 반면 유대인들은 머리에서 꺼내는 교육으로 교실이 토론과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한 곳으로, 학생들이 가고 싶고

  • 우리가 잊은 가난 지면기사

    지난 해, 멀고 먼 터키에서 독자가 찾아온 일이 있었다. 베이한 도안즈. 터키의 중부도시 카르세르에 있는 에르지에스 대학 한국어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번역원이 주최한 한국문학 독후감대회에서 일등상을 받고 그 부상으로 변역원이 초청해 방한의 기회를 얻었다고 했다. 아름답고 단정한 외모에다가 눈이 커서 더욱 영민해 뵈는 이 터키처녀가 선택한 텍스트는 나의 초기 작품 '우리들의 장례식'.단편 '우리들의 장례식'을 쓴 것은 아마 서른 살 무렵, 1976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 여중 국어교사로서 일주일에 서른 시간 넘게 수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밤에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퇴근하고 대학원에 갈 때는 매번 파김치처럼 지쳐 있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면 늘 졸기 바빴다. 그날도 졸다가 제때 내리지를 못하고 그만 대학 앞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졸다 깨고 보니, 아주 낯선 곳이었다. 나를 내려놓고 버스가 부르릉 하며 사라지고 나자 갑자기 적막해졌고, 그 적막 속으로 개천을 끼고 끝없이 펼쳐진 낮은 지붕과 판잣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어두워진 다음이었다. 초겨울이라서 개천은 벌써 얼어 있었고, 루핑으로 된 판잣집 지붕들 위로 고압선이 도도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때마침 히끗히끗 진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곳이 장위동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대학으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타는 대신 장위동 달동네 안길로 들어섰다. 고압선 전신주들이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러니까 고압선 철제 전신주 사이로 뚫려진 길이었다. 어둑어둑한 길을 따라 50여를 들어갔을까. 판잣집 추녀 밑에 싸구려 나무관 하나가 기대 세워져 있는 게 눈에 띄었는데, 나무관의 아랫도리는 가린 것이 없어 골목길에서 그대로 진눈개비를 맞고 있었다. 삐죽이 열린 좁은 재래식 부엌에서 늙수그레한 부부가 쭈그려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노모가 죽었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라서 조문객은 물론 이웃사람 하나도 와있지 않았다. "눈을 맞는데, 왜 관을 방에 들여놓지 않나요?" 나는 그만 묻지 말아야할 것

  • 나비의 삶 지면기사

    이 세상에서 나비처럼 아름다운 삶은 없을 듯하다. 몸통보다 몇 배가 큰 날개로 춤추듯이 나는 모습만으로 환상과 행복을 느낀다. 몸 자체가 예술품이다. 형형색색 무늬와 현란한 색채미학, 두 장의 날개는 대칭미의 완성품이다. 나비의 삶은 우아하며 평화롭다. 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투지도 않는다. 꽃을 사랑하면서 희망과 미래를 준다. 꽃에게 꿀을 얻는 대신 식물로 하여금 더 많은 열매와 씨앗으로 번성과 풍요를 갖게 만든다. 나비는 언제나 무도복 차림새이고 걸음걸이는 곧 춤이다. 꽃에 다가갈 때도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벌과는 달리, 곡선을 그으며 다가간다. 다짜고짜로 꽃 속으로 파고드는 벌과는 다르다. 소리 없이 다가가 꽃에 눈 맞추고 부드럽게 입술을 맞춘다. 오래도록 밀어를 속삭인다. 나비는 꽃의 빛깔을 가장 잘 안다. 꽃의 향기를 가장 잘 맡는다. 나비야말로 빛깔과 향기를 알아내는 기막힌 감별사이다. 신이 보낸 미의 천사, 평화와 사랑을 위한 사자(使者)가 아닌지 모른다. 인간은 나비의 황홀한 빛깔과 무늬를 갖고 싶어 한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삶을 갖길 원한다. 꽃이 어여쁘다고 한들 나비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무료와 슬픔이 느껴진다. 꽃에 나비가 앉는 모습이야말로 평화와 행복의 표정이다. 유토피아의 구성 요소는 숲과 물, 여기에 꽃과 나비가 있어야 한다. 꽃과 나비는 사랑, 행복, 번영을 상징한다. 약육강식의 먹이사슬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게 생명체의 숙명이며 한계이다. 그런데도 나비만은 살상을 하거나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고, 모든 생명체를 이롭게 한다. 꽃가루받이를 통해 식물의 번식을 도모함으로써 생명체 모두에게 이로움을 안겨준다. 가장 연약하고 무능해 보일지라도 나비는 모든 종(種)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타고난 예술가이다. 나비가 꽃에서 꿀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일만이 아닌,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삶과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고 있다. 꽃은 열매와 씨를 맺고, 열매와 씨는 다시 대지에 생명을 틔운다. 속씨식물은 동물을 유혹해 자기 씨를 멀리 퍼뜨리게 하려고 당분과 단백질

  • 이 가을에 시 한편 지면기사

    가을입니다. 날씨가 가물고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가을은 가을입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하늘은 높고 눈이 부시게 푸르기만 합니다. 그 하늘아래 나무와 풀들은 있는 힘을 다해 햇살과 바람을 빨아들이며 익어 갑니다. 강변이나 논두렁이나 밭가에 구절초 꽃이며 쑥부쟁이며 고마리 꽃이며 물봉선화 꽃들이 만발했습니다. 강아지풀도 억새도 갈대도 바라구 풀도 수크렁도 다 이삭을 피워냅니다. 야산에 가보면 작은 오솔길에 밤과 상수리와 도토리들이 발길아래 툭툭 떨어집니다. 가을이지요. 차를 타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차창으로 언뜻 눈길을 주면 거기에 가을꽃들이 그렇게 피어 있습니다. 오! 저 꽃들 좀 봐라! 누가 가꾸지 않았어도 우리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도, 나와 언제 그러마고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마치 지상의 모든 것들과의 굳은 약속인양 저렇게 눈이 시리게 풀꽃들은 피어납니다. 낮은 산자락 작은 마을 앞 길가에는 깨들이 세발로 서 있고, 할머니들 홀로 사는 집 마당에는 붉은 고추들이 널려 있습니다. 머리가 허연 할머니가 키 발을 딛고 낮은 슬레이트 지붕 난간에다가 호박쪼가리를 한 개 한 개 널고 있습니다. 오래 된 마을의 오래 된 저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굳은 약속일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사람일 터입니다. 저기 저렇게 꽃이 피어 있다고, 저기 저렇게 산과 들에 곡식들이 익어간다고, 저기 저렇게 푸른 하늘이 있다고, 저기 저렇게 노을이 붉게 사위어 간다고 세상 사람들에게 일러주는 사람일 터입니다. 크고 거대한 것들에게, 화려하고 눈이 부신 것들에게, 위대하고 찬란한 것들에게,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힘 있는 자들에게, 돈을 쥐고 세상을 흔드는 자들에게 눈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해 뜨기 전부터 해질 때까지 일을 해도 평생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1 트럭에 잡화를 싣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해가 지면 갈 곳을 찾지 못하는 젊은 가장에게, 아버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에게, 죽어라 농사를 지어도 빚더미에 올라앉은 젊은 농부가 논두렁에 앉아 누렇게 벼 익어가는

  • 나의 독서일기

    나의 독서일기 지면기사

    살갗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으로 계절을 느끼는 가을은 농부들에게는 땀 흘려 일군 수확의 계절이며 동시에 많은 수험생에게는 고통과 인고의 계절이기도하다. 우리 국민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추석이라는 황금 연휴가 다가오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추석 연휴에 조상의 묘를 찾는 것 외에도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생각을 할 것이다. 황금연휴라고 하는 황금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자. 이 아름다운 연휴가 황금알을 낳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일까?시간을 창조하는 삶 '독서'=나는 일 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설이나 추석 같은 황금연휴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고향이나 혹은 멀리 여행을 가지 않는 생활 철학이 있다. 이 기간 동안 적어도 하루 12시간 이상을 집중적으로 책을 읽는다. 이런 연휴에 움직이면 많은 시간과 돈을 길에 버리는 것이 너무나 아까울 뿐만 아니라, 긴 연휴 후에는 심신이 피곤하여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며칠씩 책을 읽으면 피곤한 것도 사실이지만,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넘길 때의 즐거움, 특히 연휴 끝자락에서 느끼는 지적 포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요 행복감이다. 인생의 삶의 가치는 감격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생명력이 있고 살아있는 글을 통해서 지난날을 돌아보고 현재를 결단하고 미래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혜안을 기르는 것은 우리들의 존재 의미를 더욱더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독서는 간식 아닌 주식=많은 사람들은 항상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읽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바빠서 매끼니 식사를 거르는 사람이 많지 않듯이, 현대를 사는 직장인이나 사업가들이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시간을 만드는 삶, 다시 말하면 숨어있는 시간을 찾고 시간을 창조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한번쯤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기만의 작은 시공간에 갇혀 살지만, 책을 읽고 지적 배고픔을 채워가는 사람은 시공

  • 가을엔 '혼자'가 되자 지면기사

    가을을 가리켜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라고 노래한 것은 일본의 천재작가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다. 유난히 예민한데다가 퇴폐적이었던 그는 마흔 살을 다 채우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투신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가을은 '초토'(焦土)이며 그래서 '무참하다'라고도 그는 썼다. 여름이 '샹들리에'라고 한다면 가을은 '등롱'(燈籠)이라고 표현한 것도 그 사람이다. 언젠가 작은 국수집에서 메밀국수를 기다리다가 탁자 위에 놓인 사진을 통해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벌판에 한 여자가 지친 듯 앉아있는 것을 들여다 보고나서 그는 또한 이렇게 썼다.'나는 가슴이 타서 재가 되는 것 같이 처참한 그 여자를 그리워했다. 사나운 정욕까지 느꼈다. 비참한 것과 정욕은 등과 배 같은 것인 모양이다. 숨이 멎을 듯이 괴로웠었다. 황폐한 벌판에서 코스모스를 만나면 나는 또 그것과 똑같은 고독을 느낀다'.가을이 주는 감성적 칼날이 이보다 더 날카롭게 드러난 표현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러고보면 '잎새에 이는 바람소리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윤동주의 감수성도 깊은 가을 한가운데에서 느끼는 존재에 대한 고통스러운 연민에 닿아 있었던 모양이다. 여름은 연민을 느낄 겨를이 없다. 일광은 타오르고 녹음은 무섭게 뻗어나가고 사람들은 전투적으로 걷는다. 문을 있는대로 열어젖혀야 하고 우두자국도 부끄러움 없이 드러내는 게 여름이다. 한낮의 시간처럼 모든 것이 아낌없이 열리고 불타오르니 우리들의 영혼은 작열하는 일광 밑에서 숨을 곳이 없다. 혼자 있으면서도 고독한 것을 알지 못하고, 달려가면서도 자신이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소리치면서도 그 소리의 메아리가 무엇을 울리고 되돌아오는지 가려보지 못한다. 영혼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지고 내면의 뜰은 횡경막에 눌려 비지땀을 흘릴 뿐이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라. 낮에는 햇빛이 아직 뜨겁지만, 저물녘이 오면 어느새 풀벌레가 울고 소슬한 바람이 분다. 흰옷을 찾아입고 창문을 하나씩 닫는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 소스라쳐 돌아보면 당신은 '혼자' 창가를 서성거리고 있다. '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