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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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최고의 비즈니스 지면기사
교회·불교계 소란·젊은 개혁 정치인 실종종교·정치 본질 없고 비즈니스만 있을 뿐기업인 대부분 사후에 '흉상' 남기는 이유는팔·다리 떨어질때까지 뛰었기 때문이란다한달여 전 60대 초반의 중견기업인 A대표와 그의 고향 충청도로 1박2일 여행길에 나선 일이 있다. A대표는 40여년 전 고등학교 졸업 직후 폐수처리업에 투신, 굵직한 중견기업을 일궈냈다. 사회봉사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내년 7월 '사회봉사를 표방하는 세계 최초의 봉사클럽 연합체'의 한 지구 총재 자리도 맡을 예정이다.A대표는 고향 동네 이곳저곳을 돌며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 고등학교 유학시절 고생담과 기업을 일구면서 겪었던 애환도 회상했다. 그러다 불쑥 "내가 40여년 사업을 하면서 '인생 최고의 비즈니스'라고 생각한 것이 3가지가 있다"며 '종교비즈니스, 정치비즈니스, 금융·보험 비즈니스'의 개인적인 관(觀)를 언급했다.일정 정도 위치에 오르면 더 이상의 큰 노력도 없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사견이다.서울의 대형 교회 부자 세습 논란이 연일 파장을 낳고 있다. 2015년 아버지 목사가 은퇴 후 2년 가까이 공석으로 있던 담임목사 자리에 아들 목사가 부임했다. '청빙 결의 무효소송'으로 이어졌고, 지난 7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재판국 재판결과 8명이 아들 목사의 청빙을 찬성, 7명이 반대했다. 한 표가 재판 결과를 가른 것이다. 개신교 법조인 약 500명으로 구성된 기독법률가회(CLF)는 "사실상 파행된 노회 절차를 무리하게 진행해 처리했으므로 절차적으로 무효"라고 주장, 파문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불교계도 연일 소란이다. 사상 초유 총무원장 탄핵사태로 조계종이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안팎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설정 스님이 퇴진하겠다던 약속을 뒤집고 지난 13일 '조계종 사부대중에게 드리는 글'을 직접 읽으며 "어떤 오해와 비난이 있더라도 종단 개혁의 초석을 마련하고 2018년 12월 31일 총무원장직을 사퇴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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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막바지 무더위 지면기사
한달 넘도록 끔찍한 '폭염'과 '여름 가뭄'찬바람 불면 '언제 그랬냐'는듯 잊지 말고내년 예산에 대비책 충분히 반영하길'닥치면 허둥대는 모습' 이제는 끝내야어젯밤에도 열대야와 전쟁을 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공기는 후텁지근하고, 집안은 온통 달궈져 벽이고 침대고 모두 뜨끈뜨끈하니 배겨낼 방법이 없다. 에어컨 바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틀어놓고 잘 엄두를 못 내다보니 밤마다 더위와의 싸움이다. 선풍기를 틀어놓고도 모자라 아이스팩을 천으로 둘둘 말아 끼고 있었지만, 결국은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아침을 맞았다. 또 하루 '극기훈련'을 한 기분이다.이번 여름은 얼마나 더웠던지, 휴대폰 배터리가 다 부풀어 올랐다. 잘 되던 기능이 갑자기 안돼서 '왜 이러지?' 하고 휴대폰을 살펴보니 얇은 배터리가 배를 '불룩' 내밀고 있었다. 들어보니 여기저기 이런 '더위 먹은 배터리'가 많아서 배터리 주문도 갑자기 늘었고, 휴대폰이 고장이 났다며 AS센터를 찾은 고객도 많았다고 한다. 배터리뿐이랴. 달리던 값비싼 승용차에서 불이 났다는 얘기를 올여름처럼 많이 들었던 적도 없는 것 같다. 굴지의 글로벌 기업인 BMW는 아예 '긴급점검 미이행 차량 운행중지'라는 철퇴를 맞았다. 하도 불이 났다는 기사를 많이 봐서 차를 몰고 다니기가 겁이 날 지경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역시나 기록적인 더위가 한몫을 했다는 분석이 많으니, 올여름 무더위가 남긴 또 하나의 '진기록'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다행히 이제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폭염의 끝이 보인다고 한다. 벌써 8월 중순을 지나고 있으니 무더위의 '피크'가 끝날 때도 됐다. 사실 아침에는 살살 찬바람이 돌기도 해서 조금은 숨통이 트이고 있는 중이다. 한 열흘쯤 있으면 언제 더웠냐는 듯 선선한 바람이 불 것이고, 한 달 넘게 이어졌던 기록적인 폭염에 대한 기억도 낙엽 지듯 가을바람에 지워질 터이다. 아마 그때쯤이면 다가올 추위가 더 걱정이 될는지 모르겠다. 사람이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한다. 그 많은 기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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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논란되고 있는 학생선수 학습권보장 지면기사
최저학력제 채우기 위해 낯선 환경서 수업선수들에 도움 안되고 학부모들 반발만 사그들 특성에 맞는 교육과정 도입된다면 어렸을때부터 체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어학생 선수들의 운동권 보장 문제는 수년 전부터 체육계와 교육계의 공통된 관심거리다. 경기도교육청은 학생 선수들의 기초학력 증진을 위해 지난해부터 최저학력제를 전면 시행하고 있다. 도교육청이 시행하고 있는 최저학력제는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국어와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중 한 과목이라도 소속 학교의 해당 학년 교과별 평균성적을 기준으로 일정 수준을 달성하지 못하면 다음 학기 전국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 초등학생은 평균 성적의 50%, 중학생은 평균성적의 40%다. 고등학생은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강좌를 들으면 학교장의 판단하에 대회 출전이 가능하다.사실 최저학력제 도입이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과 운동선수가 꿈인 청소년들 간에 학습차를 사실적으로 평가하고 있는지는 고민해 볼 문제다.모든 일반학생들에게 적용될 수는 없지만 많은 학생들이 영어와 수학은 학교 수업 외에도 추가적인 교육을 위해 사설기관의 강좌를 듣는다. 이런 사설기관에서 또는 학교 수업 외에도 자율적으로 공부를 하는 학생들과 학교 수업을 마친 후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같은 평가 기준으로 서열을 매겨 결정하는 최저학력제는 운동하는 청소년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인성이 바른 청소년을 육성하기 위함이라면 국어와 영어 수학, 사회, 과학 등 5개 과목 중 몇몇 과목 대신 인성 교육을 위해 윤리나 한국인으로서 뿌리를 알 수 있도록 역사와 같은 과목을 추가하는 것을 어떨까 제안해 본다.2 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위해 국가대표로 발탁된 청소년 선수들이 진천선수촌에 합류하면서 발생한 문제는 수업 참여 문제였다. 지금도 학생 선수들은 정규 수업에 참가하기 위해 진천선수촌 부근의 학교에 등교해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낯선 환경에서 오로지 수업일수를 채우기 위해 자신이 그동안 배워왔던 교육 과정과 다른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수업 참여가 학생 선수의 학습권 보장과 정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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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어느 노부부의 첫 백령도 여행 지면기사
방문객 맘에 들도록 혁신적 관광정책 필요이제는 서해 최북단 섬 이미지 벗어버리고남북 분단선 아닌 연결지점으로 돼야 한다 여유와 평화 즐길방안 없는지 고민해 보자우리 동네 세탁소 주인 부부가 며칠 전 백령도로 여름휴가를 다녀왔다고 했다. 60년 넘게 평생을 인천에 살면서도 백령도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단다. 그래서인지 벼르고 별러서, 정말이지 큰맘을 먹고 부부 둘이서만 백령도 여행을 떠난 거였다. 차를 갖고 들어가기에는 비용이 너무 비싸 백령도 현지 민박집에서 하루 5만 원씩 주고 렌트를 했다고 한다. 2박3일을 있었다. 부부의 표정은 백령도에 가기 전과 갔다 온 뒤가 달랐다.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으냐고 물으니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게도 가 보고 싶어 하던 백령도 여행에서 노부부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온 거였다.깨끗한 바닷물과 이색적인 해변처럼 눈길을 끌게 한 것들도 있었지만 이들 부부에게 백령도 여행이 기대만큼 만족스럽지 못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백령도만의 먹을거리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묻고 물어 찾아간 칼국숫집은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여행객의 마음까지 잡아주지는 못했다. 백령도 현지인들조차 이런 더위는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폭염이 심했는데, 덥고 짜증 나는 도심을 피해 멀고 먼 섬으로 온 관광객에게 더위를 날리게 할 장치는 없었다. 가장 큰 구경거리라는 두무진 해상 관광도 하지 못했다. 안개가 끼었다는 이유였다. 먹을 게 없었고, 더위조차 도심과 다를 게 없었고, 꼭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것도 있었다. 이 정도면 다시 가고 싶지 않을 이유로는 충분해 보였다. 마치 신혼여행을 준비하듯 했는데 안타까웠다.반면에 이들 부부보다 조금 먼저 백령도 여행을 다녀온 또 한 부부의 경우는 매우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둘의 차이는 개별적으로 갔느냐, 여행사를 끼고 단체로 갔느냐에 있다. 단체 여행 부부는 먹는 것도 좋았고, 백령도 이곳저곳을 설명해주는 안내원의 이야기도 맘에 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물론 백령도를 또 가고 싶은 여행지로 여긴다고 했다.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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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탄생 100주년 번스타인을 추억하다 지면기사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미국의 '문화영웅'작곡가·지휘자·피아니스트·교육자로 활동뉴욕 필하모닉 중심으로 수많은 명연과 함께'대중의 클래식화' 이끌어 낸 낭만주의자오는 25일은 20세기 미국의 '문화 영웅' 중 한 명인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1918~1990)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이 위대한 음악가를 기리기 위한 행사가 지난해부터 진행되고 있다. 번스타인의 악보 판권사 '부시앤드호크스'에 따르면 2017~2018 시즌에 전 세계에서 기념 공연과 이벤트가 2천여회 열린다. 국내에서도 지난해 1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번스타인 메모리얼 콘서트'를 시작으로 광주시립교향악단은 지난 3월에 열린 정기 연주회를 '번스타인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로 꾸몄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오는 10월 티에리 피셔의 지휘 아래 오페라 '캔디드'를 콘서트 버전으로 선보인다. 같은 달 내한하는 에사 페카 살로넨이 이끄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도 번스타인의 '교향곡 2번, 불안의 시대'를 연주한다.소니의 번스타인 지휘 앨범 100장 세트를 비롯해 도이치그라모폰과 데카도 공동으로 앨범과 DVD 세트를 내는 등 음반사들도 기념 음반들로 거장을 추억한다.보스턴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번스타인은 작곡가이자 지휘자, 피아니스트, 교육자로 활동했다. 하버드대에서 음악이론과 철학을 전공하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한 번스타인은 25세였던 1943년 뉴욕 필하모닉 부지휘자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그해 번스타인은 연주회를 앞두고 갑작스레 몸져누운 '지휘계의 거성' 브루노 발터의 대체 지휘자로 11월 14일 공연(라디오로 미 전역에 중계)을 치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1958년 최연소(40세)로 뉴욕 필 음악감독에 취임한 번스타인은 11년 동안 재임하며 뉴욕 필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60년대 번스타인과 뉴욕 필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전곡(CBS)을 최초로 녹음하는 등 역대 가장 많은 콘서트를 개최했다. 또한 번스타인과 뉴욕 필은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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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미군 유해 송환 추가로 이어지길 지면기사
실종자중 5300구 北에 있는 것으로 추정가족들 슬픔·기다림 깊이 헤아리기 힘들어'정서적 연대'는 이념이나 지역 뛰어넘는'보편적 인류애'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이었던 지난 27일 한국전쟁 중 북한에서 사망한 미군 유해 55구가 북한 원산 갈마비행장에서 평택시 주한미공군 오산기지로 송환됐다.미국은 남다른 '환영'의 입장을 내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미군 유해가 곧 북한을 떠나 미국으로 향할 것"이라며 "많은 가족들에게 엄청난 순간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백악관도 대변인 성명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미군 전사자 유해송환이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약속을 이행했다"면서 "우리는 북한의 행동과 긍정적 변화를 위한 모멘텀에 고무됐다"고 말했다. 또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북미 관계의 전환,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과감한 첫 번째 조치를 취했다"고 평가했다.미국 언론들은 한국전쟁 실종자 유가족들이 유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며 발 빠르게 후속 보도도 내놓았다. 그중 애리조나 길버트에 사는 잰 커런(70·여)씨의 사연이 눈에 띈다. 해군비행사였던 그녀의 아버지 찰스 개리슨 중위는 그녀가 3살 때 한반도 상공에서 격추된 뒤 포로로 잡혀있다가 숨졌는데 유해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그녀의 '아버지 유해찾기'는 수십년 간 이어졌다. 부친을 좋은 묘지에라도 모셔 자식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수십 개 실종자 모임에 참여했고, 지난 2013년에는 부친이 생포된 곳까지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버지를 모셔오지 못한 게 아직도 괴롭다는 사실이 참 놀랍다"고 말했다. 미국은 독립전쟁을 거쳐 탄생한 나라다. 개인의 자유와 가치, 평등을 매우 중시하면서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명예롭게 여긴다. 서부개척 시대를 거치면서 개인이 맺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인 '가족'에 대한 정서도 뿌리 깊게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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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인천 도시재생 정책 방향은 지면기사
2000년대 초반 '재개발·재건축' 가장 활발금융위기이후 대부분사업 폐지·축소·지연박남춘시장 공약 '원도심-신도시 균형발전'공공주도 한계 민간참여 등 '솔로몬지혜'를인천 남구 주안4동에 올해 개교 123주년을 맞은 인천고등학교가 있다. 1895년 6월 27일 개교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가 여러 번의 교명 변경 및 통합을 거쳐 인천고등학교(1951년 8월 31일)가 됐다. 인고가 주안4동에 자리 잡은 건 1971년 6월 5일이다. 인천감리서 안에서 개교한 인고는 송림동, 율목동을 거쳐 이곳에 왔다.인고백이십년사편찬위원회가 2015년 만든 '인고 백이십년사', 미추홀구(옛 남구)가 지난해 발간한 '도시마을생활사' 주안동 편에는 인고 이전 당시의 주안동 모습이 기록돼 있다. 주안동 일대는 인천 변두리 지역으로 학교 주위엔 논과 밭밖에 없었다. '민가 하나 없는 쌀쌀한 찬바람만 불어오는 황량한 지역'이었다. 허허벌판에 학교만 덩그렇게 있으니 동문의 불만이 많았다. 학교는 "지금은 이렇지만 10년 후에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며 설득에 나섰지만, 옛터로 되돌아가자는 극성파 동문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부동산 시장의 흐름을 읽고 예측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인지, 동문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적당히 둘러대어 위기를 모면한 건지 알 길 없지만, 어쨌든 주안동이 서서히 달라졌다. 인천 도심이 토지구획정리사업 등 도시 개발에 따라 이동·확장하면서 주안동 일대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 거다. 1975년 인고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석바위시장이 개설됐고, 2년 후 시장 인근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주안주공)가 들어섰다. 남동구와 연수구가 개발되기 전까지 주안동 일대, 특히 주안2·4동은 신도시 개념의 부촌(富村)이었다고 한다.며칠 전 찾아간 인고 뒤편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단독주택·빌라·상가 대부분이 텅텅 비어 있었고, 건물 외벽에 빨간 스프레이로 '철거'라고 적혀 있거나 현관문이 쇠사슬 또는 나무 막대로 굳게 잠겨 있었다. 이 일대 약 9만560㎡는 주택재개발구역으로, 철거 등 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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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폭염속의 한국 경제 지면기사
최저임금 인상에 소상공인 등 타격 심각고용시장도 위축 취업률 증가폭 낮게 잡아정부, 저소득층 가계소득 보전 지원대책'땜질식 처방'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해야7월 폭염 못지 않게 인터넷이나 신문을 뜨겁게 달군 것이 바로 최저임금일 것이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지난 7일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을 올해 대비 10.9% 늘어난 8천350원으로 확정했다. 이는 경영계나 노동계 모두 불만족한 결과로 이어져 지금까지 폭염 못지 않게 최저임금이 화두가 됐다. 특히 2년 연속 두 자릿수의 인상률을 기록한 최저임금으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의 타격은 더욱 심각해졌다. 당장 중소기업계와 소상공인들은 생존권 보장을 주장하며 반발했고, 일선 영업장에선 폐업까지 고려한다고 하니 일자리 창출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 뻔하다.소상공인 중에서도 편의점 업계는 더욱 심각하다. 프랜차이즈 편의점은 전국적으로 4만192개(3월 기준)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10년 1만6천937개에 비해 2만3천255개 늘어난 수치다. 하지만 점포당 매출액은 지난해 2월 3.5% 감소한 뒤 12개월 연속 감소세를 기록하는 등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인상된 최저임금(16.4%)이 적용되면서 편의점 가맹점주와 본사 모두 경영상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실제 편의점 점주들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올해 월평균 수익이 195만원에서 130만2천원으로 감소했다며, 내년에는 50만∼60만원 정도 수익이 추가로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지난해 국민들은 최저임금 상승의 당위성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2년 연속 최저임금이 두자릿수로 오르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영세 자영업자를 비롯해 소상공인, 중소기업 등이 인건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존 일자리까지 사라지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저소득층의 생계는 더욱 팍팍해졌다.고용시장도 크게 경직됐다. 통계청이 발표한 6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취업자 수는 2천712만6천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10만6천명 증가하는 데 그쳤다. 앞서 2월부터 4월 고용동향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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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두려운 '감시자의 눈' 지면기사
인권위 지적처럼 인권침해 할 수 있는 CCTV사방에서 24시간 '감시' 당하고 있는평범한 사람들에겐 가슴이 답답하기만 해무작정 늘리는게 정답인지 따져봐야 할때좀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사거리에서 신호대기를 할 때처럼 집 밖 어딘가에 멈춰 있을 때 고개를 들어 뭔가를 찾는다. 특히 엘리베이터를 혼자 탈 때면 나도 모르게 천장 모서리를 슬쩍 쳐다본다. 역시나 어김없이 그곳에 딱 있다. 맞다 내가 찾는 건 CCTV(폐쇄회로TV)다. '찾는다'는 말이 어색할 만큼 굳이 찾을 필요도 없는 건, 열이면 열 꼭 생각한 그곳에 어김없이 있기 때문이다. CCTV를 볼 때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제목이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라는 윌 스미스 주연의 스릴러 영화다. 주인공 윌 스미스는 액션하고는 관계가 없는 변호사였는데, 국가안보국 요원들에 쫓기던 옛날 대학 동창이 슬쩍 그의 쇼핑백에 넣은 '중요한' 녹화 테이프 때문에 그도 쫓기는 신세가 된다. 여기서 국가안보국이 CCTV며 인공위성까지 동원해 주인공을 추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영화를 보면서도 CCTV 추적이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억 속에 깊이 박힌 영화가 됐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지금부터 20년 전인 1998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CCTV라는 게 그 정도로 흔하지 않을 때다. 그 이후 20년 사이에 엄청나게 숫자가 늘어나고 성능이 정교해진 CCTV들을 생각하면, 정말 우리는 CCTV의 '손바닥' 안에서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실제로도 CCTV는 이제 어디에서나 눈을 부라리고 있는 '감시자의 눈'이 되어 버렸다. 이런 기억들과 최근 뉴스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CCTV 영상들이 더해져 CCTV는 나에게 뭔가 '찜찜한 존재'로 자리를 잡았다. 행정안전부 통계를 찾아보니 작년을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CCTV 개수가 95만4천261개나 된다고 한다. 통계를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게다가 최근에는 1년에 10만개도 넘게 늘어나고 있다. 2016~2017년 한 해 동안에도 10만9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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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러 거장 지휘자 '로제스트벤스키' 서거 지면기사
1955년 볼쇼이극장서 발레 지휘로 데뷔오페라 등 모든 장르 뛰어난 실력 갖춰정부 간섭 불구 서방에서 활발하게 활동2012년 서울시립교향악단 객원 지휘하기도러시아의 거장 지휘자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Gennady Rozhdestvensky·1931~2018)가 지난달 1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7세.구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로제스트벤스키는 모스크바음악원에서의 뛰어난 성적을 인정받아 1955년 볼쇼이극장의 발레 지휘로 데뷔했다. 1959~1973년 모스크바 국립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재임한 로제스트벤스키는 1962년과 1972년에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과 미국 공연을 펼쳐 대성공을 거두는 등 발레 음악과 오페라, 교향곡 등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20세기 중반 러시아 지휘계의 양대 산맥이었던 예브게니 므라빈스키(Yevgeny Mravinsky·1903~1988)와 키릴 콘드라신(Kiril Kondrashin·1914~1981)의 뒤를 잇는 로제스트벤스키는 당시 구 소련의 여타 지휘자들과 달리 서방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콘드라신이 1979년 네덜란드로 망명한 이후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헤바우에서 지휘자로 활동하지만, 로제스트벤스키는 국적을 유지하면서도 다수의 해외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와 함께 1974~1978년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닉, 1978~1982년 BBC 교향악단 수석 지휘자를 역임했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서방에서의 활동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간섭이 있었다고도 한다.로제스트벤스키가 돌아왔을 때, 모스크바 방송교향악단은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Vladimir Fedoseev·1932~ )라는 또 다른 걸출한 지휘자가 이끌고 있었다. 이에 소련 당국은 로제스트벤스키를 위해 소련 문화성 교향악단(USSR Ministry of Culture Symphony Orchestra)을 급조했다.로제스트벤스키와 소련 문화성 교향악단이 남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집' 음반(멜로디아)은 특히 뛰어나다. 소련 유일의 시벨리우스 스페셜리스트로, 폭 넓은 레퍼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