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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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여론과 정권의 권위 지면기사
최근 문재인 대통령 국정지지율이 가파르게 떨어지는 여론조사 결과가 잇따르면서 여권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문 대통령과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촛불혁명의 적자를 자처해왔다. 정권의 기원을 '혁명'에 두고 있으니, 혁명의 동력이었던 시중 여론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3일 어려운 민생경제와 이재명 경기도지사 사태를 대통령 지지율 하락 이유로 꼽았다. 당 대표가 이유를 설명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임을 방증하는 대목이다.하지만 여론조사나 광장의 시위가 민심을 대변하는 지표로서 유효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키케로는 "민중 만큼 정해지지 않은 것은 없고, 여론 만큼 애매한 것은 없고, 선거인 전체 의견 만큼 허위적인 것은 없다"고 했다. 로마 최후의 공화주의자에게도 민중, 여론, 선거민심의 실체를 정의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금권정치로 유명한 크라수스를 혐오했는데 어느날 그를 칭찬하는 대중연설을 해 대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칭찬연설의 이유가 이랬다. "나쁜 일을 한 사람을 얼마나 칭찬할 수 있는지 내 웅변실력을 시험해봤지." 로마시대 민중의 여론은 정치인들의 연설을 따라다녔다.여론과 민중은 변덕스럽다.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100만 대중이 3개월 동안 광화문에서 촛불을 켰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들과 "미국산 소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먹겠다"는 연예인들을 이끈 시민단체의 저항은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정부는 수입 결정을 밀어붙였다. 지금 수입육 1위인 미국산 소고기는 아무 저항 없이 절찬리에 유통중이다. 여론과 민중이 꼭 진실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노동·시민단체가 문재인 정부의 배신을 규탄한다고, 문 대통령의 배신이 확정되는 건 아니다.정권은 여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론을 감당할 권위를 상실할 때 무너진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촛불대중을 설득할 권위가 없어 탄핵당했다. 키케로는 "권력은 시민에게 있고 권위는 원로원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여당은 떨어지는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을 걱정하기에 앞서 당·정·청의 권위가 무너지는 걸 걱정해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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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국가 부도의 날' 지면기사
1997년 IMF 위기는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경제위기 때마다 IMF를 거론하는 것은 그만큼 두렵고 무섭기 때문이다. 그래도 떠올려야 하는 건 다시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벼락처럼 온 게 아니었다. 수많은 전조가 있었다. 연초부터 모든 통계는 비관적이었다. 1월 한보가 쓰러졌다. 금융권이 얼어붙으며 대출 회수가 시작되면서 3월 삼미, 4월 진로, 5월 삼립식품, 6월 한신공영이 잇따라 무너졌다. 7월 태국에서 외환위기가 시작되면서 기아차가 부도를 맞자 국제신용기관 무디스와 S&P가 신용등급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정부의 무능은 외국 자본의 불신을 초래했다. 우선 외국 자본이 빠져나갔다. 금융기관들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매입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환율은 급등하고 외화보유액이 바닥났다. 중소기업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공포였다. 기업에서 쫓겨난 가장들이 여기저기서 목숨을 끊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노숙자'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얼마 전까지 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큰소리쳤던 경제 고위관리들이나 대통령까지 그 누구도 사태의 책임을 지지 않았다. 21년 전 오늘 1997년 12월 3일은 임창열 경제 부총리와 캉드쉬 IMF 총재가 긴급 자금 양해각서를 체결한 날이다. 이때 IMF에서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 우리는 간신히 국가부도 사태를 면했다. 최근 개봉한 '국가부도의 날'은 당시 우리의 긴박했던 경제 위기를 그린 영화다. 최근 4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태국은 IMF 외환위기에 이른 과정의 잘잘못을 가린 '누쿨보고서'를 냈다. 우리는 그 흔한 백서(白書)도 만들지 않았다. 뒤늦게 제작된 영화가 백서를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재미로 보기엔 아픈 대목이 너무도 많다. 1997년 경제 총수였던 강경식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2010년 출간한 회고록 '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에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로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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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무너진 제복의 권위 지면기사
지난 13일 멕시코의 마약왕 호아킨 구스만의 첫 재판이 뉴욕 브루클린 연방법원에서 열렸다. '엘 차포'라는 별명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악명높은 마약왕인 구스만은 200t이 넘는 마약밀매, 돈세탁, 살인교사, 불법 무기 소지 등 17건의 혐의로 기소됐다. 이날 재판에서 구스만은 "전·현직 대통령에게 수억 달러를 줬다"고 진술했다. '세기의 재판'이 끝난 3일 후 넷플릭스는 멕시코 마약카르텔의 변천을 다룬 '나르코스: 멕시코'를 공개했다. 이 드라마는 왜 멕시코가 마약 천국이 됐는지, 멕시코 공권력이 마약 밀매꾼들에게 왜 그렇게 무력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멕시코는 나라 전체가 마약 카르텔의 범죄로 큰 혼란을 겪는 중이다. 이 지경이 된 건 부패한 정부 관리와 경찰이 잔악한 갱단과 결탁했기 때문이다. 정부관리는 뭉칫돈을 받고, 경찰은 순간의 달콤함에 현혹된 마약을 운반해주고 그 대가로 푼돈을 손에 쥔다. 멕시코 국민들은 경찰을 믿지 않는다. "멕시코 경찰 제복이 피와 코카인 가루에 물들어 있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경찰 제복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마약산업이 번창했다. 우리 경찰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확실히 변했다. 아마도 검찰과 경찰 간의 수사권 조정에 대비해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상당수 국민도 경찰의 수사권독립에 우호적인 편이다. 그러나 경찰이 보는 앞에서 노조원들에게 무참하게 폭행당한 유성기업 상무 사건은 경찰에 수사권을 넘겨줘도 되는가 하는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기업 측과 노조 측만 바뀌었을 뿐 과거 늘 권력 편에 선 '진짜' 경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다. 사건이 터진 지 3일이 지난 어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사과했다. 경찰도 당시 대응이 적절했는지 감사에 착수했다. 그럼에도 장관과 경찰청장이 유성기업을 찾아가 사과하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폭행이 벌어지면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가해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고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번 사건은 경찰이 민노총 앞에서 무력함을 보여주며 스스로 제복의 권위를 무너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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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금수저'를 향한 동경과 경멸 지면기사
국세청은 28일 미성년 자녀들에게 금수저를 물려준 변칙증여자 225명을 세금 탈루혐의로 조사한다고 밝혔다. 한 치과의사는 미성년 자녀를 부동산임대업자로 등록한 뒤 상가건물을 증여했단다. 아파트 2채를 4억원에 취득한 만 4세 유치원생과 아파트 2채를 11억원에 취득한 12살 초등학생도 있다. 비상장 주식을 아버지나 할아버지에게 사들여 엄청난 상장 차익을 챙긴 미성년자들도 조사대상이다.같은 날 코오롱그룹 이웅열 회장의 금수저 발언도 주목을 받았다. 그는 회장직 퇴임을 선언하면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덕분에 특별하게 살아왔지만 그만큼 책임감의 무게도 느꼈다"고 밝혔다. "금수저를 물고 있느라 이가 다 금이 간 듯한데 이제 그 특권도 책임감도 다 내려놓는다"고 밝혔다. 그의 아들이 그룹 승계를 위해 경영수업중이니, 금수저 특권 포기 선언이 맞나 싶다. 그래도 '금수저'의 책임감을 강조한 재벌 회장은 낯설어 신선하다.소위 '금수저'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은 동경과 경멸 사이를 오간다. 금수저를 향한 동경은 본능적이다. 권력이 작동하는 모든 사회에서 대중은 금수저 계층이 되려 경쟁한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은 태자당이, 북한은 백두혈통이 금수저 사다리의 정점이다. 그 사다리에 한 발이라도 걸치려는 경쟁은 치열할 것이다. 그러니 개인의 능력에 따른 계층이동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주의 체제에서 금수저를 향한 동경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장려돼야 한다. 그래야 제2의 정주영, 스티브 잡스가 나올 수 있다.금수저를 향한 경멸의 근거는 그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이 정당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재벌의 경영승계가 비난받는 이유는 불법·탈법·편법적이라서다. 래퍼 마이크로닷은 부모의 재산을 솔직히 공개하는 바람에 위기를 자초했다. 부모의 사기 전력이 드러나면서 금수저 스웩(swag)은 힘이 빠졌다. 고용세습을 의심받는 노조권력은 청년들의 비난에 직면했다.금수저 논란이 계층 대립을 격화시키는 현상이 걱정이다. 경멸의 근거를 제거해야 한다. 사회는 세습 과정의 불법을 발본색원해 금수저를 정화하고, 금수저들은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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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경인신춘문예 지면기사
'성산포 시인'으로 잘 알려진 이생진이 지난주 38번째 시집 '무연고'를 출간했다. 그는 올해로 90세다. 노시인의 기사를 읽는 중 이 대목에 눈길이 갔다. "나도 시인이 되려고 발버둥 치던 시절이 있었다." 발버둥을 칠 정도로 하고 싶었던 시인(詩人). 하긴 우리도 한때 시인이 되고 싶은 시절이 있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왠지 가슴이 뜨거워지고, 밤잠을 설치며 무언가를 끄적였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지금도 11월이 오면 그렇게 밤을 꼬박 지새우는 사람들이 있다. 신춘문예 지망생들이다. 신춘문예 역사는 백 년이 넘었다. 1914년 12월 10일 매일신보 1면을 장식한 '신년문예모집'이 그 시작이다. 1919년 매일신보가 '신년현상공모'를 냈고, 1924년 동아일보, 이 신문의 주필 겸 편집국장이던 벽초 홍명희가 단편소설, 신시, 가극, 동요, 가정소설, 동화 등 6개 부문에 걸쳐 '현상문예 대모집'이란 이름으로 작품을 공모했다. 이때 아동 문학가 윤석중(尹石重)과 한정동(韓晶東)이 등용 1호의 영예를 안았다. 그 이듬해부터 일간지들이 앞다퉈 신춘문예를 공모하기 시작했다. 문단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만, 일간지의 신춘문예는 여전히 가장 권위 있는 등용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찬바람이 불자 약속이나 한 듯 신문마다 신춘문예 공고가 게재되고 있다. 경인일보도 '기해년, 문단의 샛별을 찾습니다'는 제목 아래 '201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공모' 사고가 나갔다. 경인 신춘문예는 경인지역 언론사 중 유일한 작가 등용문이다. 1987년 첫 당선자(소설·시·시조)를 배출한 이래 어느덧 서른 해를 넘겼다. 어려움 속에서도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 신춘문예가 지속된 것은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경인 신춘문예로 배출된 작가들이 지역 문단은 물론 중앙 문단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물론 신춘문예를 통해야만 큰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문이나 문예지, 기성작가의 추천을 받지 않고서도 훌륭한 작품을 남긴 작가도 적지 않다. 지적 문체와 듬직한 역사의식을 가졌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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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국민투표 지면기사
지난 주말 발표된 두 나라의 국민투표 결과가 화제다. 대만은 지난 24일 실시된 탈원전 폐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투표자의 59.49%가 정부의 탈원전 정책 폐지에 찬성했다. 이로써 2025년까지 원전을 완전히 폐쇄한다는 차이잉원 총통의 '원전 없는 나라' 공약은 없던 일이 됐다. 지난해 발생한 국가적 블랙아웃(대정전) 사태가 총통의 꿈을 꺾었다. 그 불똥이 문재인 정부에 튀었다. 정부는 탈원전 정책의 롤모델을 잃었고, 탈원전 반대 세력은 뜻밖의 호재에 입이 열렸다.25일 스위스 국민투표에서는 소의 뿔을 뽑지 않고 그대로 기르는 농가에 보조금을 주자는 '가축 존엄성 유지' 법안이 거부됐다. 국제법보다 스위스법을 우선하자는 관련 법안도 마찬가지. 반면에 보험사기 의심 환자의 사생활을 감시하자는 법안은 승인됐다. 소 뿔 제거·국제법과 국내법의 우선순위·나이롱 환자 감시라는 이질적이고 경중이 달라 보이는 안건을 국민투표에서 똑같은 무게로 다루는 스위스 직접민주주의의 정수(精髓), 이를 견학하는 우리의 심경은 착잡하다.대만과 스위스는 헌법과 법률로 국민투표 발의 조건을 쉽게 해 직접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대만은 총통선거 유권자수의 0.01%의 서명을 얻은 뒤 다시 선거 유권자수의 1.5%의 서명을 받은 안건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국민투표를 실시해야 한다. 이번 국민투표에는 10개의 안건이 올랐다. 스위스는 헌법개정 제안은 유권자 10만명, 법안은 유권자 5만명의 요구로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올해에만 4번의 국민투표로 10개의 법안중 4건을 승인했다. 국민에게 300만원의 기본소득을 보장하겠다는 기본소득법이 국민투표로 거부된 건 2016년의 일이다.물론 직접민주주의가 만능은 아니다. 스위스와 대만의 정치는 천양지차고, 대부분의 선진국이 대의제도로 민주주의를 실현한다. 나라마다 정치를 구성하는 전통과 환경이 달라서다. 하지만 입만 열면 국민 여론을 앞세우는 한국정치에서 국민투표 발의권을 대통령에게만 한정하고 있으니 생각해 볼 문제다. 대신 국민과 소통하는 직접민주주의를 한답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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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이간계(離間計) 지면기사
춘추시대 노나라 대부(大夫) 변장자(卞莊子)는 여관에서 일하는 아이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소를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소고기를 먹어 보고 맛이 있으면 반드시 다툴 것이고, 다투게 되면 반드시 싸울 것이며, 싸우게 되면 큰놈은 다치고 작은놈은 죽을 것이니, 다친 놈을 찌르면 죽은 놈까지 더해 호랑이 두 마리를 단번에 잡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실력이 비슷한 둘을 서로 싸우게 해 둘 다 얻는다는 변장자자호(卞莊子刺虎), 이호경식계(二虎競食計)는 여기서 유래됐다. 정치판에는 상대들의 갈등을 조장해 서로 싸우게 함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계략들이 많다. 이이제이(以夷制夷)도 그렇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친다는 이이제이는 이쪽 적을 끌어들여 저쪽 적을 공격하게 하는 분열책이다. '남의 칼(힘)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는 차도살인계(借刀殺人計)도 모두 상대끼리 의심하게 하여 자중지란을 유발하는 고도의 책략이다. 방휼상쟁(蚌鷸相爭), 어부지리(漁父之利), 일거양득(一擧兩得)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 이간계(離間計)의 범주에 포함된다. 손자병법의 저자인 손무(孫武)도 '말 몇 마디로 상대를 갈라놓는 이간계가 적을 이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고 했다.이재명 경기지사는 경선을 앞두고 문심(文心)을 들고 나온 전해철 의원과 갈등을 빚던 지난 1월 15일, 성남시장 신년기자 간담회에서 "전통적으로 전략 중에서 가장 돈 안들고 효과적인 전략이 '이간계' "라며 "내부분열을 야기하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다. 이간계 전략에 놀아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하나의 팀으로 서로를 격려하고 작은 차이를 인정하고 더 큰 목표를 향해 협력해 나가는 그 중심에 나도 있다. 우리는 하나의 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이 지사가 지난 25일 검찰 출석에 앞서 또 다시 '이간계'를 들고 나왔다. 페이스북에 이른바 '혜경궁 김씨' 사건의 본질을 '이간계'라고 지적한 것이다. 이 지사는 "검찰제출 의견서를 왜곡해 유출하고 언론플레이하며 이간질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이간계를 주도하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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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해안 철책선 철거 지면기사
2002년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 제작이 발표되자 영화계가 크게 술렁거렸다. 주연을 한국 최고의 배우 장동건이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저예산 영화에 장동건이 출연한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기덕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내가 자청했다.개런티는 중요하지 않다"는 장동건의 말이 더 화제였다. '해안선'은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흥행은 참패했다. 한국 5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한국인의 알 수 없는 영화 취향'의 희생물이 된 것이다. 오히려 외국에서 이 영화를 주목했다. 박찬욱의 '공동경비구역 JSA'보다 더 관심을 끌었다. 간첩을 잡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해안 초병이 실수로 민간인을 사살한 뒤 파멸해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광기와 영혼의 파괴, 나아가 남북 분단 아픔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장동건의 광기 연기는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서 말론브란도가 보여준 광기와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장동건이 이렇게 연기를 잘했었나"라 할 정도로 '메소드 연기'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김기덕이 '해안선'에서 주목한 건 '철책선'이다. 철책선은 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남북 분단의 상징이었다. 그동안 많이 철거됐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해안가 곳곳에는 '이곳은 군사작전 구역이니 출입을 엄금함'이라고 쓰인 철책선과 경고판이 늘어서 있다. 해안은 아름다운 피서지가 아니라 출입금지 팻말과 철책선 둘러쳐진 분단의 현장이다. 영화는 철책선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극명하게 그려냈다. 국방부가 2021년까지 경기도 해안과 강에 설치된 철책선 107㎞, 인천 도심 해안가를 둘러싸고 있는 철책선 44㎞를 철거한다고 발표했다. '긴 해안선과 연안자원'을 한국 발전의 원동력으로 꼽고 어장 및 수자원 관리에 주력할 것을 주문한 건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엘리너 오스트롬 미국 인디애나대 교수였다. 철책선 철거로 해안선이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면 지역경제 발전에 더할 나위 없는 큰 원동력이 될 것이 분명하다. 또한, 수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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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DJ와 노무현의 현실감각 지면기사
문재인 정부가 노동계의 반발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오늘 청와대에서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출범시키지만, 민주노총은 어제 총파업으로 불참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민노총은 이제 사회적 약자가 아니다.(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 "민노총은 고집불통.(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라고 몰아세운다. 하지만 서운하다는 표시이지, 척을 지겠다는 의지는 아니다. 민노총이 오히려 당당하다. '우리 때문에 집권한 것 아니냐'는 채권자의 위세가 대단하다.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생전에 정치지도자의 덕목으로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강조했다. 현실을 외면한 정치철학의 공허함과, 철학이 없는 현실감각의 천박함을 동시에 경계한 것이다. 그는 공기업 민영화와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IMF위기를 단숨에 돌파했다. 노동자의 실직과 저임금을 감수한 용단이었다. 이지스함 건조를 시작했고 크루즈 미사일 개발에 착수하는 한편 대북 미사일 사거리를 연장했다. 재건된 경제와 강화된 안보를 바탕으로 햇볕정책을 밀어붙이고 임기말에 평양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도 그의 현실감각을 보여주는 사례다.노무현 전 대통령은 토론에 의지한 민주주의 통치론과 순결한 도덕성을 리더십의 근간으로 삼았다. 일선 검사들과의 맞짱 토론을 감수할 정도로 여론과 직접 맞섰다. 자신이 틀렸다면 입장을 바꾸는 도덕성의 소유자였다. 대통령 선거 공약과 달리 철도 민영화에 나서고, 기간제법과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을 처리했다. 민노총과의 약속과 국가경제를 위한 노동정책을 견준 뒤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DJ정부의 햇볕정책만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문서로 구체화했다. DJ의 리더십은 노무현 시대에 이어졌다.문재인 정부의 서생적 문제의식은 선명하다.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구분하는 문제의식은 비판의 수용을 거부한다. 소득주도성장 집착증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문제의식 밖의 현실은 차갑고 거칠다. 이·영·자(20대·영남·자영업자)가 등 돌리고, 한미동맹은 흔들리며, 한일관계는 최악이다. 정부와 여당이 이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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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네이밍 법안 홍수 지면기사
네이밍(naming)은 '이름 짓기, 이름 붙이다'라는 뜻이다. 새로운 상품이나 회사, 그룹 등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나름 명칭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법에도 소위 '네이밍 법안'이라고 해서 특정인의 이름을 붙인다. 내용을 알리고 법안 발의자 존재감을 부각할 수 있어 의원들 사이에선 유행이다. '김영란법'을 비롯해 '조두순법' '태완이법' '신해철법' '김광석법' '유병언법' '최진실법' 여기에 '우병우 방지법'까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그러나 문제도 있다. 요즘 매일 언론을 장식하는 '박용진 3법'이 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을 뜻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김영란법'의 정식 명칭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고 '신해철법'은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법 일부 개정안'이다. 살인죄에 대한 공소 시효를 폐지한 '태완이법', 범죄수익을 은닉한 제삼자에게 숨겨놓은 재산도 추징할 수 있게 한 '유병언법' 등이 있지만 이름만으로는 법안 내용을 알아채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저 듣기 편하고 홍보 효과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발의한 사람의 이름을 붙인 법안부터 피해자 이름을 붙인 법안, 처벌 대상자 이름을 붙인 법안 그리고 쟁점이 된 인물의 이름을 붙인 법안 등 무분별하게 갖다 붙인 탓이다. 과도한 네이밍의 사용으로 법안의 기본취지가 흐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도 그래서다.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진 스물한 살의 젊은이 윤창호 씨 사건을 계기로 발의된 '윤창호법'도 그런 경우다. 이 법안 역시 시간이 지나면 네이밍만으로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게 분명하다. 차라리 이 법안을 공동발의했으나 본인이 음주 운전하다 적발돼, 코미디를 방불케 했던 국회의원의 이름을 따 '이용주법'이라고 했으면 더 이해가 쉬웠을지도 모른다. 모든 법안이 다 그렇겠지만, 특히 네이밍 법안의 가치는 제정된 법이 얼마나 타당성과 실효성을 가지고 시행되느냐에 달려있다.네이밍을 남발하다 보면 진실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