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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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영화 '곤지암' 유감 지면기사
경기 광주의 '곤지암읍'과 '곤지암리'를 지칭하는 공통 지명이 '곤지암'이다. 읍 명칭이자 읍사무소 소재지인 것이다.밥장사를 하는 최미자씨가 1980년대 시작한 소머리국밥이 유명세를 타면서 이름을 알렸다. 중부고속도로 곤지암 IC가 개통되고, LG그룹에서 곤지암 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전국구가 됐다.1980년대까지는 100여 호 남짓한 시골 마을이었다. 산 좋고 물 맑아 성남과 이천 시민들이 몰려와 피서를 즐겼다. 2000년대 들어 개발 바람을 타고 인구가 급증, 면에서 읍으로 승격했다. 성남~이천~충주를 연결하고 양평과 여주~용인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다.영화 제목 '곤지암'이 논란이다. 하필 공포 체험의 성지로 불리는 지역 내 정신병원을 소재로 했다. 공포 체험단 7명이 병원에서 겪는 기이하고 섬뜩한 일을 담은 영화다. 영화에서 병원은 환자 42명이 집단 자살하고 병원장이 실종된 이후 섬뜩한 괴담에 휩싸인 으스스한 장소로 묘사된다.죄다 허구다. 그런데 굳이 영화명에 '곤지암'을 갖다 붙인 게 고약하다. 정신병원의 실제 이름은 곤지암 정신병원이 아니다. 소재지도 신대리 161-1로, 곤지암리에서 2㎞ 정도 떨어져 있다. 곤지암 읍이니 상관없다고 우기는 것도 무리다. 신경정신병원이 세워지고 문을 닫을 때까지 '실촌면' 관내였다. 상·하수도 문제로 어려움을 겪다 1996년 폐쇄됐고, 소유자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면서 방치됐을 뿐이다.곤지암 주민들은 억울하고 괘씸하다. 제목 변경을 요구하면서 관람 거부운동에 나섰다. 지방선거를 의식한 정치권까지 가세했다. 하지만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대꾸가 없다. 치밀한 상술에 의한 노이즈마케팅이란 비판이 나온다. 곤지(昆池)라는 못에 바위(岩)가 솟아 있다고 해서 곤지암이다. 백과사전에는 임진왜란 당시 패전해 전사한 신립 장군과 곤지암이 관계가 있다고 한다. 그의 묘도 곤지암에 있다. 왜군에 패해 전사한 것도 분한데 묘 자리가 있는 마을이 공포영화의 제목이 됐다는 사실을 알면 신립 장군은 뭐라 할까. 답답하고 괴이한 일이다. /홍정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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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빙속 女帝의 눈물 지면기사
출발선상에서 이상화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선수생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평창올림픽. 자신을 지켜보는 수많은 시선들. 더욱이 상대는 일본 선수 고다이라 나오. 그만큼 금메달이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정확히 37초33 후. 결승선을 통과하자 빙속의 여제 이상화를 연호하는 관중의 함성으로 경기장은 들썩였다. 금메달에 0.39초 뒤진 기록이었지만, 최소한 관중들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표정관리를 잘하던 이상화지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금메달을 따지 못해 슬픈 것은 아니었다. 이제 정말 끝났구나 싶었다. '고마웠다'란 말을 가장 듣고 싶다." 빙속의 여제라는 소릴 듣지만 이상화의 선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쇼트트랙 선수로 출발해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꾼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타고난 운동신경 때문인지 쉽게 적응했다. 문제는 부상이었다. 끈질기게 이상화를 괴롭혔다. 무릎부상에 이어 하지정맥류. 이상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집안 사정상 동생을 위해 선수생활을 포기한 오빠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달려야 했다. 이상화는 10년간 빙속 여제로 세계를 호령했다. 2006 토리노올림픽 때 5위를 했던 그녀는 2010년 스무살의 나이에 밴쿠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더욱이 2014 소치올림픽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2연속 금메달을 차지해 '올림픽 레전드'의 반열에 올랐다. 이날 금메달을 딴 고다이라는 눈물을 흘리는 레전드 이상화를 안아주면서 "넌 내가 존경하는 선수"라며 한국어로 "잘했어"라고 말했다. 이 장면에 대해 AP통신은 "역사적인 문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나라지만 화합을 보여줬다"고 극찬했고, 일본 언론도 "한일 정상 결전의 마지막은 아름다운 결말이었다"고 타전했다.이상화는 은퇴의 기로에 서 있는듯 싶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이상화에게 "은퇴하지 말라"고 강권할 수 없다. 부상을 안고 뛰는 선수 생활의 고통을 우리 범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퇴 결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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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고은과 광교산 지면기사
"광교에 와서/…/광교의 나뭇가지가 되고 싶습니다/…/그 나뭇가지로 이듬해도/그 이듬해도 서리서리 살고 싶습니다//…/광교에 와서/…/이윽고 서해 낙조의 멍한 바다 그 어디로/다 스러져가는 긴 물이 되고 싶습니다//또한 광교에 와서/…/환한 달밤의 눈물 같은 하룻밤이 되고 싶습니다/…" 시인 고은이 2015년 2월부터 경인일보 1면에 연재한 '고은의 광교산 연작' 10편 중 첫 편, '광교산에 와서'의 일부분이다.염태영 수원시장의 표현을 빌리자면 "삼고초려로 모셔온 보물" 고은은 2013년 8월부터 수원 광교산에 새롭게 거처를 마련했다. 20여년 안성생활을 청산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테지만, 수원을 인문학 도시로 만들겠다는 염 시장의 간곡한 염원에 마음을 열었을 터이다. 시업(詩業) 말년의 결정인 만큼, 광교에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 순명(順命)이라 여겼음직 하다. 시 '광교산에 와서'는 시인이 광교에 뼈를 묻겠다는 선언이었던 셈이고…. 이후 고은 문학관 건립을 둘러싼 시비와 광교산 주민의 퇴거 시위 등 민망하고 고약한 사단이 있었지만, 가타부타 반응 없이 광교살이의 뚝심을 보여준 시인이다.그랬던 시인 고은이 수원시가 마련해준 광교산 거처(문화향수의 집)를 떠날 의사를 밝혔고, 수원시는 18일 이를 수용했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고은 재단 측은 "광교산 주민들의 반발로 수원시가 제공한 창작공간 거주를 부담스러워 했다"며 "시인이 더 이상 수원시에 누가 되길 원치 않는다"고 광교산 퇴거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이런 이유 말고도 최근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속 'En선생'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는 난처한 사정도 광교산 시대를 정리하려는 결심을 부추기지 않았을까 싶다.광교산을 떠난 뒤 수원에 남을 것이다 아니다 예측이 분분하지만, 이제는 시인이 진정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노벨문학상의 부담으로부터, 그를 통한 도시 마케팅으로부터, 찬양과 비난으로 그의 문학적 성취에 기대려는 무리로부터 초탈하려는 첫 시도가 광교산 시대의 정리이기를 바란다. 애초에 시인으로 광교에 왔듯이, 광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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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
[참성단]0대8, 0대8 지면기사
얄궂고 공교롭다 못해 괴이하고도 오싹하다. 평창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 지난 10일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0대8로 참패한데 이어 12일 스웨덴과의 경기에서도 똑같이 0대8로 무참히 졌다. 0대8에다가 또 0대8이라니! 귀신도 곡하다 말고 낄낄거릴 일 아닌가. 당초부터 단일팀은 언감생심 무리였다. 2030 비난도 컸다. 왜 팀워크가 강조되나. 그게 하루아침에 다져지는가. 일체감과 혼연일체라는 말도 괜히 생겼나. 큰 돈 들여 해외원정 훈련은 왜 또 하나. 팀 멤버 상호간의 신뢰감과 정신력이 다져지고 일체감으로 여물려면 숙성시간은 필수다. 그런데도 급조된 남북 단일팀이라니! 결과는 0대8, 또 0대8이었다. 미국과 캐나다 2중국적의 세라 머리(Murray·30) 여 감독에게 묻고 싶다. '머리' 속 상황이 어떠냐고. 좌뇌 우뇌 모두 하얘지지 않았나.0대8과 또 0대8에 문득 떠오르는 축구 명감독이 거스 히딩크다. 그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을 4강까지 끌어올려 영웅이 됐지만 한국 대표팀 감독 초장엔 부진했다. 그 전년 8월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0대5로 패했고 그에 앞서 대구 컨페더레이션(Confederations)의 프랑스 전에서도 0대5로 깨져 '오대영'이라는 별명이 붙지 않았던가. 아무리 명감독이라도 한국을 4강으로 끄집어 올리기 위해선 적어도 1년간의 혹독한 체력 단련과 팀워크가 필수였던 거다.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그건 맞선보는 날 바로 결혼을 해버린 꼴이다. 문재인 정권의 남북대화, 통일 열망이 조급하고도 환상적이다. 지난 9일부터 2박3일 방남한 북한 고위급 중에서도 김여정, 목과 허리가 고장 났는지 도무지 굽힐 줄을 모르고 빳빳한 그녀에 대한 환대는 지나칠 정도였고 비굴의 극치였다.11일 삼지연악단 서울 공연에서 조명균 통일부장관은 세 번이나 앙코르를 고함쳤고 남북 여가수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자 장내는 환호와 갈채로 떠나갈 듯했다. '이 나라 살리는' 게 통일이고 '이 겨레 살리는' 게 정녕 통일 맞을까. 그러기엔 남북 이국화(異國化)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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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북한의 이방카' 지면기사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이 김여정(Kim Yo-jong:킴요종)을 '북한의 이방카(Ivanka→트럼프 대통령 장녀)'라고 했다. 그녀의 인기와 영향이 토네이도 급이라는 거다. 작년 11월초 일본을 방문, 아베 정권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일본 방송들이 생중계를 했던 이방카와 비교한 거다. 그 신문은 또 김여정과 문재인 대통령의 악수를 '역사적'이라고 했고 그 역사적 장면이 네티즌 간에 바이러스처럼 퍼졌다(goes viral)고 썼다. 뉴욕타임스도 그녀의 방남(訪南)은 '매우 상징적인 여행(Highly Symbolic Trip)'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문 대통령은 그저께 밤 삼지연악단 서울공연 관람까지 4차례나 그녀와 나란히 앉았고 마지막 '다시 만나자'는 노래 합창에 관중이 기립박수와 환호를 보내자 벅찬 감격으로 누선(淚腺)은 터지기 직전이었다.그런데 북한이 왜 대화하자 교류하자며 서두르는 걸까. 미국과 유엔의 막판 제재에 몰린 김정은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지난 신년사에서) '민족'을 거론, '북남대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언급한 게 발단이었을까. 그게 아니다. 지난달 6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은 '남북관계 개선을 조급히 서두르는(하야루) 한국, 日米시선은 싸늘하다(히야야카)'고 보도했다. 남북대화를 서두르는 쪽은 북한이 아닌 한국이라는 거다. 이미 지난해 가을부터 여당 의원과 수장(首長→수장이라면?)들이 중국 등에서 북한 관계자와 접촉, 문 정권의 남북대화 의지를 거듭거듭 밝혔다는 것이고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지난달 3일 성명에서 '남조선 당국자'가 아닌 '문재인 대통령' 호칭을 처음 쓴 것도 이유가 있다고 했다. 북한이야 남조선을 미국의 '코피 작전' 방지 인질로 잡고 유엔제재 충격흡수 판으로 삼은 채 시간을 벌면서 핵 프로젝트를 완성하면 그만이다. 거기다가 DJ의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문 정권, '노무현의 그림자'라는 문재인 대통령이 막대한 선물을 챙겨 평양을 방문해 준다면야 금상첨화다. 문 정권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심저엔 무슨 신념이 깔려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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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청와대의 김여정 지면기사
'원짜이인'과 '진위정'이 누구일까. 문재인(文在寅) 대통령과 10일 청와대 오찬을 함께 한 북한특사 '金與正(김여정)' 중국 발음이다. 중국엔 金이 '금'이고 김씨는 없다. 발음도 '진'이다. 그래서 김여정이 '진위정'이고 문씨 文 발음도 '원'이다. 일본에선 또 키무요종, 미국에선 킴요종(Kim Yo-jong)인 31살 김여정이 2018 평창동계올림픽 최고 슈퍼스타로 떠올라 전 세계 이목이 쏠렸다. 김정은 전용기로 남하한 북한 막후 실세이자 실질적 2인자인 그녀를 청와대서 맞은 문재인 대통령은 시종일관 명도(明度) 드높은 표정이었고 눈물까지 흘리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논란 끝에 탄생된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스위스에 0대8로 무참히 깨져도 김여정과 함께 응원하는 문 대통령은 싱글벙글이었다.김여정 등 북한 최고위급 방문단 청와대 오찬도 극진한 예우였다. 북한은 그녀와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장, 최휘(崔輝) 체육지도위원장, 이선권(李善權) 조평통위원장 등 4명인데 남측은 임종석(任鐘晳) 청와대비서실장, 정의용(鄭義溶) 국가안보실장, 서훈(徐薰) 국정원장, 조명균(趙明均) 통일부장관 등 최고 실세가 4명이나 대통령을 배석했다. 중국 언론은 '문 대통령이 북한 고위급대표단을 회견했다(韓國總統文在寅會見 朝鮮高級別代表團)'고 보도했다. 김여정은 오빠의 친서를 전달했고 '빠른 시일 내 평양 방문'을 초청했다. 그래서 CCTV는 '남북 상호작용 왕래(朝韓互動往來)'로 '반도 국세가 새롭게 열린다(開啓 半島新局勢)'고 했다. 과연 그럴까.김여정. 지난 8일 북한 삼지연관현악단 강릉 공연에선 공교롭게도 김여정의 '여정'과 같은 남한 노래 '여정'을 불렀다. 2002년 SBS 드라마 '정'의 삽입곡이었던 '여정'은 여가수 왁스(Wax)의 노래다. 그런데 旅情 旅程 餘情 女情 등 어느 여정인지는 몰라도 '거리마다 불빛이 흐느끼듯 우는 밤/ 무던히도 참았던 외로움에 눈물이…'로 슬프다. 최진희의 노래 '여정'-'떨어진 꽃잎위에 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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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문화권력의 수난 지면기사
영원한 권력은 없다는 권력유한의 법칙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최근 문단의 두 원로가 참담하고 비루한 시비에 휘말려 대중의 서늘한 시선에 갇힌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 최영미 시인이 두달전 발표한 시 '괴물'의 주인공 'En(은)선생'은 최근 한 여검사가 불지른 한국판 미투(me too)운동으로 다시 대중 앞에 소환돼 곤욕을 치르고 있다. 작가 이외수는 지난해 여름 화천군수를 욕보였던 일이 곪고 곪아 이제는 화천시와의 법적 분쟁, 세속의 뻘밭으로 하강할 모양이다.En선생의 처지는 매우 고약하다. 작품속 이니셜과 현실속 실명 사이에서 적절한 대응이 곤란해졌다. 최영미는 'En선생'이라 했지만 세상은 두 글자 실명 '○○'을 지명한지 오래다. 인터넷에서도 실명 '○○'으로 검색해 'En선생' 콘텐츠를 찾는 게 손쉽다. 진보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민중의 편에서 반독재투쟁을 벌였던 노벨상 후보, 시인 '○○'은 이제 상습 성추행의 혐의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최영미는 작품속 'En선생'을 시인 '○○'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원로시인 '○○'은 이니셜에 갇혀버렸다. 최영미는 살아있는 문학권력을 영리하게 허물고 있는 중이다.화천군으로부터 이외수문학관이 있는 감성마을에서 퇴거 통보를 받은 이외수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법적으로 맞설 뜻을 밝혔다. 그동안 화천군을 위한 자신의 행적을 열거하면서, 자신에 대한 퇴거 결정과 관련한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 앞에서 화천군수를 향해 육두문자를 날렸을 때, 그는 자신의 문화권력을 과신해 남용한 것 아닌가 싶다. 작가 이외수를 아끼는 독자라면, 문단의 원로가 최후의 작품에 매진하는 대신 세속의 이해를 따지는 일에 떨어진 사실 자체가 안타까울 것이다. 혹독한 대가다.오늘 평창동계올림픽이 개막하지만 축제의 설렘 보다는, 올림픽 이후의 한반도 명운이 더욱 마음에 걸리는 요즘이다. 분절된 역사인식과 갈라진 이념을 화해시킬 권위가 사라진 시대다. 그래서 더욱 아쉬운 'En선생' 사태요 이외수 사건이다. 문화권력의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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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교복의 추억 지면기사
중학교에 진학해 교복을 입고 한동안 징징거렸다. 형들이 입어도 될 정도로 컸다. 여름에는 상의가 하얀 하복을 입었다. 역시나 몸집보다 터무니없이 큰 통에, 질질 끌렸다. 깡마른 체격에 큰 옷을 걸치니 영락없는 허수아비 꼴이었다. 어머니는 '잘만 어울린다'고 딴청이셨다.2학년이 되자 비로소 교복에 몸을 맞출 수 있었다. 중3 때는 동복이 작아져 바지 밑단을 뜯어 기장을 늘렸다. 상의는 늘릴 방법이 없어 몸이 불편할 정도로 꽉 끼었다. 키 큰 친구는 바지 기단이 정강이까지 올라왔고, 엉덩이 부분은 누더기가 됐다. 그래도 다들 동복 한 벌, 하복 한 벌로 3년을 버텼다.교복은 치명적 단점이 있다.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지 못한다. 요즘은 방한기능이 좋은 잠바를 덧입지만, 70년대 말에는 교복 위에 입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내복이나 털옷을 여러 겹 껴입는 바람에 교복 상의는 늘 빵빵했다. 고등학교 등굣길, 한겨울 칼바람 부는 동인천 고개를 넘는 건 고문(拷問)이었다. 그때마다 '언제나 이 고난을 면하나'하고 되뇌었다.1970년대 초, 시골 초등학교에는 가방을 못 사 보자기를 둘러메고 등교하는 학생이 여럿이었다. 6년 내내 보자기인 친구도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사복을 입고 등교하는 친구도 몇 있었다. 한두 달 지나 교복을 입고 등교했으나 사춘기 여드름 친구는 내내 부끄러워했다.올해 중학생에게 무상교복을 입히겠다는 경기도의 구상이 무산됐다. 예산은 섰으나 주문과 생산, 배급 등 시간이 부족해 내년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포퓰리즘'이란 비판이 있지만 어릴 적 생각을 해보면 고개가 끄떡여진다.누더기 교복에 보자기를 메고 학교에 간 경험이 있다면 '교복'은 가슴 짠한 기억의 조각일 수 있다. 지금은 웃을 수 있으나 그때는 서럽고 부끄러웠을 것이다.이제 형이나 선배들로부터 교복을 물려받는 일은 없어지게 됐다. 졸업식장에서 달걀에 밀가루 세례를 받는 것도 모자라 갈기갈기 찢긴 채 버려졌던 수난사도 함께 없어졌으면 한다. 교복이 뭔 죄가 있겠는가. /홍정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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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적폐 판사' 지면기사
막말 저질 판사도 꽤 있지만 '법대로 양심 따라' 판사도 드물지 않다. 그런데 속된 말로 '죽을 맛' 판사는 후자군(群)이다. 이른바 '빠'의 '까' 등쌀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자 '빠'들이 또 돌격대로 일떠선 거다. 판결을 내린 서울고법 정형식 판사에게 '삼성 장학생, 적폐 판사' 등 비난이 쇄도했고 서초동 서울고법 청사 앞에선 '이재용을 엄벌하라' '석방이 웬 말이냐' 등 '빠'들이 시위를 벌였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영장기각 때도, 김관진 전 청와대 안보실장 석방 때의 그 '빠'들이다. '빠'는 빠돌이 빠순이 '빠'로 무턱대고 감싸는, '까'는 근거 없이 덮어놓고 비난하는 부류다. 문 정권 '빠'는 '문빠'고. 이 따위 속어의 등장은 '사이언스'지에 실렸던 황우석 서울대 수의대 교수의 논문조작 파문 때인 2005년 그 무렵부터란다.그들이야말로 광기의 광신도지만 무서운 건 정권을 끼고 돌며 아부하는 '빠'들이 수시로 '까'로 돌변 표변하는 현상이고 알 수 없는 건 대체 그들은 뭘 하는 사람들인데 할일 없이 '까' 댓글이나 달아대고 법원 청사 앞 시위나 벌이느냐 그 점이다. 또 하나, 자본주의 상징인 대한민국 대표적인 기업들을 그토록 혐오하는 이유가 뭔가. '재벌 적폐→재벌 해체'는 현 정권의 상투어고 삼성을 '원흉'이라고 지칭한 사람이 청와대 정책실장인가 하면 재벌을 암세포에 비유한 인사가 중소벤처기업장관 아닌가. 원흉이라니? 삼성이 범죄 집단이나 흉악범 무리 수괴(首魁) 같다는 건가. 암세포라면 당장 제거수술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영국의 글로벌 브랜드 평가 업체 '브랜드 파이낸스'가 엊그제 글로벌 기업 순위를 매겼다. 삼성이 아마존, 애플, 구글에 이어 브랜드 가치 4위였다. 작년 판매고 239조5천800억, 법인세만도 전체 법인세의 10분의 1인 7조8천억원을 냈고 대한민국 GDP의 약 20%를 삼성이 창출한다. 트럼프가 '똥통국가'로 지칭한 아프리카 국가들도 K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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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북한 열병식과 평창 지면기사
인류의 신성한 평화 제전(祭典)인 올림픽에 최소한의 이해와 관심이 있다면, 그리고 동족에 대한 최저한의 연민의 정이 있다면 모레 건군절(建軍節) 열병식은 포기해야 옳다. 문재인 정부가 한미군사훈련을 올림픽 후로 연기한 것도 인류의 평화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지 않기 위함 아닌가. 그런데 한미군사훈련은 일시가 아닌 영구 중단하라는 북한이 올림픽 전날의 자기네 군사 퍼레이드만은 강행한다는 거다. 북한 건군절이 지난 40년간 4월 25일이었던 건 조선인민군의 모태라는 김일성 항일유격대 창설일이 기준이었고 올해 달력도 그 날이 빨간 날이다. 그랬는데 돌연 날짜를 변경한 건 원래의 건군일인 1948년 2월 8일로 되돌린 것이고 따라서 40주년이 아닌 70주년이라는 거다. 그렇다고 해도 왜 돌연 변경인가. 또한 기념식은 갖되 열병식은 생략할 수도 있다. 그게 동족이 주최하는 올림픽 축제에 대한 예의고 도리다.그런데도 북한은 오히려 '올림픽 날짜를 왜 그렇게 정했냐. 진작 바꿀 것이지'라고 빈정거렸다. 그것만 봐도 '역사에서 하차한 나라'지 정상적인 국가는 아니다. 올림픽 전날의 열병식도 어처구니 없지만 평창에 간 외신 기자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게 또 있다. 북한 선수들이 CNN, BBC, NHK 등 다수 방송의 인터뷰 요청에 하나같이 거부, 일언반구 응답이 없다는 거다. 취재 거부다. 2일 밤 강릉 쇼트트랙 경기장에서 넘어져 부상한 북한 최모 남자선수도 그랬고 기타 선수와 다른 종목 선수들도 외국 보도진 질문에 묵묵부답이었다는 거다. '본국의 입 조심 지령 때문인 것 같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올림픽 선수가 보도진 인터뷰 요청에 일절 거절하는 예는 올림픽사상 처음 본다'고….그래도 4일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스웨덴과의) 평가전 응원 열기는 뜨거웠고 '우리는 하나' 플래카드와 함성이 넘쳐났다. 삼지연(三池淵)관현악단 공연 티켓도 불티가 났다. 3일 마감된 530조(組) 1천60명 티켓에 약 290배인 15만6천조가 응모했다. 입장료 무료 때문만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