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참성단]복날의 보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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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복날의 보양식 지면기사

    한여름 무더위는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한다. 더위를 먹으면 무기력해지고 건강을 해치게 된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보양식이다.보양식의 대표 주자로는 삼계탕과 보신탕, 추어탕, 민물·바다장어, 민어탕, 민물 매운탕, 곰탕이 꼽힌다. 활력과 기운을 돋우는 고단백, 고열량 식품들이다.한의사들은 보양식도 체질에 따라 가려먹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소화기능이 약한 소음인은 삼계탕 추어탕 장어구이 부추 감자 복숭아가 어울린다. 소양인은 너무 맵거나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 한다. 감자탕 전복죽 오이 수박 굴이 좋다. 태음인에게는 설렁탕 미역국 콩국수 오미자 가지가 괜찮다. 과식하거나 폭식은 피해야 한다. 태양인은 기운이 맑고 담백한 음식이나 해물류가 좋다고 한다. 연포탕 조개탕 메밀국수 키위 등이다.삼복(三伏) 더위의 시작을 알리는 초복(初伏)에는 보양 음식을 먹어주는 게 우리네 풍습이다.초복인 12일, 점심 풍경은 다른 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삼계탕 집에는 줄이 늘어섰고, 장어탕과 추어탕 집에도 손님이 몰렸다. 보신탕 업소도 활기를 띠었지만, 예년에는 훨씬 못 미친다는 게 업주들 반응이다.보신 문화에 대한 비난과 혐오감이 커지면서 보신탕 업소들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보신탕 애호가들은 식당도 줄어드는 데다 함께 먹을 동지들 찾기가 힘든 지경이 됐다고 아쉬워한다.얼마 전 서울에서 보신탕 문화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개 도살과정에서의 잔혹 행위와 비위생적인 유통 과정이 폭로됐다. 보신탕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신 옹호론자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고유의 전통 식(食) 문화를 왜 야만적인 행위라며 혐오하느냐는 거다.반려견을 기르는 가정이 늘고 있다. 이들은 개가 식용 목적으로 키워지고 끔찍하게 도살되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보신탕 애호가들은 자신들의 문화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할 방법은 없을까. 괜한 고민에 머릿속이 복잡하다. 벌써 더위를 먹은 것일까. /홍정표 논설실장

  • [참성단]'북남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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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북남 관계' 지면기사

    북한이 남북 관계를 '북남 관계'라고 부르는 걸 들으면 귓구멍을 씻고 싶다. 남북통일도 북한에선 '북남통일'이다. 말에는 말의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다. 동서남북을 '북남서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의 순리와 질서를 뒤엎는 건 '말 쿠데타'다. 동서고금→금고서동, 인간관계→계관간인, 남녀노소→소노녀남, 부모형제→제형모부, 上中下→下中上, 고저장단→단장저고, 윤리도덕→덕도리윤이 돼서야 되겠는가. 악보다는 선이 우선인 선악도 악이 먼저(惡善)로 뒤집고? 그런데 인류는 오른손잡이가 단연 많건만 '우좌'가 아닌 '左右'고 '좌우를 살피라'고 하는 건 별나다. 거꾸로 된 중국어는 더욱 놀랍다. 서민→民庶, 언어→語言, 생산→産生, 취직→職就, 소개→介紹, 제한→限制, 전제→提前, 계산→算計, 폭풍→風暴, 침입→入侵, 누설→泄漏, 강연→演講, 요강→綱要, 기력→力氣, 분신→身焚 등 수도 없다. 어쨌거나 장차 자유민주주의 '남북'통일이냐 공산사회주의 '북남'통일이냐, 그게 문제다. 1861~65년 미국 남북전쟁은 남이 아닌 북이 이겼다. 노예제도 존속을 주장한 남부와 폐지를 외친 북부 간 전쟁에서 링컨이 이끈 북측이 이겼던 거다. 그런데 북부가 이긴 그 전쟁을 '북남전쟁'이 아닌 '남북전쟁'이라고 한 건 신기하고 South & North War도 아닌 Civil War로 불렀던 것도 의외다. 하긴 6·25 전쟁도 남북간 내전이었고 시민전쟁이었다. 남북 예멘도 웃긴다. 1967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예멘은 남북한과는 반대로 남예멘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체제를 취택했다. 그랬다가 1990년 남북 예멘은 통일됐지만 내전은 다시 일어났고 남예멘 지도자들이 체포되거나 타국 망명을 하면서 1994년 7월에야 civil war는 끝났다.만약 한반도 전쟁이 재발된다면 어떻게 될까.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문재인 정부의 뜻이야 갸륵하지만 그의 일방적인 '달빛 정책'이 영 미덥지 않다. 대화하자, 원조하겠다, 올림픽도 함께 하자는 등 열성과 열의가 뜨거워도 '너희와

  • [참성단]시진핑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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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시진핑의 표정 지면기사

    시진핑 중국 주석의 얼굴 표정이 연구감이다. 생래(生來)적 표정이 그런가, 아니면 억지로 표정 관리를 그렇게 하는 건가. 외국 정상을 만날 때의 그의 표정은 더욱 흥미롭고 제삼자가 공연히 민망할 정도다. 왜? 상대 국가 원수는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반가운 표정인 반면 시진핑의 표정은 영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뭔가 벌레 씹은 표정이거나 뭐가 그리도 못마땅한지 도무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 아닌가. '국가 원수라도 어디 같은 급 원수냐'는 내심 표출인가. 아무튼 웃지 않는 그의 앞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특히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는 극과 극이다. 허연 이를 드러낸 채 활짝 웃는 오바마가 공연히 안쓰러울 정도다. 상대가 다가올 때도 시진핑은 팔을 쭉 뻗어 간격을 유지한 채 기다리다가 얼른 악수를 한 뒤 사진기자단 쪽으로 얼굴을 홱 돌린다.표정, 안색의 존칭어가 '귀신 神'자 신색(神色)→귀신 색깔이다. 혹시 그 말이 걸려 표정 관리를 그렇게 하는 건 아닐까. '시진하다'는 말은 기운이 쫙 빠져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시진핑'은 '기운이 빠져 핑 돈다'는 뜻 같다. '최근(近)에야 평등 평화(平)를 습득(習)했다'는 習近平 글자는 괜찮지만 '습' 발음도 안 좋고 '시진(市塵)'은 거리의 티끌과 먼지다. 그런데 그의 우상화 운동이 본격화한 지는 꽤 오래다. '시진핑=최고 남편 감'이라는 찬양가가 유행이다. '시집을 가려거든 시 따다(大大→아버지, 큰아버지) 같은 남자를 만나라'는 거다. 이번 함부르크 G20정상회의(二十國集團領導人峰會)도 시진핑의 중국 힘이 주도했다는 거다. 폐막일(8일) 낮 CCTV 1시 뉴스는 장장 30분 간 중국의 힘이 이끈다(中國力推)는 G20 시진핑을 보도했다.'중국몽(中國夢)' 실현 운동이나 '일대일로(一帶一路)' 등을 들지 않더라도 그의 야심은 거창하다. 동북아 패권을 넘어 머지 않아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거다. G20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첫 대면한 그는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長江後浪推前

  • [참성단]北의 단말마 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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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北의 단말마 발악 지면기사

    국제사회를 향한 북한의 단말마(斷末魔) 발악이 목불인견이고 '이불인청(耳不忍聽)'이다. 차마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지난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호 발사에 성공한 김정은은 "미국 독립기념일 선물 치고는 쓸만했다. 앞으로도 자주 대소 선물보따리를 안겨주겠다"고 큰소리쳤고 지난 6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선 ICBM 발사 성공을 축하하는 대대적인 무도회와 불꽃놀이를 펼쳤다. 바로 그 날 미사일 발사의 주역인 장창하(張昌河) 국방과학원 원장은 기념사에서 "미국이 백기를 들고 우리 앞에 무릎을 꿇는 날까지 정의의 핵 보검(寶劍)을 강화하겠다"고 외쳤고 인민무력성 윤동현 차관은 "여차하면 미국 본토를 선제공격해 악(惡)의 총본산인 미 제국을 불바다로 만들어 비참한 종말을 고하게 하겠다"며 악을 썼다. 김정은 일당의 간덩이가 그토록 커진 이유가 무엇일까. 큰형(大哥:따꺼) 국가인 중국과 사촌형(堂兄:탕시웅) 국가인 러시아 등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인가. 지난 6일 함부르크 G20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을 만난 문재인 대통령이 대북 제재를 당부하자 그는 처음으로 中·朝(북·중) 혈맹관계를 언급했다. 그러니 알아서 적절히 처신하라는 거다. 1961년 김일성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체결한 게 '중·조협력상호원조조약'이었고 그 제2조가 '무력침공을 당할 경우 즉각 개입한다'는 거였다. 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는 7일 '1/4분기 중·조 간 무역이 증가한 건 예상 밖'이라고 보도했다. 북·중간이 그렇다. 사촌 국가 러시아는 어떤가. 엊그제 유엔안보리의 북한 ICBM 발사 비난성명안도 러시아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날 헤일리(Haley) 미국 유엔대사는 (미국의) 대북 군사력 행사까지 언급했지만 '한·미·일 vs 북·중·러' 냉전 구도는 더욱 확연해졌다. 그런데 일본 언론은 '日米韓 수뇌의 북조선 압력강화엔 일치했으나 문씨와는 온도 차'라고 보도했다. '죽음의 백조' B-1B 전폭기가 8일 우리 하늘에서 폭격훈련을 했고 알래스카 미군기지에선 북한 미사일 요격훈련을 한

  • [참성단]원더우먼과 거짓말 탐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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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원더우먼과 거짓말 탐지기 지면기사

    '원더우먼(Wonder Woman)'은 DC코믹스의 만화 캐릭터로 슈퍼맨, 배트맨과 더불어 DC코믹스의 '빅3'로 불린다. 처음 원더우먼이 등장한 때가 1941년인데, 7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원더우먼의 아성에 도전할 만한 히로인이 몇 되지 않는다. 만화의 인기와 더불어 1975년부터 1979년까지 ABC와 CBS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고, 최근엔 블록버스터 영화로 리메이크돼 세계적으로 큰 흥행수익을 거뒀다.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원더우먼의 창작자는 만화가나 극작가가 아닌 심리학자인 윌리엄 몰턴 마스턴(William Moulton Marston) 박사다. 마스턴 박사는 당시 코믹스 유해론을 부정하며 교육적 효과가 있음을 역설했는데, 이를 받아들인 코믹스 출판사 사장이 그를 자문 역할로 영입한다. 그는 당시 인기를 끌던 슈퍼맨, 배트맨처럼 폭력을 주먹으로 해결하는 방식이 아닌 '사랑'으로 풀어나가는 영웅을 구상하며 역시 심리학자 출신인 아내와 의논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괜찮네요. 근데 캐릭터는 여자로 해요"라고 조언을 했고, 마침내 원더우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한편 원더우먼은 황금 밧줄로 만들어진 '진실의 올가미'를 사용하는데, 이는 묶인 상대를 무력화시키고 진실만을 말하게 하며, 상대가 환각이나 기억상실, 세뇌 등 진실이 아닌 상태에 있을 때는 치유하는 효과까지 있다. 왜 이런 도구가 등장했을까? 그것은 바로 마스턴 박사가 혈압 측정을 통한 거짓말탐지기(polygraph)의 발명가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진실의 올가미는 자신이 개발한 거짓말탐지기의 은유적인 도구였던 셈이다. 역사적으로 거짓말탐지기는 1885년 이탈리아 생리학자 롬브르노가 맥박 변화를 읽는 방법으로 범인 검거에 성공한 것이 시초이며, 1920년 캘리포니아 경찰이 처음으로 범죄수사에 활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현재 전 세계에서 사용되는 거짓말 탐지기 중 절대 다수는 이스라엘 회사인 네메시스코가 생산하고 있다. 막대한 이윤이 걸려 있는 만큼 네메시스코 사는 거짓말 탐지기의 효용성에 대해 엄청

  • [참성단]복싱 영웅 파퀴아오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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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복싱 영웅 파퀴아오의 추락 지면기사

    프로복싱 선수 매니 파퀴아오(39·필리핀)는 세계 챔피언 8체급을 석권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1978년 민다나오 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12살 때 소년가장이 됐다. 13살 때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길거리에서 물건을 팔다 가출해 마닐라로 갔다. 믿는 구석은 주먹 뿐. 삼촌이 가르쳐준 복싱이 밑천이 됐다.1995년 프로에 데뷔, 1997년 플라이급 동양챔피언, 이듬해 세계 챔피언이 됐다. 체급을 올려 슈퍼페더급 챔피언이 돼 5차 방어전을 마치고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전설의 명 트레이너 프레디 로치를 만난 게 복싱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로치는 왼 주먹만 쓰는 그를 양손잡이로 키워준 인물이다.같은 해 6월 IBF 슈퍼밴텀급 챔피언이 돼 연승 행진을 했다. 이후 안토니오 베레라, 에릭 모랄레스,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 등 멕시코의 경·중량급 간판스타 3인방을 차례로 때려누이며 슈퍼스타로 우뚝 섰다. 2008년 미국의 영웅 오스카 델라 호야와의 슈퍼매치는 그를 필리핀의 국민 영웅 반열에 올려놓았다. 워낙 덩치 차이가 나 필리핀 국민들조차 시합을 막았지만 실컷 두들겨 맞은 호야를 보다 못한 심판은 8회에 TKO를 선언했다.파퀴아오가 지난 2일 무명의 제프 혼(29·호주)에게 충격의 판정패를 당했다. 3-0의 일방적 패배였지만 매니가 패배를 인정하기 힘든 시합 내용이었다. 심판들의 편파 판정에 홈 링의 이점도 작용했다. 매니는 즉각 이의를 제기하며 리턴매치를 강력 희망했다.두 선수의 재대결은 성사될 수 있지만 파퀴아오의 시대는 다시 오기 힘들 것이다. 혼은 이날 두어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파퀴아오의 전성기라면 길어야 5회 이전에 끝났을 경기였다. 세월은 가고 선수는 추억으로 남는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망가진 경우는 셀 수조차 없다. 아쉽지만 파퀴아오도 자신이 흘러간 과거가 됐음을 인정해야 한다. 링에 다시 서는 건 필리핀 국민들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지금 멈추는 건 고통이지만 영원한 국민 영웅으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홍정표 논설실장

  • [참성단]사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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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사회주의자 지면기사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후보가 국회 인사청문회 검증과정을 통과했다. 그는 야당 의원들로부터 "당신은 사회주의자야!"라는 직격탄을 맞았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과거 발언을 보면 '놀랍고 충격적'이라는 의례적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김상곤은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 동맹은 폐기해야 한다'고 했다. 노무현 때인 2005년에 그랬다. 그 해 국가보안법도 완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듬해엔 또 '한·미 FTA를 막지 못하면 우리 미래는 (얻다 제시하는지는 몰라도) 제시할 수 없다'고 했고 같은 노무현 시절인 2007년엔 '사회주의적 대안들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쯤 발언만 스쳐 들어도 그는 좌익 좌경 좌파, 종북 친북 정도를 넘어 사회주의자라는 청문회 질타가 맞는 거 아닌가. 그런 인물을 문재인 대통령은 총리 다음 고좌(高座)에 앉힌 거다.그의 문제발언에 노무현 그부터 연상됐다. 국정원이 2013년 6월 공개한 노무현 발언록을 보면 'NLL은 바꿔야 한다. 북한에 핵 얘기를 하라는 건 판 깨기를 바라는 사람들 주장이다. 자주 국가는 북측 공화국이고 우리는 친미 국가'라고 했다. 그 노무현 때인 2006년 12월 일본인 반 마코토(坂眞)의 저서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노무횬(현) 대통령의 광란 발언록'을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친북은 선, 친일은 악, 타도 USA, 북조선 사랑, 힘내라 북조선' 등. 중국을 방문한 그는 또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마오쩌둥(毛澤東)을 꼽는다'고 했다. 그런데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중국 인민일보는 문재인을 '盧武鉉之影(노무현의 그림자)'이라고 보도했다. 그렇다면 김상곤은? 바로 '문재인의 그림자(文在寅之影)' 아닐까. 유유상종(類類相從), 당동벌이(黨同伐異), 오비일색(烏飛一色)이거늘….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지난 5월 '대한언론'지에 '한국인은 이미 사회주의에 물들었다'고 썼다. '사회주의화를 낮은 단계~높은 단계로 본다면 한국의 사회주의는 이미 낮은

  • [참성단]폭우와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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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폭우와 장마 지면기사

    매년 폭우와 장마는 고금에 변화가 없나. 고려 때 문신(文臣) 학자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장마 묘사가 실감이 난다. '지루한 무더위 찌는 듯하더니/ 이제는 장맛비 그치지 않네/ 저자(시장)가 막히니 들 늙은이 걱정이 늘어가고/ 강물이 불으니 고기잡이배 어지럽구나/ 모기와 바구미는 창문과 책상에 깃들이고/ 개구리 청개구리 부엌에 들어오네…'라고 적었지만 그 정도 폭우와 장마야 별 거 아니다. '칠년대한(七年大旱)에 구년지수(九年之水)'라고 했다. 7년 가뭄에 9년 장마다. 그래도 인류는 살아남고 '노아의 홍수'가 다시 와도 방주(方舟)로 탈출하면 그만이다. 창세기 6~8장 등 구약과 신약 여러 곳에 언급된 걸 보면 노아의 홍수는 실제로 있었던 것 같다. 죄 많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150일간 비가 그치지 않았고 하나님이 설계, 노아가 만든 방주로 소수만이 탈출했다는 거다.'6월 장마에 돌도 큰다'고 했다. 비를 계속 맞으면 돌조차 자란다니, 얼마나 시적(詩的)인 말인가. '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라는 말도 있다. 입 속으로만 웅얼웅얼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그렇다는 거지만 도깨비 여울 건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했나. 영어엔 '장마'라는 말이 따로 없지만 한·중·일 3국엔 장마 어휘가 다수다. 우리말엔 장맛비, 장림(長霖), 임우(霖雨), 적우(積雨), 구우(久雨), 황매우(黃梅雨) 등이 있고 霖자는 숲처럼 내리는 비의 상형(象形) 글자다. 중국엔 매우(梅雨:메이위), 음우(陰雨, 淫雨), 연음우(連陰雨) 등 다수고 '좌전(左傳)'엔 매림(梅霖), 임우(霖雨), 임림(霖霖), 임력(霖瀝)이라는 말도 있다. 일본엔 장우(長雨:나가아메), 매우(梅雨:쓰유 또는 바이우) 외에도 음력 5월에 내리는 장맛비라고 해서 '사미다레(五月雨)'라는 말도 있다. 梅雨는 매실이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라는 뜻이다.전국에 폭우가 내렸지만 '장마전선이 상륙했다'는 말도 흥미롭다. 戰線이 아닌 '前線'이다. 싸우러 오는 장마가 아니라 연례 행차로 지나가는 前線이지

  • [참성단]백악관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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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백악관 데뷔 지면기사

    미국 백악관의 '악(堊)'자는 '백토(白土)악'자다. '白土=白堊'이고 백토로 벽과 기둥을 바른 하얀 집이 백악관이지만 중국에선 '白堊館'이라 부르지 않는다. 왜? 백악관 館자가 '객사(客舍) 관'자고 손님을 접대, 묵게 하는 집이 館자 돌림 건물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 격이 여관(旅館)이다. 따라서 '백악관'은 '하얀 여관 같은 건물'이라는 뜻이다. 미국에서 알면 기분 잡칠 게다. 그래서 중국에선 '白堊館'이 아닌 '바이꿍(白宮)'이라 부른다. '흰 대궐'이라는 뜻이다. 그 점 트럼프가 알면 시진핑에게 고맙다고 절을 할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도 '백악관'이라고 말하지 않고 쓰지도 않는다. 백악관이 아닌 '백아관(白亞館:하쿠아칸)'이다. 이유는 堊자가 어렵다고 해서 상용한자에서 제외하는 바람에 비슷한 대용 한자로 亞자를 취택한 까닭이다. 백악기(白堊紀)도 일본에선 '白亞紀'다.White House도 white royal palace(하얀 대궐)의 겸손한 표현이지만 전 세계 대통령이 그 워싱턴 '하얀 집'에 데뷔(방문)하기를 갈망한다. 우리 대통령으로선 6·25 휴전협정 다음해인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첫 백악관 데뷔, 아이젠하워를 만났고 최근엔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5월, MB가 2008년 4월 부시를 만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5월 오바마와 백악관 정상회담을 했고…. 백악관의 역사는 깊고 그만큼 지은 지도 오래다. 1790년 미 연방의회가 미국의 수도를 워싱턴으로 정한 후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프랑스의 도시계획가 피에르 랑팡과 함께 현재의 위치에 터를 잡았고 아일랜드 건축가 제임스 호번(Hoban)이 설계해 1790년 그 해 10월 착공, 1800년 완공했다. 그래서 귀신 출몰설이 분분했다. 1841년 폐렴으로 백악관에서 숨진 9대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 귀신이 나왔다는 등.문재인 대통령의 백악관 데뷔는 대체로 성공적이라는 평이다. '대북 인내의 한계가 지났다'는 트럼프와는 달리 대화를 강조한 온도 차는 컸지만…. 일본

  • [참성단]상처 입은 용(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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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상처 입은 용(龍) 지면기사

    작곡가 윤이상은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더 유명한 뮤지션이다. 그런데 사실 그가 작곡한 음악은 상당수가 난해한 편이다. 어떤 것은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배경음악처럼 기괴하기까지 하고 오죽하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연주를 거부하기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악기에 노장사상과 불교적인 요소를 도입한 그의 곡은 세계 유수의 음악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는 10여년간 베를린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윤이상은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인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가졌을 당시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그 용이 상처를 입었으며, 산 위의 구름 속으로 날긴 했지만 하늘까지 높이 차고 오르지는 못했다고 했다. 윤이상이 태어난 해에는 공교롭게도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이나 시인 윤동주(1917~1945)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이들의 삶은 너무나도 달랐다. 특히 박정희와 윤이상은 너무나도 악연(惡緣)이었다.일본 오사카 음대 재학 시절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억압받는 현장을 보고 사회·정치적 의식을 갖게 된 윤이상은 1944년에는 한국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에 체포돼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북한으로 간 친구도 만나고 평소에 좋아하던 '강서고분도'를 보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 일로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간첩혐의가 씌워져 무기징역형으로 수감된뒤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른바 동백림(東伯林)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음악성을 인정한 200여 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내 그는 대통령 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윤이상의 작품에 대한 연주 금지는 물론 입국금지까지 내려 결국 그는 죽을 때까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마치 어머니의 태몽처럼 '상처 입은 용'으로 살다가 인생을 마감한 것이다.시대와의 불화 때문에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외국에서 발휘할 수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