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참성단] '화담숲' 암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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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 '화담숲' 암표 지면기사

    '화담(和談) 숲'은 광주와 용인 땅을 가르는 백마산 발리봉(481m) 기슭에 자리한다. 여의도 절반 크기인 135만5천372㎡ 면적에 4천 종 수목이 식생한다. 소나무원, 이끼원, 진달래원 등 17개 테마원과 5.2㎞ 탐방로를 갖췄다. 본래는 '곤지암 수목원'이었으나 숲을 가꾸고 다듬은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2018년 작고)의 호를 따 개칭했다.탐방로 입구에 들어서면 모노레일 탑승구가 보인다. 몸이 불편한 노인과 약자에겐 부담스런 가파른 경사다. 맑은 샘이 흐르는 소류지를 두고 이끼원과 푸른 소나무원이 내방객을 반긴다. 일본의 정원 풍경을 옮겨온 듯 절제된 미(美)의 공간이다. 중턱을 지나 오르면 자작나무 참나무 무리가 하늘을 가린다. 손을 타지 않은 야생 그대로의 생태계가 건강하다. 낙과한 도토리가 길을 막아 피해 가기 쉽지 않다.숲속엔 '물 주는 노인'이 있었다. 새와 나무를 끔찍이 아낀 산(山) 주인은 머슴처럼 일했고, 직원들도 알아채지 못했다. 허리춤에 전기 가위 주머니를 찬 할아버지가 물을 건네는데, 풍객(風客)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작고해서도 숲을 떠나지 않았다. 구 회장 유해는 화장돼 수목장으로 안장됐다.화담숲 입장권이 암거래된다고 한다. 이달 13일까지 이어지는 가을 단풍축제 기간 입장객 수를 일정 범위로 한정하면서다. 주말 2인 기준 2만원인데, 적게는 3만원에서 많게는 4만6천원까지 웃돈이 붙어 인터넷 중고사이트를 통해 거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리 구매 아르바이트생이 가격을 흥정하기도 한다. 안전 확보와 환경 보호를 위해 방문객을 제한한데 따른 과수요 현상이다.야구장이나 공연장에서 암표를 거래하다 적발되면 벌금이나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하지만 온라인 암표 거래는 마땅한 처벌 규정이 없다. 거래가 성사되면 QR코드로 넘겨받는 단순한 방법이기에 실행하기가 손쉽다. 숲 운영진도 암거래를 막기 위해 불이익을 주겠다고 공지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다고 한다.화담은 숲에서 영리를 구하지 않았다. 성수기에 입장객을 막고, 겨울철 문을 잠그는 이유다. 화담의 생은 담백하

  • [참성단] 여류 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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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 여류 바둑 지면기사

    바둑은 언제부터 두어졌을까. 전설의 군주인 요순이 어리석은 아들들을 깨우쳐주기 위해 바둑을 만들었다는 '요순기원설'이 가장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여러 고문헌과 기록들에도 불구하고 바둑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명확하고 확정적인 정설을 찾기 힘들다. 배태일 박사 등의 연구를 보면 1954년 중국 허베이성에서 182년경의 후한시대 고분에서 17줄 바둑판이 출토되었고, 내몽골에서 요나라 시대(916~1125)의 무덤과 당나라 시대의 비단 그림에서 13줄 바둑판이 발견됐다고 한다. 19줄바둑은 당나라 때 크게 성행했다고 하는데, 19줄바둑은 훨씬 이전부터 두어져왔다. 1959년 고고학자들이 허난현 안양 부근에서 수나라 개황 15년(서기 595년) 장성(張盛)의 묘에서 사기로 만들어진 19줄 정방형 바둑판을 발굴했다. 설화와 기록을 종횡무진하는 바둑의 역사이다.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승려 도림이 백제 개로왕의 판단을 흐려놓기 위해 바둑을 두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바둑을 즐겼고, 여성의 바둑에 대한 기록도 있다. 고려 시대 기생 진주와 동인홍이 바둑을 두었다고 전해지며, 허난설헌의 '궁가(宮訶)'와 '유선가(遊仙訶)' 등의 시편들에서 바둑이 등장한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류바둑대회는 1963년 4월 13일 조선일보사에서 주최한 '여류왕위전'이다. 이때 당시 신광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영숙이 여류 왕위에 올랐다. 또 1963년 을조 여류왕위전에서 우승한 윤희율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으로 바둑유학을 떠났다. 그러다가 1975년 제1회 여류입단대회가 열려 조영숙과 윤희율이 최초의 여류프로기사가 됐다.지난 4일 2022년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4강전에서 최정 9단이 한국프로기사 랭킹 2위인 변상일 9단을 불계승으로 누르고 결승전에 올랐다. 최 9단의 세계바둑대회 결승전 진출은 바둑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내친김에 우승까지 차지해서 바둑의 새 역사를 써주기 바란다. 최9단의 결승 진출은 어떤 분야이든 이제 성별이 특별한 의미가 없음을 잘

  • [참성단] 봉화 광산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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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 봉화 광산의 기적 지면기사

    장마철 먹구름 짙은 하늘도 아주 잠시 한 줄기 햇빛을 허락할 때가 있다. 지난달 26일 봉화 아연광산 막장에 갇혔던 광부 2명이 4일 밤 극적으로, 그것도 제발로 걸어 생환했다. 그들이 빛 한줄기 없는 갱도에 갇혀 있는 동안 이태원 환한 밤 골목에선 156명의 청년들이 숨졌다. 대한민국 국가 애도기간에 북한은 사정없이 미사일을 쏘아댔다. 초대형 뉴스에 묻혔던 사람들이다. 간간이 이어진 구조 상황도 절망적이었다. 망각과 절망을 뚫고 그들이 지상에 발을 디딘 그날 밤은 대낮처럼 환했다.2010년 칠레 대지진으로 구리 광산이 붕괴되면서 33명의 광부들이 갇혔다. 광부들이 모여있던 700m 지하의 갱도 대피공간에 구조대의 드릴이 17일 만에 숨통을 열었다. 광부들은 '전원 생존' 쪽지를 올려보냈고, 이들을 구조하기 위한 국제 공조가 작동했다. 교황은 묵주를, 미 항공우주국(NASA)은 특수 식량을, 스티브잡스는 아이팟을 내려보냈다. 33명이 미국 기술자들이 뚫은 구조 터널로 69일 만에 지상에 도착하자 전 세계가 환호했다.칠레 때처럼 봉화에서도 본능적인 생존 의지가 광부들을 살렸다. 반드시 살아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헤드랜턴을 의지해 직접 곡괭이로 탈출 갱도를 팠고, 발파도 시도했단다. 가지고 있던 커피믹스 30봉을 나누어 먹으며 체력을 유지했고, 비닐하우스를 치고 모닥불을 피워 체온을 유지했다. 노련한 광부 박정하씨는 광부 이력 며칠에 불과한 보조작업자와 체온을 나누며 구조대를 기다렸다.인체는 신비하다. 극단적인 위기 속에서도 생존을 향한 본능이 작동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삼풍백화점 붕괴 현장에 갇혔던 박승현씨는 음식은 커녕 물도 없이 견디다 17일만에 구조됐다. 봉화 광부들을 살린 것도 커피믹스가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힌 의지와 지혜였다.무너진 광산 지하에서 두 광부가 생존 의지를 불태울 때, 지상의 번화가에선 156명의 희생자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무너진 치안 조직에 압사당했다. 위기는 기적을 낳았고, 고장난 제도는 비극을 불렀다. 이렇듯 얇디 얇은 삶과 죽음

  • [참성단] '연경(燕京)의 우정'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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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 '연경(燕京)의 우정' 특별전 지면기사

    지전설(地轉說) 주장한 덕보(德保) 홍대용(1731~1783)은 지적(知的) 호기심이 왕성했다. 30대 중반에 연행사(燕行使) 서장관으로 임명된 숙부를 따라 청나라 북경에 가는 호기를 잡았다. 두 달을 머물며 선진 문명·문화를 체득했다. 우연한 기회에 유명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식견을 넓히고 만리장성(萬里長城)과도 같은 우애를 쌓았다.덕보는 항저우 출신인 엄성(嚴誠)·반정균·육비와 유독 가까웠다. 셋은 문장과 예술에 두루 능한 대학자들이었다. 그런데도 모두가 덕보를 추앙해 대유(大儒)로 여겼다고 한다. 이들과 더불어 필담한 내용이 누만언(累萬言)에 전한다. 덕보가 귀국하는 날 서로 눈물을 흘리며 "한번 이별로 그만이구려, 저승에서 만나도 부끄럼이 없이 살기를 맹세한다"며 발길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홍대용의 절친 연암(燕岩, 박지원)은 덕보와 엄성의 각별한 우정을 부러워했다. 동갑내기 엄성과 뜻이 잘 맞았던 덕보는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은 때야 따라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에 엄성이 깨우침을 얻어 과거를 접고 남쪽으로 가 칩거했으나 수년 뒤 숨졌다. 부고를 받은 덕보가 제문을 쓰고 제향을 보냈는데, 마침 이것이 고인의 집에 도착한 날이 2년 차 제삿날이었다. 모인 이들이 영감(靈感)이 통했다고 경탄했다 한다. 9년 뒤 엄성이 남긴 유고가 덕보의 손에 쥐어졌는데, 직접 그린 초상화였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홍대용의 유일한 초상화다. 일하제금집(日下題襟集)에 덕보와 청의 석학들이 나눈 필담과 편지들이 전한다.남양주 실학박물관이 '연경(燕京)의 우정'이란 특별전을 연다. 18~19세기 조선과 중국, 두 나라 지식인들의 소통과 우정을 새김질한다. 홍대용 초상화는 물론 실학자 박제가와 화가 나빙(羅聘)이 주고받은 편지, 선물, 서화를 볼 수 있다. 추사 선생과 당대 최고 대학자인 완원(阮元), 화가 주학년(朱鶴年)의 정(情)은 또 어떠했던가.특별전은 한·중국 수교 30주년을 기념한다. 근자에 양국관계가 썩 유쾌하지 않기에 울림이 더 클지 모른다. 조상들 교유엔 명리(名利)가 끼어들지 않았다.

  • [참성단] 만원사례(滿員謝禮)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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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 만원사례(滿員謝禮) 유감 지면기사

    70, 80년대 추석이나 설 때면 대도시 극장엔 명절 대목에 맞춰 개봉한 영화를 관람하는 인파로 장사진이 펼쳐졌다. 당연히 일찌감치 줄서지 않으면 표를 구할 수 없었고, 표를 다 판 극장은 '만원사례(滿員謝禮)'를 내걸고 매표소를 닫았다. 정작 객석을 꽉 채운 손님들이 아니라 매표에 실패해 낙담한 사람들 앞에 내걸렸으니, 감사보다는 사과에 가까웠던 것이 '만원사례'의 아이러니다.분단문학의 거장 이호철이 동아일보에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를 연재한 때가 1966년이다. 이 시절에 태어난 세대들은 어딜가나 '만원사례'인 과밀시대를 관통했다. 출퇴근, 통학시간대 만원버스들은 문도 닫지 못한 채 어린 차장들을 매달고 질주했다. 막차가 끊기고 통행금지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은 브리사, 포니 택시에 예닐곱명이 아무렇지 않게 합승했다. 어린이날이면 동물원이었던 창경원이 돗자리 깔 자리도 없이 붐볐고,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했다. 통금이 풀린 새해 전야엔 타종행사가 열리는 보신각 주변을 중심으로 사람 파도를 타고 종로로 명동으로 휩쓸려갔다.과밀시대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든든한 배경이었다. 값싼 노동력으로 산업을 일으켰고, 가난의 대물림을 끊으려는 전쟁세대는 베이비붐 세대의 교육에 헌신했다. 만원버스를 타고, 콩나물 교실에서 공부했던 베이비붐세대는 부모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산업현장으로 향했던 인파가 독재정권에 맞서 해일처럼 일어나 민주화도 이루어냈다.선진국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전쟁세대와 전후 베이비붐세대의 과밀의 피로를 온몸으로 감수했다. 그리고 이제 조금 인간적인 공간을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선진국으로 만들어 놓은 대한민국 길거리에서 생때같은 자식들이 떼죽음을 당했다.과밀시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우리 주변의 만원(滿員) 위험 구역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수도권과 서울을 오가는 출퇴근 광역버스와 전철이 대표적이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는 지난해 김포 경전철을 체험 승차했다가 혼쭐이 났다. 하지만 해결책은 여전히 묘연하다. 부모 세대가 시

  • [노트북] 죽음의 경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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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죽음의 경중 지면기사

    "아빠, 내일 고기 많이 잡아오면 친구들 데리고 와도 돼?"일흔이 넘은 이재원씨는 23년 전 아들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태안으로 낚시하러 간다니 아들이 했던 말이다. 이씨가 아들에게 "너희 먹일 고기 가득 낚아오겠다"고 약속한 뒤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니 TV에는 동인천에서 큰 사고가 났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희생자 명단 속에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그의 아들 이현민군은 1999년 10월30일 청소년 57명이 숨진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희생자 중 한 명이다. 이씨는 병원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가 부평의 한 병원 안치실에서 아들을 확인했다. 인현동 참사 유족은 아들과 딸의 죽음 앞에 세상이 무너졌다. 이들의 가슴을 더 세게 후벼 판 것은 아이들에게 쏟아진 비난이었다. 사람들은 미성년자였던 희생자들이 호프집에서 숨졌다며 비행 청소년이라고 매도했다. 유족들은 자식을 잘 키우지 못한 부모로 손가락질 받았다."학생들이 비행을 저지르면 다 그런 사고에 엮이는 거야. 그러니 학교 지도사항을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인현동 참사를 다룬 김금희 작가 소설 '경애의 마음' 한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사회는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을 비난했다. "돈 내고 가라"며 학생들이 대피할 출입문을 닫아버린 업주의 잘못과 불법 영업을 눈감아줬던 공무원들의 비리는 뒷전이었다.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15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지 수일이 지났다. 희생자 대부분이 20대들이다. 이번 사고를 "놀러 가서 죽은 것"이라고 치부한 혐오와 낙인은 23년 전 인현동 참사와 똑같다고 할 정도로 닮았다. 축제를 즐기러 갔다는 이유로 이들의 죽음은 슬퍼할 가치가 없는 걸까. 우리는 인현동 참사 당시 죽음의 경중을 재면서 정작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구조적인 논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번엔 부디 이 같은 전철을 답습하지 않길 바란다. /박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phj@kyeongin.com박현주 인천본사 정치부 기자

  • [참성단]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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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 단풍 지면기사

    만당(晩唐)의 대표시인 두목지(803~852)는 풍류남아요, 가을의 시인이다. 가을 단풍이 온 산하대지를 화려하게 물들일 때면 늘 생각나는 시인이 바로 두목(杜牧), 두목지다. 당나라 말기의 시인 이상은(李商隱)과 두목을 일컬어 이두(李杜)라 하는데, 두목은 칠언절구에 특히 능했다. "수레를 멈추고 앉아 늦가을 단풍을 즐기노라니, 단풍잎이 2월의 꽃보다 더 붉구나(停車坐愛楓林晩 霜葉紅於二月花)"라는 저 유명한 두 구절은 가을이 오면 항상 호명, 인유되는 그의 대표작 '산행(山行)'이다.두목은 천재적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풍채도 좋고 미남자였던 얼짱 시인으로 알려졌는데 화려한 그의 시풍(詩風)만큼이나 연애편력도 대단했다 전해진다. 특히 두목지가 수레를 타고 기루(妓樓)가 밀집한 거리를 지날 때면 기생들이 그가 타고 가는 수레에 귤을 던져주었는데, 기생들이 던져준 귤이 늘 수레에 가득 찼다고 하여 그를 '귤만거(橘滿車)'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의 고전 '춘향전'에도 이 도령을 묘사하는 대목에 "풍채는 두목지라"하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두목지는 인기 만점의 시인이었다.이번 주부터 주말까지 단풍이 절정에 이른다. 단풍이 빠르게 남하하여 이제 계룡산·내장산·무등산·가야산 등이 절정에 이르렀고 유명 국립공원과 산책로에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다. 이렇게 계절은 어김이 없어 울긋불긋한 단풍들로 아름답게 세상을 물들이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단풍을 즐길 여유를 주지 않는다.핼러윈 참사로 세상이 온통 슬픔에 잠겨있는 상황에서도 가계대출 금리는 2012년 7월 5.20%를 기록한 이후 현재 5.15%로 10년 2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랐으며, 주택담보대출도 전달보다 0.44%나 올랐다. 이 와중에 이상민 행안부장관의 책임회피성 해명으로 국민들의 얼굴에 붉게 단풍이 든다. 또 여당은 대장동을, 야당은 김건희 여사 논문표절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고금리에, 물가고에, 정쟁에 국민들은 지치다 못해 이제 짜증이 난다. 애도기간에는 정쟁을 삼가고, 단풍구경도 차분

  • [참성단] 화성행궁 '우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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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 화성행궁 '우화관' 지면기사

    조선왕조의 쇠락을 틈타 한반도를 강탈한 일제는 한민족의 역사를 지우려 했다. 일제강점기, 문화·역사 유적은 야만적 침탈의 표적이었다. 정조가 극진한 효심으로 지은 화성행궁(華城行宮)도 화를 피하지 못했다. 궁내 주요 건물을 초토화하고 근대식 건물을 세워 학교와 관공서, 의료시설 용도로 사용했다. 남창초교와 쌍벽인 신풍초교는 궁내 객사(客捨) 자리에 지어졌다.1980년대 후반, 수원문화원을 중심으로 '화성행궁 복원 추진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기 위한 첫 단추를 뀄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수원시는 복원사업을 본격화 했다. 문화원장을 지낸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 앞장서 지휘했다. 시는 행궁터 건물과 토지를 사들여 철거한 뒤 본래의 건물 양식으로 재건했다. '화성성역의궤'를 토대로 2003년 봉수당, 득중정, 궁녀와 군인 숙소 등 482칸의 복원이 완료됐다. 현재는 2단계 복원사업이 진행 중으로, 내년 하반기 완공될 전망이다.지난주 화성행궁 터에서 우화관(于華館) 중건(重建) 상량식이 거행됐다. 광교신도시로 옮겨간 신풍초교 옛 자리다. 길놀이 풍물공연으로 흥이 오르고, 전례에 따라 고유제(告由祭)와 상량문 봉안 순으로 진행됐다. 건물주로부터 상량문을 전달받은 도편수는 건물의 최상부 부재인 마룻대 홈에 상량문을 봉안했다.우화관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殿)'이라는 글자를 새긴 나무패를 모신 객사로, 1789년 궁내에 가장 먼저 건립된 건물이다. 처음엔 지역 명칭을 따 '팔달관(八達官)'이라 불렸으나 1795년 을묘년 행차 때 정조의 명에 따라 우화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서울로 들어가는 관청'이란 의미로, 수원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부유하고 즐겁기를 바라는 정조의 따뜻한 마음이 담겼다는 해석이다.2단계 복원사업이 끝나면 화성행궁은 온전한 옛 모습을 되찾게 된다. 정조에 이어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이 융건릉에 참배하고 들러 묵은 역사를 품었다. 조선 행궁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답다. 조선 후기 정치·군사·사회·문화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 [참성단] 이태원 핼러윈 참사
    참성단

    [참성단] 이태원 핼러윈 참사 지면기사

    메카 순례는 이슬람교도에게 필생의 염원이다. 해마다 메카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수백만 명의 성지 순례자들로 인산인해가 된다. 이 때문에 성지 순례가 대형 압사 참사로 악몽이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1990년엔 메카로 향하는 터널에 인파가 몰리면서 1천426명이 압사했다. 1994년에 270명, 2005년에도 345명이 인파에 깔려 죽었다. 2015년엔 돌기둥에 마귀를 물리치려 돌팔매질에 나선 순례자들 700여명이 압사했다. 메카는 20, 21세기 최악의 압사 발생 장소라는 오명을 썼다.우리나라에선 1960년 서울역 압사 사건이 최악이었다. 설날을 이틀 앞둔 1월 26일 서둘러 열차 승강장으로 돌진하던 귀성객들이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31명이 숨졌다. 1965년엔 광주 전국체전에서 경기장 입장객 14명이 압사하는 사건도 있었다. 뉴키즈 온 더 블록 내한공연 때 여고생 1명이 사망한 것을 비롯해 국내 방송사 공개방송 때도 압사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최근 기억은 가물가물해 대형 압사사건은 해외토픽으로나 접하는 후진국형 참사로 여겼던 참이다.전국민이 29일 발생한 이태원 압사 참사에 말을 잊었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던 인파가 내리막 골목에서 무너지는 바람에 150여명이 숨졌다. 온라인에 올라온 현장 영상들은 아비규환으로 가득했다. 이태원은 남산 산자락에 위치해 가파른 골목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수만명이 한꺼번에 몰리면 골목에 갇혀 꼼짝할 수 없다. 한 두명이 중심을 잃어 둑이 터지면 인간 쓰나미가 발생하는 지형적 구조다.언제부터인가 이태원이 국내 핼러윈 축제의 성지가 됐다. 인파 사고를 우려하는 언론 보도도 이어졌다. 코로나19로 지난해 썰렁했던 이태원에 거리두기 해제 후 첫 핼러윈을 맞아 보복인파가 모여들자 사고가 터졌다. 인파에 막힌 소방과 경찰의 현장 진입이 늦어지면서 현장의 시민들이 심정지 환자들을 직접 심폐소생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희생의 규모가 너무 커 최악의 핼러윈 참사로 국제적인 사건이 됐다.코로나 예방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수적이듯, 사람 사이에도 안전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태원

  • [참성단] 전랑외교관(戰狼外交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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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성단] 전랑외교관(戰狼外交官) 지면기사

    전랑외교는 중국 외교관들의 거친 언행과 공격적인 스타일을 일컫는다. 위키백과는 'Wolf warrior diplomacy'라 칭한다. 실베스터 스탤론의 '람보 시리즈' 스타일을 모방한 중국 액션 영화 '특수부대 전랑'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논란을 피하고 말을 아꼈던 외교 관례와 달리 자국에 대한 비판을 비난하고 폭언·폭행을 서슴지 않는 등 오만하고 거칠다. 코로나 19 창궐 때 자국이 발원지가 아니라는 점을 각인시키려 강화된 전랑외교가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 확정에 즈음해 절정을 맞았다는 분석이다.이달 중순 영국 맨체스터 주재 중국 영사관에서 반중(反中)시위를 하던 30대가 영내로 끌려가 집단폭행을 당했다. 영사관 직원에 총영사까지 가해했다는 주장이 나와 양국 외교 문제로 번졌다. 피해자는 인터뷰에서 "영사관으로 끌려간 것이며, 경찰이 구하지 않았으면 죽었을지 모른다"고 했다. 영국 외무장관은 "시위대는 영국 영토에 있었고, 시위는 평화롭고 합법적이었다"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중국 정부는 영국이 총영사관 보호에 소홀했다며 적반하장이다. 서방국가들은 상대국을 불편하게 하는 전랑외교의 전형이란 비판을 한다.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수교 30주년을 맞은 한중 관계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지난 26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다. 그는 미국이 자신들의 가치를 앞세워 다른 나라를 압박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한중 양국의 상호 호감도가 높지 않아 매우 안타깝고 걱정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 일부 언론이 중국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보도를 한 점이 현재 양국 국민감정의 불화를 초래한 주요한 원인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중 관계가 나빠진 데는 국내 언론의 책임이 크다는 시각이다. 언론을 정부 선전·선동 수단으로 보는 사회주의의 한심한 언론관을 여과 없이 드러낸 거다.북한에서 유학한 싱하이밍은 우리말이 유창한 지한파이나 친한파는 아니다. 대사로 와 신임장도 받기 전 코로나 방역을 위해 후베이(湖北) 성 방문자를 입국 금지한 우리 정부를 비판하는 등 행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