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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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식 칼럼]오래된 새로운 비즈모델 '구독경제' 지면기사
넷플릭스 선도… 애플도 가세 형국소유 아니라 접속하는 형태로 변화가정식등 많은 서비스 새롭게 부상한국, 5G 상용화 '최적 인프라' 갖춰기회 살리는 지혜 모아야 할 때다지난 3월 25일 애플사는 동영상스트리밍 서비스인 'TV+'와 무제한으로 잡지와 신문을 구독하는 'NEW+'를 매월 9.99달러에 제공하는 서비스를 발표하였다. 넷플릭스가 선도하고 있는 구독경제에 애플도 가세하는 형국이다. 구독경제는 매월 도서나 음반을 받거나 또는 신문이나 잡지의 구독 등으로 익숙한 형태이며 현재에도 인터넷 사용+IPTV+전화, 음악스트리밍 등을 월정액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미 2000년 인터넷의 시대가 열리면서 '접속의 시대 The age of access'라는 저서를 통하여 앞으로는 소유에서 접속하여 사용하고 체험하는 시대로 바뀔 것을 예측하였다. 스마트 폰의 보급과 5G 시대가 열리면서 이제 접속에 들어가는 한계비용이 0에 가깝게 되다 보니 제품이나 서비스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접속하고 사용하는 형태로 급속히 바뀌고 있다. 최근 현대 자동차에서는 월정액을 내면 다양한 차량을 마음대로 바꾸어 타는 서비스를 시험하고 있으며 밀리의 서재와 같은 도서의 무제한 대출, 윌라와 같은 오디오북과 강연을 무제한으로 볼 수 있는 구독 서비스 등 네트워크효과에 의한 플랫폼비즈니스들이 수익모델을 광고에서 구독형모델로 전환하는 경우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유튜브의 경우도 광고가 없는 유튜브레드로의 전환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경제적으로 많은 혜택을 볼 수 있는 구독경제에 대해 긍정적이며 기업의 입장에서도 한 번 고객이 구독을 시작하면 이탈하기가 어려우며 매월 수입이 보장되므로 안정적인 사업이 가능한 구독모델을 선호할 수 있다. 동영상스트리밍의 경우 네트워크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엄청난 투자가 수반되어야 하는데 벤처캐피털의 경우 이러한 구독 및 플랫폼 모델에 대해서는 거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므로 보다 보편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과거와 달리 디지털 전환(D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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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아랫목이나 윗목이나 지면기사
국민총생산 세계 11위 오른 한국'삶의 질'은 20위권 후반 머물러소득주도성장, 자영업자 좌절 초래국가는 부자지만 국민은 가난해장기적 관점서 정책 처방 찾아야현재의 86세대는 1980년에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접했다. 군부권위주의정권 시대에 접했던 정보사회의 예언서에서 불과 15년쯤 후를 가늠하기는 어려웠다. 구로공단의 여공들과 청계피복노조의 전태일, 그리고 중화학공업의 산업재해와 중동건설 붐을 경험했던 세대들에게 정보화는 열악한 노동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열어주는 신기루였을까?그 후 40여년이 흐르면서 민주화도 산업화도, 그리고 정보화도 성취해냈다. 국민총생산은 세계 11위를 점하고, 1인당 국민총소득은 3만달러를 넘어섰으며, 인구가 5천만이 넘는 한국은 이른바 30-50클럽에도 들어갔다. 그 클럽의 회원국은 한국을 제외하면 모두 G7국가들이다. 그러나 정치체제는 민주공화국을 완성시키기 위한 적폐청산에 매진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사회적 균열과 갈등을 격화시키고 있다.그러나 냉정하게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40위권을 맴돌다가 작년에는 31위 수준이다. '삶의 질'은 20위권 후반에 머물고 있다. 놀랍게도 작년도 가계 1인당 가처분소득이 1천900만원 선에 그치고 있다. 국민들은 처한 위치에 따라 엄청난 혼란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경기불황, 실업, 가계부채 등에도 불구하고 연휴기간 동안 인천공항을 채우는 여행객들, 여전히 성업 중인 고급 식당들, 부동산 투자로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는 소식들은 누군가의 소득은 3만불을 훨씬 상회하리라고 믿게 한다. 소득 양극화에 대응하여 현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정책을 내걸었다. 그러나 중산층의 배아픔이나 상류층 따라잡기 욕망을 해소하기보다 하위 1분위 저소득층의 배고픔과 소득저하 그리고 자영업자의 좌절을 초래했을 뿐이다. 정규직 중심의 고용시장 재편이 자본의 반발과 양극화의 심화를 낳았을 뿐이다. 부동산으로 인해 자산증가율이 소득증가율을 앞지르고 나아가 높은 이자와 조세 부담을 지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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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칼럼]그래도 인사 청문회는 계속되어야 한다 지면기사
여·야 바뀌어도 출연진만 다르고 변함없어청와대 '7대비리 배제' 내놓고도 의혹 나와인식 바뀌지 않는 한 무용론 끊임없이 제기그래도 큰 꿈 그리는 '누군가'가 있을지도천막 안에는 사람들이 쭈그리고 앉아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불이 하나둘씩 꺼지면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곧 영화가 시작될 것이다. 뿌연 먼지를 가르며, 영사기에서 뿜어지는 강렬한 빛이 비치기 시작하면 일순간 적막이 흐른다. 초라한 하얀 천 위에서는 온갖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긴박한 순간마다 여기저기서 관객의 탄식이 터져 나온다. 개봉관과 재개봉관을 모두 거치고 마침내 여기까지 온 필름에는 시종 비가 내렸다. 그래도 좋았다. 모두 분위기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이윤복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와 김승호의 '마부'도 아마 그 천막극장에서 보았을 것이다. 마침내 영화가 끝나고 천막이 걷어지면 사람들은 뿔뿔이 밤길 속으로 사라졌다. 조금 전 사람들이 모여 웃고 울었던 공간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공터는 순식간에 텅 비었다. 그 허전함이란. 급조된 영화관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예외 없이 모두 TV 앞에 모였다. 이제 곧 장관 인사청문회가 시작될 것이다. TV 카메라 조명이 강렬한 빛을 발하며 카메라에 빨간 불이 켜지면 드라마가 시작된다. 물론 줄거리는 뻔하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의혹투성이인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TV 앞에 모인 건 이번만은 뭔가 다르겠지 하는 한 가닥 희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작심한 듯, 또 맥빠진 질문에 뻔한 답을 쏟아낸다. 2000년부터 우리는 TV를 통해 많은 인사청문회를 보았다. 달라진 것은 출연진뿐, 예외 없이 위장전입, 논문표절, 투기의혹, 이중국적 등은 변함없는 주요 레퍼토리였다. 여·야가 뒤바뀌어도 늘 그 타령이었다. 정쟁의 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늘 수많은 의혹이 있었지만, 면피성 답변만을 듣고 결국은 통과의례이거나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청문회는 막을 내렸다. 그들이 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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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근 칼럼]늦게 도착한 시집 지면기사
석달 지나 발견한 '파일명 서정시'쉽게 꺼낼 수 없는 두려운 말 가득표현하지 못하고 소리·가락 이룬 것 파일서 해방돼 시어 만끽하고 싶어그러기엔 다물어야 할 입 너무 많다며칠 전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경기도 용인)에 갔다가 어지럽게 뒤섞인 행정실 우편물 더미 속에서 나희덕 시인이 보내온 시집 《파일명 서정시》를 발견했다. 겉봉의 우체국 소인에는 분명히 '2018.11.23'이라 찍혀 있는데 대관절 어찌하여 석 달도 더 지난 지금, 계절마저 바뀐 뒤에야 내게 왔단 말인가. 게다가 적힌 주소는 서울 회기동인데 어디를 떠돌다가 이곳으로 배달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태 전 시인의 산문집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달, 2017)를 읽으며 사소한 일상에서 커다란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글에 감탄했던 나는 이번에도 비슷한 기대감을 품은 채로 시집을 펼쳤다가 그만 아픈 데를 찔린 병자처럼 지금껏 움찔거리고 있다.나는 시인이 이전에 펴낸 또 다른 서정 시집을 여러 권 가지고 있다. 서정시라는 말에 어울릴 만큼 하나같이 아름다운 시어들로 가득한 시집들이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는 쉽사리 입에서 꺼낼 수 없는 두려운 말들로 가득하다. 후기에는 시인의 고백이 이렇게 적혀 있다."이빨과 발톱이 삶을 할퀴고 지나갔다 / 내 안에서도 이빨과 발톱을 지닌 말들이 돋아났다 / 이 피 흘리는 말들을 어찌할 것인가 /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 / 시인이 된 지 삼십년 만에야 이 고백을 하게 된다"닻과 돛과 덫. 세 단어의 받침에 웅크린 'ㅊ'이 마치 가시처럼 보였다. 과연 시에는 상처 자국이 선연하다. 그래, 가시가 여기저기 걸려서 오는 길이 이렇게 험하고 더디었구나. 닻은 내리고 돛은 올리고 덫은 걸리는 것이다. 시인은 어쩌면 돛을 올려 다다르거나 닻을 내리고 잠시 머무는 장소를 찾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읽히는 시(<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여기서는 잠시>)가 드문드문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든 덫에 걸려 몸부림 친 흔적이 역력하다. 덫은 땅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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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호 칼럼]기후변화 무관심이 불러온 재앙 '미세먼지' 지면기사
에너지 사용·지구온난화로 발생오염 적은 '비싼 원료로 대체' 중요재택근무 등 탄력제도 확대 필요국내 에너지소비 매년2~3%씩 증가'적게 쓰는 경제' 생활화 전환 시급연일 미세먼지가 기승이다. 국가 재난사태라는 말까지 나온다. 지난여름 무더위는 저리 가라다. 한때 미세먼지는 고등어구이가 원인이라고 하여 논란이 일더니 지금은 원전과 중국발 원인 논쟁까지 겹쳐 진영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어제는 죽은 도시와 같은 하늘이 오늘은 청명한 하늘로 바뀐다. 기상이 미세먼지의 운명을 좌우한다. 우리 조상들이 기우제를 지냈듯이 하늘에 빌어야 할 상황이다. 그럼 기후가 좋으면 미세먼지는 발생하지 않는 것인가? 중금속과 응착된 발암물질로 분류될 정도로 건강에 해로운 미세먼지는 매일 거의 일정량 발생하고 있다. 모래바람이나 황사 등 자연에서 발생하는 먼지는 대부분 해롭지 않다. 해로운 미세먼지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기 정체로 미세먼지가 농축되거나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미세먼지가 우리나라에 도달하면 그때 고통이 시작된다. 기후를 통제할 수 없는 이상 우리는 '미세먼지 매우 나쁨'의 확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공강우나 바람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기후를 통제하는 시도가 있지만, 다른 지역으로 오염이 이동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결국 효과적인 방법은 미세먼지 발생을 줄이는 것이다. 기상 조건을 제외하고 미세먼지 발생 원인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결과는 명확하다. 석탄발전을 포함한 연료연소, 자동차와 같은 이동오염원 배출이 가장 큰 원인이다.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교통'에서 발생한다.그래서 미세먼지 대책으로 석탄발전소에 저감장치 부착, 석탄보다는 LNG(천연가스) 연료사용, 경유차 운행 제한, 심한 경우에는 차량 2부제 등이 실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이 미세먼지 발생단계에서의 조치라면, 공기청정기(가정용 또는 스모그타워)는 발생된 미세먼지를 흡착하여 감소시키는 방식이다. 어떤 방식이든지 부수적인 비용을 발생시킨다. 미세먼지에 대한 근본 대책은 없는 것일까? 산업화를 미리 겪은 선진국들은 어떻게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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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진 칼럼]상실 지면기사
보이지 않는 가치 '사랑' 잃어버려마음 한구석 인두로 지진듯 '아파'자기중심적 사람 이웃에게 상처만사랑한것 후회도 괴로워도 마세요서로 다독여주며 살아가면 되기에살면서 생기는 아픔 중에 가장 큰 것은 상실로 인한 아픔이라고 생각합니다. 병이나 사고로 생긴 아픔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회복됩니다. 그러나 상실로 생긴 아픔은 회복이 불가능합니다. 마치 마음 한구석을 인두로 지져놓은 것처럼, 이 아픔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상실은 어떤 대상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잃어버리는 것은 상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재산을 잃어도 회복할 수 있다면 상실이 아닙니다. 아끼는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 역시 상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분실입니다. 상실은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사랑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평생을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했는데 그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관심조차 두지 않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크나큰 상실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인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육십 대 중반의 어느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이 어머니는 최근 상실의 아픔으로 식사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일 다니던 성당에도 발길을 끊었습니다. 누구보다 아들을 사랑했고 아들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는데, 아들로부터 사랑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사랑을 상실했습니다.그분은 몇 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뒤 모든 유산을 아들에게 넘기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습니다. 매달 아들이 보내주는 소정의 생활비로 풍족하진 않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생활비가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다리다 못한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하면 아들은 그제야 짜증을 내며 돈을 보내왔습니다. 아들의 형편이 걱정이 돼 연락도 못하고 기다리면, 두 달이 지나서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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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하노이발 뉴스에 관하여 지면기사
우리는 통일이라는 것을 단순하게정치·경제로 논할 수 있는게 아냐'한국인' 인류적 종 존속위해 필요냉정과 침착속에서 서로 공존하고北동포들과의 미래위한 슬기 모아야하노이발 뉴스를 접하고 선배 작가 한 분은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글쎄요. 저는 언젠가부터 현안에 어두워져서 잘 모르겠는데요, 했다. 다른 한 분은, 충격이라니, 나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난 것부터 의외였거든, 하고 들뜬 사람들을 쉽게 타박한다.지금 청년들 중에는 이데올로기에 찌들고 가난한 북한 싫다고 통일이 절대적 필요 명제는 아니라 한다. 입만 벌리면 경제, 경제하고 경제병 걸린 나이 든 분들도 우리 먹고살기도 바쁜데, 한다. 아무리 속물적으로 느껴지더라도 그 안에도 일단의 진실은 있다고 봐야 한다.필자로 말하면 386세대, 어려서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배우며 자란 세대의 일원이다. 유신체제 때 '국민학교'를 다녀,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줄 알았고, 국가와 민족을 지상 명제로 끌어안고 성장했다. 이른바 '범생'이었기에 다른 친구보다 더하면 더했을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것도 철학이 아니라 국민윤리였으니, 왜 국민 윤리가 철학보다 먼저이고 철학은 중고등학교 과정에 있지도 않은 건지 물음표조차 생기지 않았다.이 국가 교육 때문에 생긴 부작용의 하나는 강렬한 정치 감각일 것이다. 필자가 서울로 대학에 진학하게 되자 부모님은 절대 현실 문제에 휩쓸리지 말고 공부만 하라 당부하셨다. 그러나 한 일 년 지나는 사이에 사람이 달라져 버렸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유신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민족이 어디로 가는지, 민족중흥의 사명을 띠고 태어난 자들이 어떻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조국'의 통일이라는 것도 필자에게는 처음에는 그런 차원에서 당위적인 명제로 받아들여졌다. 1945년 해방과 독립이 미완에 그쳤고 그나마 분단으로, 전쟁으로 치달았으니 원래의 상태를 회복해야 함은 당연지사 아닌가. 그래도 '통일 지상주의'에는 용케 빠지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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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식 칼럼]국민이 행복한 나라 지면기사
GDP 10위권 불구 '행복지수' 낮아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갈등 '심각'손익 얽매여 대립하는것 피하려면미래에 대한 목표·방향 설정 필요올해엔 '국가미래기본법' 입법 기대매년 유엔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UN 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s Network)가 발간하는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조사대상 156개국 중에서 57번째로 행복한 나라라고 조사되었다. GDP면에서는 세계 10위권임에도 불구하고 국민행복순위에서는 크게 처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예전에 비하여 경제적인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신과 갈등이 우리의 삶을 피곤하고 불안하게 만든다. 진보와 보수, 소득 계층, 세대, 지역, 노사, 심지어는 전기 생산 방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슈에 대하여 갈등과 대립이 심각하다. 터널의 끝이 언제 끝날지 모를 때 사람은 불안을 느끼고 견디기 어렵다. 하지만 언제 끝나는지를 미리 알 수 있을 때에는 훨씬 쉽게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훨씬 편하고 사회 전체적인 신뢰 수준이 훨씬 높아지게 될 것이다. 즉 우리 사회에는 과거와 달리 미래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나름대로 선거공약을 기반으로 2020 2030 같은 미래비전을 내어 놓지만 수많은 정책 과제의 나열이며 그나마 정권이 바뀌면 지난 정부의 정책 과제는 사라지고 만다. 지난 20년만 보더라도 국가균형발전 - 녹색성장 - 창조경제 - 소득주도 성장 등으로 슬로건이 바뀌어 왔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국민이 편안하고 행복해지는 것이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이 정부마다 차이가 있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매 정부에서 주장하는 것이 과연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민의 행복에 어떻게 기여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없이 새로운 슬로건으로 바뀌어 여야 간에 극한적인 대립과 갈등이 반복되니 국민들은 별로 행복하지 못하다. 핀란드의 경우 의회 내 미래상임위원회(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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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칼럼]3·1운동 100주년 그리고 미당 서정주 지면기사
'친일' vs '천재시인'… 극과 극 갈리는 평부천 상동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서 퇴출시비 놔둔채 '친일 시를 쓴 시인' 표시했다면'변절 목도' 교육효과 클수도… 철거 아쉽다여기 서정주의 '동천(冬天)'이란 시가 있다. 짧은 시니 전편을 인용한다. '내 마음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국어선생님은 교과서에 게재된 '국화 옆에서'와 함께 교과서에 없는 이 시를 해설해 주었다. 그러면서 "서정주가 아니면 절대 쓸 수 없는 시"라며 "미당은 100년에 한 번도 나올 수 없는, 두보와 견줘도 손색없는 시인"이라고 말했다. 40년 전이다.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매서운 겨울. 들판엔 눈이 쌓여 있고, 연처럼 하늘에 걸려 있는 초승달. 어느 한자도 넣을 수도, 뺄 수도 없을 정도로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시어(詩語). 마치 겨울 풍경을 찍은 한 장의 사진 같다. 그래서 처연하다. 그날 선생님의 이 시에 대한 해석은 대충 이렇다. "일체의 설명적 요소를 배제하고 고도의 압축과 상징으로 이루어진 상징시다. 짧은 시 형식과 상징이라는 표현 기법을 통해 강렬한 언어 긴장을 이루며 인간 본질의 탐구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정제된 미의식을 드러낸다".하지만 서정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었다. 오직 시만 가지고 논할 때 그의 이름 앞에는 '살아 있는 한국 시사(詩史)' '시선(詩仙)'이라는 찬사가 붙지만, 친일·친 독재 전력에 이르면 그의 이름은 '다츠시로 시즈오'가 되고, 전두환 생일에 축시를 쓴 파렴치한 시인이 된다. '꽃'의 시인 김춘수는 "미당의 시로 그의 처신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미당의 처신으로 그의 시를 폄하할 수도 없다. 처신은 처신이고 시는 시다."라는 말로 그의 이런 전력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 때문에 시인의 고향에서조차 미당을 내놓고 자랑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비극의 역사가 만들어낸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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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철 칼럼]열지 못한 세대, 닫혀가는 세대 지면기사
유튜브·페북·밴드·카톡 SNS매체유유상종·동종교배 네트워크 작동정치 '적폐 對 개혁'등 흑백균열 심화소통도 대안도 없이 분열사회 남겨민주화 불구 '그 그늘' 못 벗어난듯이른바 '밀레니얼세대'가 '꼰대' 586세대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수메르인들처럼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버릇이 없다'라고 점토판에 쓰거나 소크라테스처럼 "요즘 아이들은 폭군과도 같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대들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스승을 괴롭힌다"고 말할 수 없는 한국의 꼰대들은 우왕좌왕할 뿐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태어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성인이 된 20대 '밀레니얼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로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대면커뮤티케이션보다 온라인,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에 더 익숙하다. 간결하고 즉각적인 소통을 선호하고 줄임말을 구사하고 막말이나 아무 말도 서슴지 않는다. 수평적이고 효율적인 소통에 익숙하고, 정보수집에 능하며 멀티태스킹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의 세계를 설정하고, 사회적 인간으로서 기성세대와 그들의 사고, 이미 주어진 사회 및 세계에 적응하는 데 어색하다. 불합리성, 불공정성, 불투명성 모두에 적대적이고 고리타분하고 형식화된 절차를 기피한다. 어렵게 들어간 회사에서도 업무는 스스로 구획하려 하고, 상사의 대화시도를 간섭으로 불편해하고, 자신의 계획에 따라 거침없이 뛰쳐나오기도 한다. 그들과 다른 세대와의 소통은 가정과 사회에서 시도되기도 전에 장애에 직면한다.586세대인 고등학교 동창들의 모임이 있다. 지천명을 넘어섬에도 모두들 젊은 시절부터 민주화 흐름에 몸담으면서 다진 결기가 대단하다. 그러나 촛불집회와 탄핵, 그리고 대선으로 이어지면서 우파정치세력이 거의 몰락하다시피 한 이후에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상당하게 동질적인 집단이었지만, 연령효과로 인한 꼰대들에게는 약간의 차이도 크게 느껴졌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포장되기도 했지만, 그들 일부의 공통적인 희망은 '나와 다른 이야기로 나를 침해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평생의 믿음이 조금이라도 부서질까